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공기가 스치면 겨울이 왔다는 실감과 함께 오래전 여행 기억이 떠오른다. 이미 여러 번 그림 소재가 되어 주었던 겨울의 유럽 풍경을 올해도 몇 장 그렸다. 그저 사진으로 남아 있어도 좋은 풍경이지만 그림으로 하나하나 옮기고 나면 더욱 내게 의미있는 장면이 되는 것 같다.
여행을 떠나면 하루 하루를 소중히 쓰려 애썼다. 내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 안에 조금이라도 더 좋은 풍경을 많이 보고 많이 느끼고자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작은 골목들 구석구석 내 발자국을 남기고 시시각각 나타나는 낯선 풍경들에 셔터를 눌렀다. 나는 곧 이 공간에서 떠나야 하겠지만 내 기억 속에서라도 이 공간에 있던 나를 오래도록 붙잡고 싶었기에 필름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기록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내 유럽여행의 기억은 그때 남긴 사진들이 연결 고리가 되어 느슨하게나마 조각난 기억들을 꿰어주고 있는 것 같다. 작은 뒷골목과 흐린 겨울의 공기, 유명한 여행지에서 그저 일상을 살아가던 주민들의 뒷모습 같은 것들. 그때의 사진들을 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꺼내보며 그림으로 재탄생 시키고 있다니, 그 여행에 들어간 시간과 돈과 에너지가 전혀 아깝지 않을 만큼 뽀얀 사골국물 우리듯이 우려먹고 있는 것 같다. :)
유명 여행지의 시그니처 같은 건축물들, 꼭 봐야할 것들이라 가이드북에 나와있는 풍경들도 물론 기대 이상으로 멋졌지만 그보다 눈길을 끈 풍경들은 사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이 주말 오전을 여유롭게 보내는 모습, 골목의 작은 카페에서 차와 함께 신문을 보던 모습이라든지,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하는 모습, 또 트램을 타고 출근하는 모습, 아빠 손을 잡고 학교가는 아이 등등. 그들이 그저 일상을 살아가는 소소한 모습들이 내게는 낯선 공간이었기에 한 발짝 떨어져서 관찰자의 시점으로 바라볼 수 있었고, 괜히 특별하고 아름답게 보였던 것 같다. 그들은 너무나 익숙한 공간에서 매일 비슷한 일상을 살고 있었을 뿐인데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사는 일상의 모습도 낯선 누군가에겐 특별하고 아름답게 보일 수 있지 않을까?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내 옆의 아름다운 풍경들, 그리고 그 속의 소중한 일상. 늘 걷던 거리를 걸으며 이 순간, 이 장소에 처음 떨어진 낯선 누군가의 눈에 내가 있는 이 풍경이 어떻게 보일까 상상을 해보면 어떨까. 늘 똑같은 무료한 일상도 한 발짝 떨어져 관찰해보면 특별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 꽤 괜찮은 일상을 보내고 있구나 하고 이 글을 읽는 모두가 깨달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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