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_ 뾰족 구두

어떤 한 시절에만 유효한 갈망에 대하여

2022.02.03 | 조회 5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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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계절들

에세이 같은 그림, 그림 같은 에세이.

 두 번째

 드라마나 영화에 보면 차려 입은 주인공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또각 또각’ 구두 굽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난다. 화면을 찍은 후에 그 소리가 더욱 부각되도록 따로 녹음을 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왠지 어릴 때부터 그 소리에 귀를 쫑긋했다. 영상 속 주인공의 걸어 가는 모습을 보는 동시에 신발과 바닥이 맞닿는 모습이 상상되곤 했다.

 어릴 적엔 나도 크면 꼭 ‘또각 또각’ 소리 나는 뾰족 구두를 신고 매끄럽게 잘 닦인 바닥을 경쾌하게 걸어야지 다짐 했더랬다. 주로 흙 바닥을 운동화나 고무 슬리퍼 등을 신고 자박자박 걷던 시골 아이였던 나는 티비에서 보는 도시 어른의 일상을 그려 보았다. 반짝 반짝 윤이 나는 대리석 바닥 같은 것. 또 넓은 사무실과 커다란 테이블, 정돈된 정장에 어울리는 뾰족 구두. 내가 한 발 내딛을 때마다 경쾌한 또각 또각 소리가 내 귀에 와 닿는 일상.

 엄마가 시내에 나갔다 오는 날이면 좀처럼 신발장 밖을 나오는 일이 없는 엄마의 구두가 현관문 앞에 나와 있었다. 내 발보다 두 배는 큰 구두 안에 발을 걸쳐 넣고 괜히 마당 이리저리 걸어 보기도 했다. 구두를 질질 끌다시피 엉거주춤 하며 또각 거리는 흉내라도 내보려 걷다가 이내 벗어 두었다. 언젠가 그런 모양 신발이 내 발에 맞는 날을 기약하며.

 어릴 땐 어른들 세계에서만 용인되는 그 어떤 것들이 갈망의 대상이 되곤 했다.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지금 당장은 가질 수 없는 그들만의 특권 같아 보였나 보다. 하지만 아예 평생 가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당연한 듯 가질 수 있다는 점이 왠지 더 안달나게 했던 것 같다.

 구두 말고도 더 있다. 칠판에 하얀 분필로 딱 딱 소리를 내며 판서하는 선생님도 부러웠다. 이만큼 굽이 높은 선생님의 실내화도 괜히 멋져 보였고 자신의 차를 운전해서 퇴근하는 선생님도 그랬다.

 어린이의 눈에 멋져 보이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조금 시시할 정도로 아무 것도 아니란 건 크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매일 신을 것 같던 굽이 높은 구두는 발이 아파서 좀처럼 신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를 갈망하던 아이의 마음은 이제 온데간데 없으니까. 그 시절의 갈망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사라지는 것이었나.

 


결혼생활 5년동안, 우리가 함께 지낸 시간은 그 절반쯤이었을 것이다. 그 절반의 절반 이상의 밤을 나나 그녀 가운데 하나 혹은 둘 다 밤을 새워 일하거나 공부해야 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서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 모든 기쁨과 쾌락을 일단 유보해 두고, 그것들은 나중에 더 크게 왕창 한꺼번에 누리기로 하고, 우리는 주말여행이나 영화구경이나 댄스파티나 쇼핑이나 피크닉을 극도로 절제했다. 그 즈음의 그녀가 간혹 내게 말했었다.

"당신은 마치 행복해질까봐 겁내는 사람 같아요."

그녀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다섯 살 때였나봐요. 어느 날 동네에서 놀고 있는데 피아노를 실은 트럭이 와서 우리집 앞에 서는 거예요. 난 지금도 그때의 흥분을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 아빠가 바로 그 시절을 놓치고 몇 년 뒤에 피아노 백 대를 사줬다고 해도 나한테 내게 그런 감격을 느끼게 만들지는 못했을 거예요"

서울의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내게 이런 편지를 보내시곤 했다.

"한길아, 어떤 때의 시련은 큰 그릇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시련이란 보통의 그릇을 찌그러뜨려 놓기가 일쑤란다"

애니웨이, 미국생활 5년만에 그녀는 변호사가 되었고 나는 신문사의 지사장이 되었다. 현재의 교포사회에서는 젊은 부부의 성공사례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방 하나짜리 셋집에서 벗어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3층짜리 새 집을 지어 이사한 한 달 뒤에, 그녀와 나는 결혼생활의 실패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혼에 성공했다. 그때그때의 작은 기쁨과 값싼 행복을 무시해버린 대가로.

[눈 뜨면 없어라] 김한길


 

 어떤 한 시절에만 유효한 갈망에 대하여 생각하다 위 글이 떠올랐다. 아주 오래 전에 우연히 본 글귀라 어렴풋한 기억만 있었다. 내겐 정치인으로 기억되는 ‘김한길’이 쓴 글이라는 것과 글의 중요한 키워드가 ‘피아노’였다는 단서만을 갖고 검색창에 ‘김한길 피아노’라고 쳤다. 그랬더니 정말 내가 찾던 위의 글이 나왔다. 작가가 20대 때 신문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엮은 책 속 구절이라고 한다.

 지금 이 시간, 나는 무엇을 갈망하고 있을까. 나중을 기약하며 지금 느껴야 할 행복을 미뤄두고 있나. 지금 내게 충족시켜 줘야 할, 그래서 오로지 지금 가장 기쁠 수 있는 것은 무얼까.  나중은 없어. 다음은 오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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