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최근에 울어본 적이 언제야?”
나는 한동안 답을 하지 못 했다. 구구절절 긴 속내를 다 말할수 없었거니와 마음에 눈물이 고이는지도 모른 채 살아내야하는 순간이 더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금요일 오후, 어린이집 선생님의 전화가 걸려왔다. 직접 전화를 하셨다는 건 아이가 아프다는 용건일 가능성이 높다. 놀람과 동시에 불안함을 안고 통화용건을 들어보니 아이가 열이 38도란다. 일단 해열제를 먹여달라고 하고 나는 얼른 하원하러 데리러 갔다. 그날밤부터 밤새 열이 올라 힘들어하는 아이를 간호하다 주말이 지나갔다. 소아과에서 처방받은대로 열감기라면 3일째에는 열이 떨어져야 하는데, 여전히 밤만되면 39도 40도까지 올라 아이가 너무 힘들어했다. 다시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폐렴이었고 열이 5일째가 되도 안 떨어졌으니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아이의 첫 입원이었다.
언젠가는 우리에게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만 했던 것이 현실이 됐다. 5일간 좁은 병원안에서 아이와 둘이 입원생활을 보냈다. 아이가 가장 아팠던 처음 이틀은 아이가 내리 잤고 밥은 한 입도 먹지 않았다. 자는 시간 외에는 종일 아이를 안고 있어야했다. 아픈 아이를 보니 나도 입맛이 싹 사라져버렸다. 출퇴근이 불가능해 같이 있어줄수 없었던 남편이 끼니 챙겨먹으라고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사준 것들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셋째날부터 조금씩 컨디션이 돌아오더니 링거 꽂은 채로 뛰어다니려는 아이를 붙잡으러 다니기 바빴다. 종일 좁은 병실에 갇혀 심심해하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혼자 아이 보면서 맘 편히 화장실이라도 가려면 결국 영상의 힘을 빌릴수 밖에 없었다. 두돌될때까지 안 보여주려던 ‘타요’를 결국 보여주고 말았다. 나도 아이도 영상의 힘을 빌려 뇌를 좀 쉬게 하는 나름의 휴가 시간이기도 했다. 입원 3일차가 됐을때는 폭염에 전기세 걱정없이 에어컨 바람 쐬면서 이레 먹을 세 끼 식사 차려주는게 편하기도 하다며 합리화 하고 즐겨보기도 했다.
퇴원예정일 전 날 한번 더 의사진료를 봤다. 숨소리가 여전히 좋지 않았는지 의사는 좀 더 아이 상태를 보고 하루 더 입원이 필요할수도 있다고 했다. 퇴원하기로한 날 오후, 나는 미룰수 없는 사역일정이 있었다. 마음 속에 두 마음이 상충했다. 이번에도 나는 양자택일을 해야했다. 어느쪽을 택하든 죄책감과 미안함이 따라올수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2주나 출근을 안 할수는 없으니 나는 어린이집 등원이 언제부터 가능할지도 물어야했다. 의사는 최대한 기관에 보내지 말고 가정보육하라고 했다. 폐렴은 치료제가 있는게 아니고 쉬면서 증상이 완화되길 기다릴수 밖에 없는데 완전히 나아서 퇴원하는것도 아니니 새로운 바이러스에 전염되어 오면 더 악화가 되서 재입원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는 것이다. 남편은 3일뒤면 한달간 선교 일정으로 한국에 없을 예정이었고 나는 또 다시 휴가 조율을 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전염성 높다는 수족구 환아가 어린이집에서 발생했다는 공지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때부터 잘 지키고 있던 마음에 큰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요즘 말로 ‘현타’가 세게 왔고 멘탈이 바사삭 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의 마음 상태는 어느정도 예견이 되어있었다. 나라도 정신 차리고 마음 강하게 먹어야 하는 여러상황속에서 애써 약해지려는 내 마음을 감추려고 했을뿐, 육아하는 내내 나는 늘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싸워야 했다.
남편이 여름에 한달간 선교간다는 일정을 듣고서부터 나는 밤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아졌다. 남편없이 혼자 아이 등하원에 편도 두시간씩 걸리는 출퇴근 일정을 소화하는 것도 물론 체력적으로 힘에 부치겠지만, 그것보다도 아이가 갑자기 많이 아픈 상황이 생기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 아이랑 둘이 있는데 갑자기 새벽에 응급실 가야 하면 어쩌나, 입원하면 어쩌나 등등. 불안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산더미처럼 늘어나기만 했다.
