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얼마나 오랜만에 부치는 편지인지 모르겠네요. 다짐이 느슨해지던 순간이 떠올라 부끄럽습니다.
저는 지금 체코 프라하에 있습니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 이제 한국에 있지 않으니 오래된 낭만을 담아 보내는 건 더욱 머나먼 이야기겠거니 생각했습니다.
당신과 다른 시간에 살게 된 지는 3주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요. 모든 게 새로운 사람에겐 시간이 얼마나 더디게 흘러가는지 체감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빨리 늙고 싶지 않다면 안하던 일을 많이 하라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나는데요. 요즘은 아주 사소한 것 하나도 쉽지가 않아서 빨리 늙어도 좋으니 아이 덥다 하는 시간이 오기를, 단풍이 예쁘다 하는 시간이 오기를, 이번 겨울은 유독 추운 것 같다고 까만 밤 내내 중얼거리는 시간이 다가오기를 바라고 있어요. 사람은 간사하고 그중에도 유독 간사한 유형에 속하는 사람이 저니까, 가을쯤 되면 뭐했다고 가을이 되었다고 한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그래서 다시 첫 문단의 문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곳은 뜨문뜨문이나마 이어지던 제 낭만 궤도를 벗어나는 범위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흐지부지 끝이나겠구나 싶었는데요. 여기 온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사랑하는 이웃 모글리가 말했습니다. 이제 프라하에 갔으니 다시 장아찌를 쓰시는 거냐고요. 그 문자를 보고 두 가지 마음이 들었어요. 아직 누군가 이 장아찌를 기다리고 있다는 감사. 그리고 어쩌면 한국 역사와 비슷한 결을 지닌 체코에서 엇비슷한 궤도의 이야기들을 찾아낼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이요.
모글리의 질문에 따뜻한 부담을 느끼며 며칠을 보냈습니다. 그날 우연히 황금소로에 다녀온 직장상사와 대화를 하게 되었어요. 황금소로는 과거 체코 연금 술사들의 연구소가 있던 자리로 시간이 흘러 1916년 경, 프란츠 카프카가 소설을 집필 했던 작업실이 있어 관광명소가 된 곳인데요. 오늘 그곳에서 만난 관광객과 카프카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던 상사는 대뜸 제게 질문 하나를 던졌어요.
"국문과 나왔다고 했죠?
그럼 최초로 독일 유학왔던 한국인 여자 작가, 혹시 누군지 기억나요?"
아! 누구였더라, 분명히 아는데... 데미안 번역한 사람 아는데...
__린으로 끝나는 이름이었는데... 혜린이었던 거 같기도 하고 수린이었던 거 같기도 하고... 어떻게든 인터넷의 도움없이 맞추고 싶었지만 결국 '최초 동양인 유학생', '데미안 번역', '여자 작가' 같은 키워드의 나열로 이름을 찾아냈습니다.
때는 한국전쟁의 상흔이 회복 되지도 않았을 1955년, 독일인들은 콩고와 코리아도 구별하지 못하던 시절입니다. 오늘의 편지는 그 시절 독일 유학길에 올라 세계인의 명문장을 한국에 전해준 번역가이자 작가, 전혜린의 이야기입니다.
수학 0점이 서울대 법대에 들어갈 수 있던 사연
전혜린은 1934년 순천의 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였던 전봉덕은 총독부 관리였고 2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행정 양과에 합격한 수재였습니다. 아버지 덕분에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던 전혜린은 1946년 서울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니고 1952년 아버지의 바람에 걸맞게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녀의 어린시절을 훑다가 재밌는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서울대 법대 진학은 그 당시에도 대단한 타이틀이겠지만 집에 막대한 자본이 있고 학식이 높은 아버지도 계셨으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잖아요? 근데 전혜린이 서울대에 진학하는 과정에 이례적으로 사정위원회가 열렸대요. 사유는 다른 과목에서 압도적으로 높은 성적을 받은 전혜린이 수학에서 0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서울대 입학 원칙대로라면 특정 과목에서 과락일 경우 입학 자체가 불가했는데요. 전혜린의 다른 과목 성적이 높아도 너무 높았기 때문에 사정위원회까지 열어 신입생으로 구제했다고 합니다.
