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것들을 채집해서 간단한 라벨(날짜, 장소, 상황) 같은 걸 딱 붙여 머릿속에 보관해둡니다. 말하자면 그곳에 있는 개인 캐비닛의 서랍에 넣어두는 것입니다. 물론 전용 노트를 만들어 거기에 써두는 것도 좋지만, 나는 그보다는 머릿속에 담아두는 쪽을 좋아합니다. 노트를 항상 들고 다니기도 번거롭고, 일단 문자로 적어두면 그걸로 안심하고 싹 잊어버리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머릿속에 다양한 것을 그대로 척척 넣어두면 사라질 것은 사라지고 남을 것은 남습니다. 나는 그런 기억의 자연도태를 선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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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뇌 내 캐비닛에 보관해둔 온갖 정리 안 된 디테일을 필요에 따라 소설 속에 그대로 조립해 넣으면, 거기에 나타난 스토리는 나 자신도 놀랄 만큼 내추럴하고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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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소설가인 나에게 그 뇌 내 캐비닛에 담긴 정보는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하기 어려운 풍성한 자산입니다.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양윤옥 옮김, 현대문학 (2016)
그러니까 평소 내 주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고 머릿속에 새겨 두었다가 창작에 활용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같은 일을 보고도 누군가는 흘려 지나칠 수 있고 누군가는 재해석해서 자신만의 결과물로 표현해낼 수 있겠죠. 그림도 어느 정도는 이런 면이 있습니다. 내가 보고 마주하는 장면들 또는 스토리를 어떻게 그림으로 풀어 옮길 것인가 고민해야 하죠.
그런데 저는 꽤 오랫동안 게을렀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과거에 찍어둔 사진 파일들이 제게는 '뇌 속 캐비닛' 역할을 대신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여행지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그림으로 옮겨내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지금 현실에서 소재를 찾으려는 노력의 감각은 무뎌져버린 것입니다. 어쩐지 현재는 부정하고 먼 곳만 좇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위 글을 읽으며 또 살짝 뜨끔했던 것은, 나중에 그림으로 그리면 좋겠다 싶은 장면을 만났을 때 내가 한 행동 때문입니다. 가볍게 휴대폰을 꺼내어 찰칵 찍고 지나쳤던 많은 순간들이요. 자료 수집, 기록용이라는 생각으로 사진을 찍어두고, 쉽게 지나치다보니 정말 그의 말대로 '그걸로 안심하고 싹 잊어버리는 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기록으로 남겼다는 안도감이 오히려 망각을 부추기는 것일까요. 카메라가 이렇게 발달되지 않은 시대에 살았다면 나는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사진과 사진 사이 기록되지 못 한 어느 시점이나 그 사잇길 위에서의 감정과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피에르 보나르(프랑스어: Pierre Bonnard, 1867년10월 3일~1947년1월 23일)는 프랑스의 화가이자 판화 제작자이다. 또한 그는 후기인상파 중 전위 화가 단체인 나비파의 창립자이다. 보나르는 그림을 참조로 하여 기억에서부터 작업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그의 그림은 종종 꿈 같은 느낌을 특징으로 한다.
출처: 피에르 보나르 - 위키백과
최근 알게된 한 화가에 대한 설명 일부입니다. 위 설명처럼 보나르는 현장에서 장면을 스케치하거나 색 메모를 남기고, 최종 그림을 그릴 때는 스케치를 참고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기억 속 색감·감정·분위기를 재구성해서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 대표작이 위 그림이고요. 과장된 빛과 색 표현들이 몽환적입니다. 어느 한 시점에 위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두고 그 사진을 토대로 그렸다면 위와 같은 그림이 그려질 수 있었을까요? 실제로 그의 작품들에는 한 장면 안에 여러 시점의 다양한 색과 빛들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좋은 소재를 만났을 때 휴대폰을 꺼내들기보다 먼저 눈으로, 마음으로 장면을 기억에 새기고, 필요하다면 조그만 노트에 스케치와 메모를 하고. 나중에 책상 앞에서 그 노트를 보며 기억을 되살려 그려보면 어떨까요. 보나르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문명의 발전을 누리지 않고 오히려 역행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나르는 '내게 매일 들고다닐 수 있는 가벼운 카메라가 있었다면.' 하며 이 시대를 부러워 할 수도?)
먼저 과거에 찍어둔 사진들에만 의존하지 않고 일상에서 마음이 동하는 장면들을 찾을 준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는 사진으로 기록되지 못한 장면과 감정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불완전한 기억 속 이미지를 완전한 한 폭의 그림으로 남기는 연습. 물론 쉽지 않겠지만, 사진 파일들과 더불어 더 다양한 소재 캐비닛을 만들어 가는 노력은 해볼만 한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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