육아하면서 가장 두려웠던 때는 신생아를 처음 돌보던 때였다. 아무 경험도 없이 무지한 내 자신이 그땐 그렇게도 두려웠다. 한팔에 겨우 안겨지는 이 작은 아이, 나보다 소중한 아이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상상은 엄마의 보호본능과 결부되어 수많은 엄마들을 괴롭히는듯 했다. 시간이 쌓일수록 적응이 되고 능숙해지면서 두려움은 잠재워지는듯도 했지만 익숙해질만하면 새로워지는 육아의 세계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 할때마다 두려움과 불안은 매번 강한 힘으로 나를 옭아맸다.
처음 해보는 일, 사람 생명과 관련된 일, 끝이 없는 프로젝트의 책임자, 정서적 영적 체력적으로 강한 집중력과 애너지가 필요한 일, 매번 새롭게 공부해야 하는 것들(영양, 의학, 발달 등등) 그 무거운 책임을 대신 나눠져줄 사람이 없다고 느낄때마다 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과도 싸워야했다. 휴직중일때는 연고가 없는 동네에 사는 것이, 복직하고 나서는 잠깐 부모님 도움도 받기 어려운 상황이 더욱 나를 고립시켰다.
정서적 에너지가 자주 고갈되고 벅찬 마음이 들때마다 나를 더 외롭게 했던 건 나는 가족에서도 교회와 간사 공동체 안에서도 강한 사람이어야 하고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작 나를 돌볼 시간도 없이, 충전할 시간도 없이 나는 매일 누군가를 돌보고 바쁜 일과를 해내야했었다. 이번에도 도저히 내 힘으로 해낼수 없다고 벅차다고 기도할때 주님은 이 찬양을 들려 주셨다.
‘그대 폭풍 속을 걷고 있을 때
비바람을 마주해야 할때
불빛조차 보이지 않아도
그대 혼자 걷지 않을 거에요
두려움 앞에서 하늘을 보아요
외로운 그대여 걱정마요
꿈꾸는 그 길을 걷고 또 걸어요
그대 혼자 걷지 않을 거에요 ‘
그 찬양을 들으며 기도하는데, 홀로 신생아 돌보며 아이와 같이 울던 시간 그 장소에, 울면서 매달리는 아이 떼놓고 바쁘게 출근길로 걸음을 옮길때, 허둥지둥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얼른 하원시키러 가는 퇴근길에, 내 마음이 바닥나는 걸 인지하지도 못한 채 밀려들어오는 일 또 일 하러 움직이고 있을때, 아이 재우고 남은 사역을 마저 하고 있을때 , 아픈 아이 안고 돌보는 밤을 지날때, 맡겨진 영혼들을 더 섬기지 못해 동동거리고 있을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해 속으로 삭히고 있을때 오랜만에 기도의 자리에 앉아 주님께 하소연하던 그 시간 그 장소마다 주님이 함께 앉아 계신 모습이 머리속에 그려졌다. 나는 그날 어린아이처럼 엉엉 목놓아 울었다.
엄마로 사는 동안 스스로를 힘들게 만들었던 감정의 이름이 무엇인지 기도하던중에 깨닫게 됐다. 두려움과 외로움 이라는 이름이었다.
두려운 상황들을 두고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다. ‘주님 제발 아이가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주님의 응답은 ’회피하지 말고 나를 의지해서 정면돌파하라‘는 것이었다. 너무 두렵지만 주님 손 잡고 한걸음씩 뛰어넘는 현실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털어놓았을때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천사를 보내달라‘는 기도제목에 응답해주고 계신다. 주말을 함께 보내주겠다는 친구의 연락이 오고, 30분을 차타고 가야하는 교회 오가는 길에 기꺼이 차를 태워주는 교회동역자들을 붙여주신다. 남편이 선교간걸 아는 성도분들,동료들이 나를 먼저 걱정해주신다. 나의 마음을 공감해줄 수 있는 엄마들과의 대화를 통해 다시금 해내볼 힘을 더해주신다.
지금 나는 폭풍속을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바람과 파도에 흔들리는 배 속에서 너무 두렵고 지쳐 배에 같이 타고 있는 예수님을 보지 못할때, 주님은 동역자를 붙여주시고 그들은 내가 미처 못 보고 있던 주님을 보라고 얘기해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개들어 주님을 바라보는 것뿐이다. 겁많은 우리 아들이 엄마 손 잡고 용기내 한걸음 내딛듯이 눈 꼭 감고 주님 도와주세요 하고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위에 발을 내딛어 보는 것이다. 모르겠다. 주님 믿고 가보자 하는 것뿐이다.
폭풍우 몰아치는 하루하루다. 울더라도 주님 붙잡고 오늘도 무사히 통과해내본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에게도 묻고 싶다.
“최근에 울어본 적이 언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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