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여기서 호강해요”
조금 일찍 출근한 아침, 정원상담실에서 미화 선생님이 테이블 위 가득 놓인 식물 사진을 찍고 계셨다. 평소 말수가 적은 60대 남성분이라 대화할 기회가 없었는데, 근무한 지 일곱 달이 지나서야 말을 트게 됐다.
“식물 좋아하시나봐요!”
“네. 엄청 좋아해요. 근데 마누라는 싫어해요.”
“선생님도 식물 많으신가봐요. 좋아하면 하나만 키울 수 없잖아요.”
“맞아요. 베란다에서 이것저것 많이 키우고 있어요.”
“아주 근사하겠어요.”

그동안 조용히 목례만 하던 사이였는데, 행사 식물로 가득 찬 테이블 앞에서 한층 가까워졌다. 수목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모두 식물을 좋아할 것 같지만 수목원 안에도 식물과 관련 없는 다양한 업무가 존재하고, 집이 가까워서, 발령이 나서, 조직 통폐합 등의 이유로도 근무하기에 모두가 식물 생활자는 아니다. 수목원에서 사랑스러운 눈으로 식물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대개 방문객이다. 게다가 예쁜 것도 자주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니까.
그런 상황에서 출근길 마주한 중년 남성의 꽃사랑은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하기 충분했다. 지난해도 수목원에서 근무했지만, 올해는 수목원 해설과 식물상담을 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식물 애호가와의 만남도 잦아졌다.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라 처음 보는 이에게 말을 거는 것이 어려운 나였지만 주어진 업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먼저 질문을 하고 인사했다. 그 때 가장 좋은 주제는 식물이었다.
수목원에, 상담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조금만 살피면 무엇에 관심을 보이는지 알 수 있었다. 시선이 꽂힌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슬쩍 흘리면 굳어 있던 표정도 곧 해제되면서 반갑게 대화를 받아줬다. ‘아.. 나도 드디어 스몰토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건가?’ 이것은 착각이었다. 식물 한정 이야기에서만 낯선 사람과 친숙하게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식물로 시작된 이야기는 내가 모르던 세계로 연결해줬다. 일본에서 멸종위기종인 해오라비난초를 지역 대표식물로 지정해 농장에서 대량 식재해 보호 중이라며, 당시 사진을 자랑하던 풀피리 강사님, 세계정원박람회에서 해설을 한다며 내년에는 함께 해보자고 제안해주신 자원봉사자분도 만나 덕분에 가보고 싶은 곳도 해보고 싶은 일도 생겼다. 한번은 정형외과에 치료를 받으러 갔다가 나의 척추 상태를 보고 의사는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다. 수목원에서 해설을 한다고 하니, 진료가 길어졌다. 본인도 은퇴 후에 해설가를 해보고 싶다고 말이다. 은연 중에 누군가의 노후 계획도 알게 되었다.
과거 회사원 시절에는 ‘맡은 일을 해내자’며 하루하루 미션 클리어 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이제는 ‘진짜 내 일이 뭘까?’ 질문을 품고 일을 하다보니 주변이 궁금해지고 낯선 이와의 대화도 과거보다 적극적으로 변했다. 결국은 움직여야 무엇이라도 더 듣고 하나 더 알게 되며, 어쩌면 새로운 기회도 다가오는 것이니 말이다.
지난 10월 31일을 끝으로 올해 수목원에서의 계약기간이 종료됐다. 이제 무얼 할거냐는 질문을 듣곤 한다. 결정된 것은 없다. 허나 올해 8개월 동안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호기심이 생겼다. 구미가 당기는 일들. 그 호기심을 좇아 또 부유하다보면 어딘가 잠시 혹은 꽤나 길게 정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번 주 일류여성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만족스럽거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자유롭게 남겨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이 더 깊고 나아진 일류여성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
aegipinguim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 동안 수목원 속 다양한 이야기 들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수목원 다음의 정착지와 그 곳에서의 이야기도 기대됩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