우리나라는 유행에 민감하다. 천만 인구 서울로 대표되는 높은 인구밀도와 집단주의와 군중심리가 강해 남의 시선을 유난히 의식한다는 점이 주된 이유로 꼽힌다. 한때 구하기 힘들었던 먹태 맛이 난다는 과자는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배의 가격에 거래됐다. 지드래곤이 경찰 출석 시 입었던 사필귀정룩은 동이 났다고 한다.
남편이 집에 들어오더니 갑자기 슬릭백을 연습하며 방과 방 사이를 지나갔다. 최근 틱톡 챌린지로 화제가 된 옆으로 미끄러지듯이 걷는 춤이다.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 같기도 하고. 대충 보니 방바닥에 붙어있는 듯 떠 있는 듯 그럴듯하다. 나도 곧장 따라 해보고 싶었지만, 맹장 수술 후 아직 복압에 주의해야 하는 시기인지라 꾹 참았다. 슬릭백하다 실밥이 터지면 안 되니까.
최근 체감한 패션에서의 큰 변화는 바지의 통이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다리에 꼭 밀착되는 스키니진을 즐겨 입었다. 체형의 변화가 크게 없던 나는 오래전에 산 바지도 크게 유행을 타지 않는 한 계속 입는 편인데 이제 스키니진은 더 이상 입기가 민망해져 버렸다. 바야흐로 헐렁헐렁한 통바지의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 때 엄마한테 혼이 나면서도 질질 끌고 다녔던 일명 힙합바지와 얼추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오랜만에 딸 둘을 키우는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 큰딸은 초등학교 2학년이다. 요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산리오라는 캐릭터가 유행이라고 한다. 산리오 캐릭터로 만들어진 굿즈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다행히 이모가 들고 간 선물은 산리오 키링 DIY 키트였다. 사장님 추천을 믿길 잘했다. 손을 잡고 길을 걸어가는 동안 귀여운 조카는 계속해서 슬릭백을 몇 번이나 연습했다. 남편보다 조금 더 잘한다.
유행은 소셜미디어나 패션 아이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공으로 가는 길에도 유행이 있다. 장래 희망이나 유행하는 대학의 과도 시대마다 다르다. 드라마 ‘허준’을 방영할 때는 한의학과가, ‘하얀거탑’이 방영될 때는 의대의 커트라인이 높아졌다고 한다. 직장인의 경우 경제적 자유를 손에 쥐어주어 지긋지긋한 회사에서 탈출시켜 준다는 오만가지 강의들이 넘쳐난다. 명품 시계, 강남 아파트 같은 비싼 유행도 있다. 가랑이 찢어지게 유행의 대가를 지불하면 현생의 계급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유행에 밝은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유행에 적절히 부합한 스타일링은 스스로 자신감을 줄 뿐 아니라 오히려 튀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해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를 준다. 또한 관계 속 소통과 대화에 윤활유가 되어준다. 연령과 성별이 다르다면 그 코드는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간혹 사회적 이슈에 반응하는 집단주의적 유행을 볼 때면 왠지 모를 자랑스러움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마케팅 직무를 맡았었기에 특히나 사람들이 어떤 것에 열광하는지 주시하는 것은 업무적으로도 도움이 됐다.
문제는 나의 고유한 정체성 없이 유행에만 휘둘릴 때다. 개인의 세계관과 철학에 기반한 행동양식을 바탕으로 적절하게 유행을 선택하는 것은 센스다. 하지만 무분별한 모방은 나를 지운다. 나를 지울 뿐 아니라 내 지갑도 비운다. 유행이라는 무대의 뒤에는 상업적 의도와 수 많은 이해관계들이 촘촘하게 얽혀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유행은 돌고 돌지만 정체성은 그렇지 않다. 우직하게 항상 그 자리에 서 있다. 그 정체성은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유행의 바람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흔들려 뽑히지 않도록 지탱해 준다. 잠시 길을 잃더라도 다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준다. 결국 내가 무엇을 입든 어디에 살든 중요한 건 고유한 나의 정체성이다.
