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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반드시 엄마의 희생이 수반되는 일이었다. 상상 이상으로 많은 것을 매일 더 포기해야 하는 삶이었다. 경험해보니 이건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키우는 일 자체가 누군가의 생명을 깎아내리는 헌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이 세상의 시스템이 그랬다. 그러니, 아무것도 모른 채 자기중심적으로 살던 여자들이 엄마가 되는 과정을 통해 절로 그 삶에 적응하며 ‘기꺼이 자식 위해 헌신하는 엄마’로 성장해 가는 것일 뿐이었다.
평생을 내가 하고싶은거 하고 내가 먹고 싶은거 먹고 자고 싶으면 자던 내가 그 어떤것도 내 맘대로 할수 없는 삶을 처음 살아봤으니 그 스트레스는 정말 어마어마 했다. 아이에게 그 스트레스를 풀수는 없어서 모든 스트레스를 옆에 있던 남편에게 모두 쏟아 부었던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 하필 아이 신생아 시절에 너무 바쁜 탓에 옆에 있어주지 못한 남편의 빈자리가 얼마나 크던지. 또 그게 얼마나 오랫동안 서운 하던지. 아무리 아빠가 도와주려고 해도 엄마란 존재는 대체 불가해서 오롯이 혼자 그 무게를 견뎌야 하는 밤들은 얼마나 또 외롭던지.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더 약해져있던 산후시기에 나는 남편 만큼은 나를 절대적으로 도와주고 보살펴 주길 원했다.
하필 아기 100일 이전 신생아 시절에 남편은 교회사역과 왕복 4시간 거리 신학대학원을 오가느라 집에 거의 없었다. 상상이상으로 힘들었던 그 시간에 옆에 없었던 그 서운함이 꽤 오래갔다. 남편도 코피 쏟으며 힘들게 지냈던 시기였지만 나는 내 힘듬만 보였다. 사역은 나도 해봤지만 애 키우는게 더 힘들다고. 그러니 남편보다 내가 더 힘들다고. 그러니 힘들겠지만 남편은 무조건 나를 도와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때까지 나는 남편은 무조건 나에게 맞춰주고 나를 도와야 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그에게 맞춰주는것은 별로 없으면서. 그냥 받는게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하나님이 아니었고, 나의 세밀한 모든 필요를 다 채워줄수는 없었다. 결혼하고 처음 우리는 자주 싸웠다. 애 앞에서 소리 지르면서 싸우기도 했다. 갈등은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고 같은 문제가 쳇바퀴 돌듯 계속 반복됐다. 아이가 17개월 됐을때즘, 어린이집을 가기 시작했을 때 였을 거다. 드디어 가지게 된 개인 시간에 나는 다시 조용히 묵상을 시작했다. 그날 아침 주님은 조용히 꾸짖으시며 물으셨다.
‘네 남편은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란다.
내가 내 아들을 돌보듯 너도 함께 돌봐야 하는 영혼이란 사실을 알고 있니?
네 남편도 너의 섬김이 필요한 대상이란다.
네가 가족에게 기꺼이 헌신하는 모습을 볼때 나는 아주 기쁘단다.
네 남편을 위해 기꺼이 생명을 걸었던 내 사랑을 기억하고 작은 것이라도 실천할때
비로소 네가 가정안에 화목의 통로가 될 것이란다.’
왜 그렇게도 내 것을 내어주고 포기하는게 싫었던 걸까. 특히 남편한테 만큼은 절대 그럴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식에게 이미 나의 한계 이상으로 내어주고 있으니 남편한테는 당연히 이기적으로 굴어도 된다고 굳건히도 믿었다.
부드럽게 훈계하시는 말씀 앞에 나는 내 이기심과 죄를 인정하고 순종할수 밖에 없었다.
온 몸으로 뿜어내던 부정적인 마음과 습관적으로 내뱉었던 남편을 탓하는 말들을 안으로 삼키며 주님께 도움을 의탁 했고, 참 오랜만에 남편의 영혼을 위해 중보했다. 그리고 나는 기꺼이 남편을 섬긴다는 마음으로 육아와 집안일에 좀 더 수고 하기로 결단 했다. 그때서야 해결될것 같지 않던 오랜 갈등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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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자기에게 다 맞춰주는 남자를 원하고 남자는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두는 여자를 원한다.’
