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빨강머리 앤의 등장 인물 중 오늘은 린드 아주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처음 앤이 초록 지붕 집에 왔을 때, 린드 아주머니는 앤의 외모를 보고 꽤 무례한 말을 합니다. 빨간 머리에 주근깨가 있는 앤을 보며 외모에 대해 이것저것 지적하고, 앤이 자신의 말에 반발하자 오히려 당황하기도 하죠.
앤에게는 그 말이 얼마나 상처였을까요. 이미 부모를 잃고 여러 집을 거쳐 온 아이에게, 자신의 외모가 또다시 평가받는 일이었으니까요. 앤은 린드 아주머니의 말을 그냥 넘기지 않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그리고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얼마나 싫은지 아주 솔직하게 표현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장면을 다시 읽으면서 린드 아주머니가 단순히 앤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례한 말이 괜찮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린드 아주머니는 자신이 알고 있는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앤은 그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아이도 아니었고, 외모 역시 린드 아주머니가 생각하는 예쁜 소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죠. 무엇보다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들었을 때 가만히 참는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린드 아주머니에게 앤은 참 다루기 어려운 아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앤은 조금씩 성장합니다. 마릴라와 매튜의 사랑을 받으며 초록 지붕 집에서 살아가고, 공부를 하고, 친구를 사귀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갑니다. 처음에는 그저 말 많고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였지만 어느새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으로 성장하죠.
린드 아주머니 역시 그런 앤의 모습을 보며 함께 기뻐합니다. 특히 퀸 학원에 1등으로 합격했을 땐 매튜와 마릴라보다 먼저 앤의 소식을 마을 사람들에게 자랑하러 뛰어가죠. 저는 이 부분이 참 좋았습니다. 처음에는 앤의 외모를 지적했던 사람이, 시간이 흐른 뒤에는 앤이 얼마나 훌륭한 아이로 성장했는지를 인정하게 된다는 점이요.
물론 린드 아주머니가 앤의 모든 선택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앤을 자신의 기준으로 바라보죠. 앤이 퀸 학원에 가서 교사가 되고, 나중에는 대학까지 진학하려고 하자 린드 아주머니는 여전히 여자 아이가 그렇게까지 공부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을 피력합니다. 심지어 여자는 라틴어를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대화가 나올 지경이에요.
저는 이 대목에 저만의 해석을 덧붙이게 되었습니다. 린드 아주머니는 앤이 잘되기를 바라면서도, 앤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가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어쩌면 린드 아주머니는 묘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앤은 고아였습니다. 마릴라와 매튜가 아니었다면, 초록 지붕 집에서 사랑받으며 성장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앤이 공부를 잘하고,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냥 박수칠 수는 없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린드 아주머니에게도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앤은 자신이 직접 키운 아이가 아니면서도, 어느새 자신이 자랑스러워하는 아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앤이 자라는 데 딱히 자신의 지분은 없지요. 그저 친분이 있을뿐. 어쩌면 그 관계 안에서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앤이 잘 성장하는 모습이 뿌듯하면서도, 고아 출신인 앤이 자신의 아이들보다 더 잘되는 모습을 보며 무의식적인 반감 같은 것이 생겼던 것은 아닐까요. 자신이 오랫동안 믿어 온 방식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앤을 보면서,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편한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고요..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 작가 몽고메리가 린드 아주머니를 그런 인물로 그리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제가 너무 복잡하게 읽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죠.
그럼에도 저는 린드 아주머니가 앤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런 인간적인 감정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선택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잘되기를 바라면서도, 그 사람이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불편하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상대가 나보다 더 잘되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하면서도,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조금 쓸쓸해질 수도 있겠죠. 린드 아주머니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린드 아주머니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린드 아주머니는 마릴라와 함께 초록 지붕 집에서 살게 됩니다. 린드 아주머니가 자신의 집을 처분하고 초록지붕 집에 세를 내며 살기로 하거든요. 묘한 관계의 역전? 같이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작품에서 앤과 마릴라가 린드 아주머니를 그렇게 역전된 관계로 보지는 않지만요. 오히려 이제 앤은 린드 아주머니에게 단순히 이웃집 아이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 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 선생님으로 지내다가 길버트와 결혼한 뒤에도 앤의 삶에는 또다른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앤이 길버트와의 사이에서 첫 아이를 가졌지만 결국 사산하거든요. 앤도 사경을 헤매고요. (작품에 영아 사망이 많이 나오는데 그건 아마 시대상의 반영 같아요.) 이때 마릴라와 린드 아주머니는 앤의 신혼집을 찾아와 앤을 간호하는 데 온 마음을 쏟습니다.
앤은 어린 시절 부모를 잃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이 어떤 것인지 이미 알고 있는 아이였죠. 그런데 어른이 되어 자신이 낳은 아이를 잃게 됩니다. 그 슬픔은 앤이 상상했던 어떤 어려움보다도 큰 것이었을 것입니다. 린드 아주머니는 앤의 몸도 돌보지만 황폐해진 앤의 마음도 잘 다독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는 린드 아주머니가 이 작품에서 생각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릴 때는 린드 아주머니가 그저 앤에게 잔소리를 하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읽어 보니 린드 아주머니도 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또 함께 성장한 것이 아닌가 했거든요. 저는 린드 아주머니의 캐릭터에서 이 변화하는 다양한 면모가 참 좋았습니다. 우리는 종종 사람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 나쁜 사람이고, 누군가를 도와주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단순하게 나누기 어려운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례한 말을 할 수 있고,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그 사람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상대를 걱정하다가 오히려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좋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언제나 상대방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만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함께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일 수도 있겠죠. 기왕이면 그에게 내 도움이 필요할 때 기꺼이 손을 보태면서요. 린드 아주머니는 그런 어른이었습니다.
사실 한 사람의 삶에서 때로 성취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태도인 것 같습니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어려운 일을 겪을 때 기꺼이 곁에 있어 주었는가.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다른 사람의 삶을 응원하려고 노력했는가 같은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거죠.
어쩌면 저는 영원히 좋은 어른이 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에게 알게모르게 무례했을 수 있고 제게 상처받은 사람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필요할 때 도우려고 노력하는 것이겠지요.
저는 요즘 제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하기 싫은 것도 조금은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제가 주변의 호의를 많이 누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이 글을 읽고 계시는 구독자님께도 제 어떤 노력이 어떻게든 닿게 되는 순간이 있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아! 오늘의 추천곡이 있어요. AI로 작업했다고 해서 설왕설래가 있는 곡이지만 작사만큼은 사람이 직접 했다고 하는데요. 가사가 참 생각을 많이 해보게 하더라고요. 구독자님께도 어떤 영감이 되길 바랍니다.
머무르 <꿈꾸는 어른이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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