어렵게 법학과에 들어간 전혜린은 정작 본인 전공 수업보다 절친 주혜가 다니는 문리대학 문학수업에 열을 올려 도강을 했다고 합니다. 문학에 대한 관심이 자라날수록 명작가들이 활동하는 미지의 세계, 유럽에 대한 동경은 커져만 갔습니다. 결국 그녀는 21살이 되던 1955년에 중대한 결정을 내립니다. 독일 뮌헨에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한 거죠.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은 물론, 동양 내에서도 여성이 독일어권에 유학하는 일은 전무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땐 자유여행은 고사하고 외화를 송금할 때도 대통령의 승인이 필요했기 때문에 배움의 기회가 비교적 더 많았던 남학생들도 쉽게 유학을 갈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으니까요.
절대 평범해서는 안 돼
비범하게 독일행을 선택한 전혜린은 그 선택이 보여주듯 평범한 삶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풍경, 유려한 문장에 취해있기에 그녀가 처한 현실이 녹록치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풍요로운 지원은 오직 아버지가 원하는 길을 걸어가는 장녀에게만 유효했습니다. 문학을 하겠다며 머나먼 땅으로 떠난 전혜린은 금전적 지원이 없는 상황에 유학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독일어권 작가들의 문학을 번역하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순탄치 않았던 모양인지 그녀의 수필엔 일주일 간 물배를 채우며 궁핍하게 생활하던 날에 대한 소회가 적혀있는데요. '물만 먹어도 죽지 않더라. 머리를 나부끼며 혼자 걸어!' 라는 문장은 불안한 유학생활의 흔적입니다.
불안한 유학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시작했던 번역작업은 훗날 한국의 문학청년들에게 잠 못 드는 밤을 선사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프랑수아즈 사강 ⟪어떤 미소⟫, 루이제 린저 ⟪생의 한 가운데⟫, 하인리히 뵐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등 제목만 들어도 입이 떡 벌어지는 다양한 명작이 그녀를 통해 한국에 전해졌거든요.
흐르는 압록강에 해석이 필요했던 이유
전혜린이 번역한 작품들의 리스트를 살펴보다가 부연설명이 필요한 작가와 작품을 발견했습니다. 이미륵 작가의 ⟪압록강은 흐른다⟫. 작가 이름도 작품이름도, 한국에서도 특히 한국적인 이름이라 번역이 왜 필요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이미륵은 189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조선인입니다. 그는 1919년 3.1운동 참여를 시작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다가 일제에 쫓겨 상해로 망명했던 인물인데요.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봉근과 당시 포교를 목적으로 조선에 있던 독일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전혜린보다 35년 먼저 독일땅을 밟았습니다. 잃어버린 나라 안에선 나라를 구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이미륵은 조선에서 떨어진 독일 땅에서 조선을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떠나온 독일땅에서 고통 받는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데요. 잔혹하기 그지 없는 나치의 활동을 지켜본 이미륵은 반나치주의자들과 어울리며 나치를 비판했습니다. 당시, 이미륵은 자신과 같은 입장을 가진 뮌헨대 교수, 쿠르트 후버와 깊은 우정과 신념을 나누었다고 하는데요.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나치에 의해 잡혀간 후버 교수가 사형판결을 받고 단두대에서 처형되면서 남겨진 그의 가족을 돌보며 독일의 생활을 이어나가기도 했습니다.
후버가 떠나고 3년 뒤, 이미륵은 독일에서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소설⟪Der Yalu fließt(압록강은 흐른다)⟫를 발표했고 이 소설은 그해 독일어로 쓰인 가장 훌륭한 소설로 이름을 올리는 것은 물론, 독일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큰 호평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1950년, 이미륵은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뮌헨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전혜린이 독일에 왔을 당시, 이미 이미륵은 세상을 떠나고 없었죠. 그러나 남겨진 선배작가의 글을 전혜린이 한글 번역하면서 ⟪압록강을 흐른다⟫는 한국에 전해졌습니다.