책에서 본 내용인데 우리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너무 와닿아서 기억에 남았다.
서로 욕구가 정반대이니 남녀가 함께 살며 돕는다는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내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의 도움을 받으니 상대방도 그제서야 변한다. 결혼도 1막과 2막이 있다고 한다. 1막은 달콤한 신혼시기이고 2막은 주로 신혼 시기가 끝나는 결혼 5년차즘이거나 아이를 낳고 난 뒤 찾아온다고 한다. 애착과 열정 친밀한 사랑의 과정을 거쳐 서로를 섬기고 헌신하는 단계의 사랑으로 성장해야 하는 시기, 혹은 시험대에 오르는 시기가 오는 것이다. 우리는 아마 그 2막의 지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각자도생의 시대에 일단 나 먼저 살아남아야 하는 자기보호본능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 먼저 하는 것이 미덕이 되어버린 시대에 더 이상 희생은 미덕이 아니라 미련한 짓이 되어버렸다. 부부끼리도 계약관계인 마냥 내가 한번 설거지하면 너는 분리수거 하는 것이 당연해진 시대에 살고 있으니 나도 또 한번 속았다. 그게 당연한 것인줄 알았다.
절대 헌신하지 않으려 애썼으니 관계가 나빠지는건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나에게 좋은 것, 내가 편한 것, 내가 좋아하는 것, 온통 ‘나’를 위해서만 살라고 그게 답이라고 종용하는 세상의 이야기가 한없이 자기중심적인 우리의 본성과 어찌나 찰떡인지. 그리스도인들 마저 속는 요즘 세상 속에서 ‘헌신’이 ‘진정한 사랑’이고 그것에 기쁨이 있다는 진실은 또 얼마나 역설적인지.
결혼 생활을 통해 한 사람과 오래 관계를 가꾸어 가면서, 아이를 낳고 키워보면서 배운 사랑은 베푸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랑은 종이 되어주는 것이고 희생하고 포기하고 내가 죽는 것이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 말이다.
결혼 하는 것이 마치 내 인생이 사라지는 것 같아 두려워 소중한 사람을 놓쳐버릴 뻔 했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부부가 같이 동역하며 사역할때 주님은 풍성한 사역의 열매를 주셨다. 이유를 물었을때 주님은 ‘결혼 선물’이라고 말씀하셨다. 두 사람의 결혼을 내가 너무 기뻐하노라고.
아이를 낳고 나는 휴직기간동안 육아에 전념하면서 내가 남편 사역의 서포트 하는 ‘사모’가 된게 정말 싫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편 사역은 남편 사역이고 내 사역은 내 사역이라고 생각했었다. 시간이 지나고 주님은 또 한번 우리 가정의 필요를 풍족히 세우시며 선물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너의 수고와 헌신을 기억하고 있노라고.
서른 초반에는 아이 갖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 정말 나를 잃어버리는 것 같아서. 하나님은 충분히 사역할수 있도록 기다려주시고 느지막히 아이라는 선물을 주셨다. 낳고 나니 이 행복의 농도는 싱글일때보다 부부일때보다 훨씬 진하다. 결국 우리는 주님의 형상을 닮았기에 내어주고 섬길때 진짜 행복을 맛볼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가정을 세워가는 여정을 통해 배워가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희생은 관계를 깊어지게 하고 신뢰하게 만든다. 희생과 헌신으로 엮어진 관계는 반드시 열매맺는다. 그 열매의 맛은 더 헌신할수록 깊고 진한 맛이 난다.
헌신 하는 사랑은 삼각형 모양 사랑의 가장 꼭대기에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건 그만큼 높은 차원의 사랑의 모양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본성을 거슬러야 하는, 그러나 사랑의 진수를 맛볼수 있는 , 가장 진한 기쁨을 경험한다는 역설이 있는 , 무엇보다 주님이 없으면 할수 없는 ‘사랑.
‘서로 사랑할 때 네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말씀하신 것이 절실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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