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작가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 를 읽고
#하트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평생 양가감정을 가지고 산다는 걸 의미한다. 아이가 아파 입원을 했을때 엄마로서의 나는 아픈 아이를 돌보는데 마음과 정신을 집중했지만 작가로서의 나는 그 주의 일정을 조율하고 미루고, 취소하고 다음 일정을 걱정했다. 퇴원일정에 맞춰 업무일정을 조정하기 바빴다.
아이가 생기기전까지 내 삶은 생산성과 효율성, 성과라는 가치에 맞춰 돌아갔다면 이제는 다른 차원의 인생의 한 시기를 보내는 것 같다. 아이들은 아프고 나면 쑥 커버리곤 하는데, 그러고 나면 한층 더 노화된 내 모습도 동시에 발견하게 된다. 생산성이나 효율성과는 거리가 먼, 나의 젊음과 푸름을 먹고 자라나는 생명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걸 체감한다.
입원하고 사흘정도 아이는 약기운 때문인지 잠을 오래 잤다. 그 시간에 나는 챙겨 온 노트북을 열어 업무를 했고 글을 썼다. 아니면 책을 읽었다. 아이를 재우고 노트북을 켜고 일 하고 있는데 잠깐 간호사가 다녀갔다. 순간, 저 간호사는 꾸역꾸역 노트북을 챙겨와 일하고 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싶어졌다. 내 자신에게 반문해봤다. 지금 쓰는 글, 몇명이나 본다고. 돈 버는 일도 아닌데 아이를 먹이고 재우는 일보다 실용성도 없는 이 일에 나는 왜 그리도 열심일까. 뭐라도 쓰고 있는 시간이 왜 그리도 나에게 소중한 걸까.
육아를 시작하고 아이가 자고 있거나 아이와 떨어질수 있는 잠깐의 시간이면 나는 항상 뭔가를 쓰고 있었고 책을 읽고 있었다. 그래야만 했었다. 엄마, 아내, 딸, 며느리, 간사, 청년부 교사 등 무엇이든 간에 내 모든 삶은 다른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인데 나 자신을 위해 하는 유일한 일은 글쓰기였으니까.
또, 아이와 나 사이에 정신적 시간적 거리를 둘때에만 내 안의 창조성을 지탱하는 존재감과 권리감, 자아 몇 모금을 확보할수 있었다. 이것은 아이를 방임해야만 나를 보호할수 있는 양자택일의 시간이자 창조성과 돌봄이 동시에 일어나는 모순된 순간이기도 했다.
엄마로서 아이와 함께 시간 보내며 행복감을 누리는 동안 내 안의 창작의 씨앗은 매말라가는 것 처럼 보였다. 사랑에 빠졌고 행복했고 가정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독립적인 자아를 돌볼수 있는 여유는 없었다. 독립심과 자아가 상실되는 것은 내가 견딜수 있는 것 이상으로 괴로울 때가 많았다. 하지만 아이를 떼어놓고 일을 하러 가는 죄책감을 감수하면 나는 온전히 그 곳에 ‘나’로 있을수 있는 자유와 몰입, 고독, 창작의 시간을 확보할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를 만나고 사랑에 빠져버린 순간들은 내가 한때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지워지는 경험이기도 했다. 내가 무조건적으로 의심없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온 마음을 바친 사랑과 돌봄의 경험, 곁에 있으면 느껴지는 큰 기쁨은 내 생에 가장 강력한 경험이었다. 아이에게 처음 젖을 먹였을때 느꼈던 하나되는 일체감은 내가 경험해본 감정중 가장 위대했다. 그때만큼은 내 자아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 것 처럼 일시적으로 자아가 지워지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겪어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든 경험과 누군가에게 깊이 헌신하는 삶의 전환은 세상을 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꿔 놓았고 창작과 복음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볼수 있는 시야를 열어주었다. 그 깨달음들은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놀아주고 소통하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구체화된 일상속에서 순간순간 이뤄졌다.
드라마 ‘마더’와 ‘작은 아씨들’을 쓴 정서경 작가님도 <돌봄과 작업>이란 책에서 아이를 낳고 작가로서의 삶도 달라졌다고 했다. 아이를 낳고 나서 사람을 이해하는 성찰이 깊어졌다고 했다. 실제로 작가님이 아이를 낳기전 작품과(주로 박찬욱 감독과 철학적이고 살짝 기괴하기도 한 각본작업을 해왔다) 아이를 낳은 후 작품의 색깔과 방향이 많이 다르다. (마더라는 작품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 또한 아이를 낳고 나서야 내가 진짜 쓰고 싶은 글이 뭔지 발견했다. 아이는 내가 글쓰면서 처음 만난 뮤즈였다. 그토록 찾았던 나의 사랑스럽고도 영원한 뮤즈 덕분에 유명해지고 인정받기 위한 글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글을 써야 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또 ‘내 인생을 바꾼 복음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할때 가장 가치를 느끼고 가슴이 뛴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
그러나 또다시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육아도 풀타임이고 일도 풀타임인데 혼자서 두 가지일을 다 해내는 건 불가능했다. 셋이어야 그나마 세 가지 일이 가능했다. 반쪽 자리 시간과 반쪽 자리 자아를 가지고 나는 더디게 쓸수 밖에 없었다. 아이가 돌즈음 되면서 낮잠 시간이 줄고, 잠이 없는 아이가 엄마와 더 놀려고 안자고 버티던 그 시기에 나의 자아와 창조성은 질식당하는 듯했다. 아이가 아프면 2주나 3주는 아예 글을 쓸 수도 없고 책 한장 읽을 시간도 없이 지나가버리는 날도 있었다.
