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바닥에는 신문지가 가득하고 벽에는 물감 자국이 묻어 있다. 작업실이 갖춰야 할 요건이 있나?
A. 누군가는 나의 작업실을 보고 창작의 카오스라 한다. 나는 이곳을 자유로운 해방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항상 물건을 잘 치우고 정리정돈을 잘하라고 교육 받았다. 누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것은 나의 개인적인 반항이다. 물감 자국이 두껍게 묻은 채 굳어진 신문지 뭉치와 페인트 병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무엇에도 방해 받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한 나의 작업실. 표현주의 회화나 콜라주처럼 보이지 않나. 이 정신없는 나의 스튜디오는 나의 기억 속 모든 표현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예술적 파라다이스가 분명하다. 이런 자유로움 때문일까, 내 그림은 유쾌하고 강렬하다.
나란 인간은 ‘정돈됨’과 ‘자유분방함’의 그 경계에서 언제나 갈팡질팡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화가 로즈 와일리의 작업실 사진과 그에 대한 인터뷰 답변을 읽다 말고 나 자신에 대한 인지를 했다.
나는 언제나 내가 있는 공간이 잘 정돈되어 있기를 바라고 대부분 그렇게 지낸다. 지저분하거나 너저분한 물건들이 늘어져 있는 걸 싫어한다. 내 나름의 질서에 따라 언제나 주변을 정돈한다. 그래야 마음이 안정된다.
근데 그림을 그릴 때는 너무 정돈되고 딱 떨어지는 반듯한 스타일을 별로 안 좋아한다. 아니 일부러 피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자로 잰 듯 정확한 직선과 매끈한 면보다는 울퉁불퉁하고 투박한, 조금은 혼란스러운 선과 면을 추구하고 그런 작품들을 볼 때 매력을 느낀다. 터치 하나 하나 숨을 참고 정성들여 그리기에는 내 성격이 급하고, 스케치 선 밖으로 채색이 튀어나가지 않도록 조심조심 그리는 행동들이 때로 답답하게 느껴진다. 온전히 자신의 느낌대로 과감하고 즉흥적인 멋진 예술가들을 흉내내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림 때문에 나는 줄곧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스타일이 편한 사람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과거의 경험들이나 내가 가진 옷들, 물건들, 평소 내 행동 그런 것들을 곱씹으며 내가 어떤 취향과 성향을 가진 인간인지 알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나란 사람에게 잘 맞는 그림 스타일을 알고 싶어한다. 작가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그가 그리는 그림과 착 들어 맞을 때 그림에 확실히 더 설득력이 실리는 것을 많이 봤기 때문에.
나는 정돈되고 반듯한 스타일일까, 자유롭고 반항적인 스타일일까. 사실 모든 인간이 한 가지 면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쪽으로 살짝 치우치는 것이지 두 가지 반대되는 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고민해왔다. 나는 어느 쪽으로 치우친 인간일까. 그걸 알아야 나에게 딱 맞는 그림 스타일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분명한 건 나는 로즈 와일리의 작업실에서는 그림을 못 그릴 것 같다는 것이다.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작품 같은 작업실과 어우러진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멋지지만 그건 로즈 와일리라서 가능한 것일 테고 나는 덕지덕지 쌓인 신문지를 밟고서는 어떤 그림도 그리고 싶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반면 내 그림은 어떤 틀 안에 갇히지 않고 이리 저리 훨훨 자유롭기를 바란다. 그녀의 작품처럼 자유롭게, 형태가 비뚤어지고 현실과 다른 독특한 색깔도 써보고도 싶다. 내 성향에 잘 안 맞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애매하게 갈팡질팡하는 걸 타고난 건가.
어떤 한 가지로 딱 정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나 보다. 사실 일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이렇든 저렇든 크게 고민할 부분은 아닌데 그림과 연관지어 생각하다보니 고민하는 것 같다. 줄곧 한 가지의 특별한 그림 스타일이 내게도 확고히 자리 잡혔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 왔기에 그렇다.
하루는 이런 고민에 답답한 마음을 적었더니 누군가 댓글을 달아주었다. 놀라울 정도로 전혀 다른 그림체로 다양한 스타일을 그리는 작가가 자신은 더 좋다고. 한 가지 스타일만 그리는 작가는 자신의 취향과 맞지 않으면 더이상 그 그림에 관심이 가지 않겠지만, 여러 그림체를 가진 작가라면 다음 번에 내 맘에 드는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할 수 있다고. 나는 그런 생각은 못 해봤었기에 신선한 시각이었다.
중간 어디 즈음 그 경계에 있는 것 같은 지금 상태도 나쁘지 않다. 이런 애매함 마저 내 고유함으로 굳혀 갈 수도 있겠지. 또는 앞으로 여러 경험과 그림 연습들을 통해 어느 한 쪽으로 한 발짝 더 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가 궁금하다. 설렌다.
구독자님은 어떤 쪽에 더 가까운 사람인가요, 혹은 저처럼 애매한 구석이 있으신가요? ;) 주말 마무리 잘 하시고 다음 레터에서 또 뵈어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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