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자

04. 당신이 했던 말이 누군가의 일에 내도록 따라다니기도 합니다

구독자 님 반가워요. '일류여성'의 네 번째 편지를 맡은 '은둔자'입니다. 이름처럼 밖으로 나서는 것을 좀 두려워하는 편인데요. 처음이라 그런지 이상하게 글이 매우 길어졌네요. 부디 너무 지루하지 않은 이야기이길 바랍니다.

2023.05.26 | 조회 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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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여성

세 여자가 전하는 '일'에 관한 모든 이야기

겁먹지 말고, 우리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니까 동등한 관계라고 생각해. 내용이야 저자들이 전문가인 게 맞지만 우리도 책의 꼴을 만든다는 면에서 전문가야. 연차 어리다고 걱정하지 마. 우리는 팀으로 일하고 있어. 누가 뭐라고 하거든 내가 확인했다고 해.”

내가 다닌 첫 출판사에서 사수이자 팀장이었던, 지금 생각해보면 유니콘에 가까웠던 선배가 사내 교육 중에 했던 말이다. 주로 학술서를 만들었던 당시 회사의 특성상 출강 중인 저자가 많았고 이제 햇병아리 편집자였던 나는 그들이 가르칠법한 학생들 정도의 나이였다. 그게 이유는 아니었겠지만 일하면서 무리한 요구를 듣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고 시간을 벌고자 팀장님께 확인 후 다시 연락을 드린다고 했었다. 비슷한 일이 몇 번 반복된 뒤에 듣게 된 교육에서 선배가 콕 짚어서 한 말이었는데 그게 뭐라고 위로가 됐다. 나도 전문가라는 그 말이.

이후로 오랫동안 그 문장을 붙잡고 걸었다. 흐려질 것 같으면 먼지를 털고, 닦으면서. 사실 당시의 나는 당연히 결코 전문가가 아니었다. 이제는 당시 선배의 경력을 넘어설 만큼 오래도록 일했지만 여전히 내가 전문가인지는 딱히 잘 모르겠다. 매번 진행하는 책마다 왜 그토록 다른지. 세상에 같은 책은 한 권도 없다는 말이 딱 맞았다. 게다가 주력 분야를 옮기며 책을 만들게 되면서 여전히 저자를 대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 됐다.

그뿐일까. 후배를 대하기는 더욱 어렵다. 내 일에 치인다는 핑계로, 긴장한 걸음을 조심히 떼고 있는 후배에게 썩 든든한 선배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고 나니 이제야 깨닫는 것이다. 나는 나 역시 전문가라는 말을 붙잡고 걸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뒤에 누가 뭐라고 하거든 내가 확인했다고 해라는 말에 기대어 지금까지 온 것이라는 것을.

선배는 그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 말의 무게를 결코 모르지 않았을 텐데. 길을 잃고 겁먹은 후배를 위해 기꺼이 책임을 나누어 가져가겠다는 마음을 어떻게 그토록 확고하게 전해줄 수 있었을까?

선배의 그 마음이 지금까지의 나를 키웠다. 정말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이 맞나,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밥벌이 삼느라 이리 고된가 종종 지구의 내핵까지 땅을 파다가도 문득 생각하는 것이다. 선배가 나를 이 일의 전문가라고 부른 순간부터 나는 어떤 책임과 의무 그리고 동시에 실제 그 일에 대한 역할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누군가 합리화라고 하면 할 말은 없겠지만 그것이 동기가 될 수 있다면 아무렴 어떤가?

사실 편집일이라는 것은 그림자 노동으로 불릴 만큼, 세상의 주목을 받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실수하면 곧장 사고로 이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티가 나지 않지만, 하지 않으면 너무 잘 보이는 집안일 같달까. 그것이 사람을 지치게 하기도 하고, 종종 일하는 자아의 자존감을 갉아먹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일에서 보람을 찾아내며 지금까지 일하고 있는 것은 나의 첫 사수가 이 일에 대한 첫인상을 잘 만들어 주었기 때문일 거다. 선배의 다정함이 나를 살아남게 한 셈이다.

그래서 종종 생각했다. 혹시나 내가 내 일에 대한 글을 쓸 일이 생기면 첫 번째로 선배의 이야기를 하겠다고. 사실 지금은 연락이 끊어졌고 각자의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당신이 했던 말 한 마디가 누군가를 10년이 넘는 경력의 편집자로 만들었다고, 당신이 누군가의 삶에서는 그토록 중요한 존재라고 멀리서나마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 글이 바로 그 첫 번째 글이다. 세상에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에 주저함이 많았던 나에게 이 글은 일의 시작만큼이나 떨리고 긴장되는 사건이다. 그래서 또 주문처럼 선배의 목소리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네가 괜찮은 직업인이라는 사실을 내가 보증한다는 선배의 지지가.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앞으로도 나의 일과 함께 계속 나아가 보려고 한다.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기대와 지지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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