유모차를 끌고 산책하면서 고독과 사색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지만 실상은 지나다니는 차를 좌우로 살피며 조심히 유모차를 끌고 아이의 자그마한 소리에도 즉각 반응해야하는 순간이 더 많았다. 한참을 유모차를 태우다 그 안에서 아이가 잠이 들었을때 후다닥 일기장을 꺼내 떠올랐던 글을 휘갈겨 쓰고, 책을 꺼내 급하게 읽어내려갔다. 아이를 안고 재우면서 써야할 글의 소재와 아이디어를 생각했고, 출퇴근 하는 길에 휴대폰으로 글을 썼다. 길게 시간을 내서 집중하고 싶었지만 짬날때 틈틈이 조금씩 즉흥적으로 때로는 산만하게 썼다. 중요한건 그렇게라도 하면 안 쓰는 것 보다는 뭐라도 완성이 된다는 것이었다.
유명한 여성작가들도 엄마가 되고 나서는 아이를 재우고 밤 8시부터 12시까지, 혹은 누워만 있는 아이를 책상에 올려두고 앉아서 썼다고 하니, 사실 중요한건 시간보다는 얼마나 그걸 하고 싶은가의 문제인 것은 분명하다. 아이를 키우면서 얻는 풍요로운 경험과 영감들을 쏟아낼 30분의 시간만 매일 확보할수 있어도 무언가를 써 내려갈수 있으니까.
그러나 시간이 없는 문제는 여전히 내 안의 창조성을 위축시켰다.
아이를 낳고나서 목표지향적인 내 성향은 많이 누그러들었다. 현실적으로 조정이 필요한 영역이기도 했고, 이전에 추구하던 성과와 효율성이란 가치가 생명이라는 위대한 가치보다 의미있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를 돌보는 시간외에 뭐라도 써보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도 가끔 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을까 싶을때가 있다. ‘실용성 하나 없는 이 글쓰기가 뭐 그렇게 의미 있는가, 내가 뭐 그렇게 대단한 일 한다고 아픈 애를 두고 출근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들이 자주 나를 마비시킨다. 그뿐이면 다행인데, 여자는 끝도 없고 해도 티 안나는 집안일을 매일 해야하고 산후에 망가져버린 몸과 건강도 회복시켜야 한다. 아이를 갖고 낳는 것도 여자의 일이다. 한가지 목표를 향해 전력투구하기에는 불리한 점이 다소 많다. 그나마 사회적 인식이 전보다 달라져서 일하는 엄마를 이해해주는 분위기가 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엄마도 무언가를 성취할 권리라도 주어졌으니 말이다. 물론 이전보다 강한 힘과 의지, 용기가 필요하지만.
이쯤 되니 나를 빼앗기는 건 아이일까. 일일까. 나를 채우는 건 일일까. 아이일까. 헷갈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돌봄과 창작작업은 서로를 침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서로를 상생하게 하는 이상한 관계다. 돌봄은 창조적인 일이기도 하고 창작이 오히려 돌보는 일이 되기도 한다. 아이 덕분에 엄마로 다시 태어난 나는 새롭게 재창조된 자아로 글을 쓴다. 엄마로서의 경험을 믿을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나는 더디더라도 계속 내면의 소리에 따라 무언가를 써내려갈 것이다. 엄마와 작가는 어느 하나가 더 위대하다거나 보잘것 없다기 보다는 서로 다른 삶일 뿐이다. 엄마 작가로 산다는 건 더 많이 사랑하는 삶이고 성격이 다르지만 두 가지 일 모두 사랑하기때문에 애쓰는 삶이다.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라는 책이 있다. 어쩜 딱 맞는 표현인지.
사랑하는 나의 아이, 뜨개질 보다 실용성 없어도 그 일에만큼은 나를 던지고 싶은 글쓰는 작업.
소중한 두 가지를 모두 지켜내고 싶은 나는 앞으로도 상실감과 좌절에 낙담하고 어떤 때는 만족하고 기뻐하며 이 길을 갈 것이다. 엄마이자 글쓰는 사람으로 수없이 고민하며 버틴 시간들은 나를 또 다른 사람으로 재창조 시켜줄것을 믿는다. 그 시간을 통과해낸 나는 몇년 뒤에 또 어떤 글을 쓰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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