세코날 마흔 알로 끝난 그녀의 마지막
평범을 절대적으로 거부한던 전혜린의 생에서 그 일반적인 나날을 귀하게 여기던 시절이 있다면 1956년 이름도 전형적인 독일 유학생 김철수와의 결혼생활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기혼 여성의 굴레가 작가로 살고 싶던 전혜린을 갈증나게 할 때도 있었지만 결혼 후 3년 뒤 얻은 소중한 딸 정화는 그녀로 하여금 엄마로 사는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존재이기도 했는데요.
정화가 태어난 1959년, 전혜린은 한국으로 돌아와 교단에 섭니다. 서울대학교를 포함한 명문대에서 강의 문의가 쇄도 했고 에세이 요청도 끊이질 않았습니다. 궁핍한 생활의 한줄기 빛이었던 번역작업은 명성을 얻은 이때까지도 계속 이어졌고요. 아내, 주부, 엄마, 교수, 작가, 번역가. 다양한 타이틀로 살던 순간도 잠시, 매 순간을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었던 전혜린은 1964년 김철수와 짧았던 결혼 생활을 마칩니다.
지금도 혜화동 한 켠을 지키고 선 학림다방에서 하루에 커피를 15잔까지 마셨다는 여자, 손톱이 새카매질 때가지 연거푸 줄담배를 피더라는 여자, 당시 아들 최불암 보다 유명했던 최불암 어머니의 대포집 '은성'에 앉아 막걸리를 앞에 두고 문학 얘기를 늘어놓던 그 여자, 수면제와 커피가 없으면 일상이 불가 하다더니... 천재들은 일찍 죽는다고 니체도 카프카도 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더니...전 남편 김철수의 불안한 짐작대로 서른한 살의 나이에 세코닐 마흔 알을 삼키고 세상을 떠납니다. 죽음의 순간 마저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낸 그녀의 짧은 생은 그 자체로 박제되었습니다. 전혜린의 남편이었던 김철수는 시간이 지나 두번째 결혼을 하였는데 그의 두번째 부인이 매년 전혜린의 기일을 챙겼다는 이야기는 그녀를 둘러싼 풍경에 운치를 불어 넣었고요.
전혜린의 묘비에 글을 써준 또 다른 여성
자료를 찾던 중, 전혜린 묘비에 누군가 적어둔 글을 보고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하늘이 주신 시간에 시간을 보태고 사랑에 또 사랑을 보탠 다음 눈 감아 여기 잠든이. 이미 써야 할 시간과 사랑을 외로움을 헤매며 소진해 버린 탓에 그렇게 가버렸을까요. 외로움 속에 더해온 시간과 사랑 때문에 청년들은 불안한 문턱에서 전혜린을 찾았는지도 모릅니다.
짧게나마 전혜린 작가의 삶을 들여다 보며 그녀가 번역한 소설보다 그녀가 남긴 수필집에 마음이 쓰였습니다. 어쩌면 그녀의 일기는 60년도 더 전에 불안과 외로움 속을 헤매던 사람이 묻어둔 타임캡슐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들어 불안은 비염 걸린 사람이 봄꽃 사이를 걷는 상태를 닮았다고 생각해요. 욱씬 거리는 상태로 쭉 함께하는 게 아니라 간헐적으로 자꾸 튀어 나오거든요.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라고 하기엔 좀 많-이 엎어져야 하지만 이 근방 어디에서 외로움을 삼키던 전혜린의 문장으로 체코의 봄날을 지나보려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은 전혜린의 문장으로 끝낼 거냐고요? 전혜린 작가님껜 죄송하지만 아닙니다. 그녀에게 마지막 글을 남긴 김남조 시인의 시로 늦어버린 오늘의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편지
김남조
그대 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 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 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을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추신 : 이 서툰 한 구절을 써내면 한 구절을 읽어주는 여러분 덕분에 전 이렇게 또 한번 편지를 부칩니다.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사랑으로 모두 다 이겨내세요! 아직 이 문장에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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