나에겐 치명적이었던 유행은 자기 계발의 영역에서 불곤 했다. 몸값을 올려줄 것 같은 강의란 강의는 한 번쯤은 훑어라도 본 것 같다. 영어 실력이나 업무 스킬을 향상해 준다는 강의들 말이다. 마케팅 강의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코딩 언어를 배워볼까 하는 지점에 이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러다 앱 개발자가 될 수도 있는 걸까? 정체성의 혼란이 왔다.
답을 찾기 위해 다른 이가 아닌 나에게 질문을 던져보기로 했다. 진짜로 코딩을 배워볼 생각인지 질문을 던지자 상상만으로도 괴로워졌다. 그럼 진짜로 네가 원하는 게 뭐냐는 질문으로 돌아가자 이미 나에겐 명확히 좋아하는 것들과 잘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럼에도 곁눈질을 한 것은 이 길이 지난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름길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나라는 사람의 재질을 따라 정도를 걸어가는 것, 그만이 답임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곤 앱 개발자를 위한 입문 강의가 아닌 마케팅 담당자를 위한 코딩 강의를 검색했다.
오늘도 선택의 여지 없이 에코백을 들고 나선다. 실용적인 나의 아이덴티티에 꼭 맞기 때문이다. 센스있는 MZ 언니가 돼보려는 심산으로 귀여운 인형을 가방에 하나 달기로 한다. 집을 나서 단골 카페에 들른다. 누가 봐도 커피에 진심인 사장님이 좋은 원두를 정성스레 볶아 내리는 샷은 늘 감동이다. 가끔 당이 부족할 때면 메뉴판에 있는 아무 메뉴나 주문해도 후회가 없다. 한 스쿱의 휘핑크림이나 옅게 흩뿌린 시나몬 가루만큼의 감칠맛, 유행의 맛은 그런 것이 아닐까.
[저자소개]
필명 따티제. 풀어서 말하면 따뜻한 인티제(MBTI 성향 중 INTJ의 별칭). 서울 올림픽 기억 안나는 87년생. 흔한 K장녀. 혼자 다 해야 하는 작은 외국계 기업 1인 마케터로 본능을 거스르고 알잘딱깔센(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 강제장착. 아무거나 안 하는 고집쟁이 프리랜서 도전 중. 밥먹듯이 밤새는 수학강사의 아내. 쓰고뱉다 21기(대한민국 No.1 글쓰기 강좌)에서 글 배우는 중. 정리되지 않은 누군가의 마음 속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듯, 읽으면서 시원해지는 글을 쓰려는 중. 오후 늦게 일을 시작한 포도원 일꾼들에게도 일찍 일을 시작한 이들에게와 같은 품삯을 주는 사회적기업 대표가 되는 꿈 꾸는 중.
글쓰기 모임 <쓰고뱉다>는 함께 모여 쓰는, 같이의 가치를 추구하는 글쓰기 공동체입니다. 개인의 존재를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닉네임을 정하고, 거기서 나오는 존재의 언어로 소통하는 글쓰기를 하다 보면 누구나 글쓰기를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걸어왔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뉴스레터로 발송되는 글은 <쓰고뱉다> 숙성반 분들의 글입니다. 오늘 읽으신 글 한잔이 마음의 온도를 1도 정도 높여주는 데 도움이 되셨다면 아래 ‘댓글 보러 가기’를 통해 본문 링크에 접속하여 ‘커피 보내기’ 기능으로 구독료를 지불해 주신다면 더욱더 좋은 뉴스레터를 만드는 데 활용하겠습니다.
댓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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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심이
잘 읽었어요.표현이 참 감칠나게 착착 감기네요~ 앞으로도 좋은글 기대할게요~
따티제
영심이님 :) 힘나는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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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피어
어떤 생각을 피력할 때, 참 어려운 점이 편중되지 않게 설득할 수 있을 때 글이 빛나는 것 같아요! 따티제님의 이번 글에서 저 완전히 동의하고 설득 되었어요! 게다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완벽한 글에 그저 입이 벌어진 채 읽었어요. k장녀의 힘빼기 연습은 왠지 더 안하셔도 될만큼 경지에 오른것이 아닌가해서 너무 부럽습니다.
따티제
글은 그럴듯 해도 현실은 아직 제자리걸음인 것만 같아요ㅎㅎ 그렇지만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니까 글로 한걸음 내딛었다 생각해보려고 해요- 다음 뉴스레터의 주인공이 되시는 날을 기다려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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