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의 힘을 믿고 해봤던 일만 하지 말고 안 해본 일까지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내보고 싶다. 그래서 지원하게 된 지금의 나의 일. 수목원에서 식물이력관리와 홍보 업무를 하게 됐다. 대외적으로 공식적으로는 이 업무를 한다고 하지만, 사실 나는 식물들 물을 주고 묵은 잎은 속아내고, 정원에 식물을 심고, 잡초도 뽑는 일들도 자주한다. 다음주에는 모내기도 할 예정이다. (다음주에는 수목원에서 모내기가 있는데요, 난생 처음 모내기라 기대도 되지만 긴장도 됩니다 ㅎㅎ) 십여 년 동안 사무실에 앉아서 해왔던 업무와는 사뭇 다른 일들이다.
요즘 나는 소위 말하는 몸 쓰는 일을 한다. 학창시절 체육수업을 수학시간보다 싫어했고, 회사 다닐 땐 출퇴근길 걷는 것이 운동의 전부였던 내가 이제는 하루에 만오천보 넘게 걷는다. 과거의 나는 상상도 못했던 일을 당분간의 업으로 삼게 되면서 일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도 확인하게 됐다. 몸 쓰는 사람과 머리 쓰는 사람은 다르고 생각했다. 은연 중에 몸 쓰는 일을 하찮은 일쯤으로 여겼다. 많이 모자랐다.
편협한 내 생각에 변명을 굳이 더하자면, 임금 체계를 봐도 그렇고 공공연한 사회적 인식?도 그러하니까. 홍보팀에 근무하던 시절 같은 건물에서 일하시던 미화 업무를 하시는 분들이나 경비 업무를 하시는 분들께 인사를 건네기는 했지만, 풍경에 불과했던 중요치 않았던 인물들이었다. 사람의 존재로 보다는 직접하기 불편한 업무들을 대신 해결주는 어쩌면 도구화 된 인물로 바라본 것 같다.
하찮게 여기던 일들을 내가 하게 되면서 이제서야 좀 정신이 차려진달까, 아니면 내가 속한 위치에 대한 구차한 변명이랄까. 생각은 바뀌었다. 몸을 쓰는 일은 정직하다. 조금만 대충하거나 늑장을 부리면 금세 표가 난다. 건물이 더러워지고, 낯선 이의 출입이 잦아진다든가 말이다. 과거 내 경험으로는 사무실에 앉아 있다 보면 바쁜 날도 있지만, 인터넷 쇼핑을 한다든가 기사를 검색하는 월급 루팡을 하는 시간이 생기기 마련이었다.(물론 이런 경험이 없는 직장인이시라면, 정말 존경합니다.) 그에 반해 몸을 쓰는 일은 근로 시간과 쉬는 시간으로 구분돼 오히려 깔끔한 느낌마저 든다.
일의 종류가 다를 뿐이지, 각자가 필요한 영역에서 제 몫을 하고 있는 것인데. 과거의 나는 그저 임금체계로 일의 경중을 따지며 오만하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초를 뽑다가, 식물 쓰레기를 치우다가 ‘내가 이러려고 공부했나?’라는 현타가 오기 것도 사실이다. (공부도 많이 안했으면서ㅎㅎ). 여튼 수시로 낮아진 신분?을 체감하는 기분을 수목원에서 일을 하면서 한달 정도는 느꼈던 것 같다.
지난달 독서모임에서 한승태 작가의 <어떤 동사의 멸종>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한 분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그 일을 할 리가 없다고 본인과 분리해서 생각하는 데서부터 일에 대한 차별이 생기는 것 같다”는 말이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골자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생각에서 육체 노동에 대한 편견이 생긴다는 이야기였다. 과거의 내가 정확하게 그랬다. 그런데 막상 겪고 보니 일의 모양새는 다르더라도 결국 같다.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는 것.
‘일’ 자체를 너무 크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자아실현의 도구라고 하고 있는 일 자체가 혹은 직업이 ‘나’의 대부분이라 생각했는지도. 일은 우선 생계 수단인 것인데. 거기에 재미가 있다면 좋은 것이고. 아니더라도 나의 일상을 책임져줄 월급이 나오는 것이니까. 일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해서 다음 일을 선택하는데 주저함이 컸는지 모르겠다. 사실 무엇이 되게 하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인데 말이다.
더구나 어떤 일에서도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는 멋진 사람이 존재한다. 한 양대창 집에서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움직임으로 숯불에서 양대창을 구워내는 이모님을 만났다. 흘러나오는 기름에 어쩔 수 없이 가장자리는 검게 그을려 버리기 십상인 양대창을 정확한 타이밍에 뒤집고 양념 묻히기를 반복해, 타서 도려내는 부분을 최소화했다. 모든 움직임은 계산되어 있었고, 그 결과값으로 알맞은 익은 양대창이 앞에 놓여 졌다. 숯불향과 양념이 고루 베인 잊지 못할 양대창을 그날 만날 수 있었다. 그 분은 이모님이 아니라 진정한 장인이었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일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어느 덧 수목원에 출근한지 삼개월째,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경쾌하게 수목원으로 향한다. 오늘의 걸음수와 옷에 베인 땀이 내가 얼만큼 일했는지를 보여주는 성실하고 깔끔한 지표니까. 무엇보다 얻고 싶었던 나무와 풀들의 지식도 조금은 늘어가고 있으니까. 길가의 지나가는 나무의 수피나 잎을 보고 이 나무는 무슨 나무겠구나, 혹은 00과의 식물이겠구나를 짐작하고 맞춰가는 재미가 있다. 발로 만들어 가는 지금의 시간들이 미래의 거름이 되길 바라며. 당장 내일은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는 하루하루지만 배우는 것이 더 많은 요즘의 일상은 꽤나 만족스럽다.
[코너 속의 코너] 계절산보🚶 달큰한 초여름의 향
📢[캠페인] 선배 시간 괜찮아요?
- 경험을 나눠줄 선배님의 인터뷰를 기다립니다-
이것은 마치 퇴사를 결심한 후배가 꺼내는 클리셰 같은 문장. 후배를 둔 직장인이라면 뜨끔할 이 문장을 구독자 여러분께 던집니다. 어느덧 사회생활 10년이 훌쩍 넘은 경력자들이지만 여전히 머릿속에 물음표를 달고 때론 답답한 마음에 풀리지 않는 분노를 삭혀가며 고군분투 중인데요, 이런 저희에게 본인의 경험담과 생각을 들려주실 귀한 선배님을 찾습니다.
조직생활과 독립에 대한 진솔한 조언부터 육아와 업무를 병행하는 워킹맘의 실전 팁, 커리어 전환의 경험까지 저희에게 들려주실 수 있는 분을 찾습니다. 딱 30분! 커피 한잔의 인터뷰 시간을 허락해주신다면 맛있는 커피 한잔 대접하면서 귀한 이야기들을 잘 담고 싶습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인터뷰한다면 좋겠지만, zoom, 구글미트를 활용한 온라인 미팅, 서면으로 답변해주시는 것도 모두모두 환영입니다! 선배님의 소중한 경험담을 공유할 모든 통로를 활짝 열어놓을 테니 부담 없이 연락주세요! 함께 나눈 이야기는 세 에디터가 잘 갈무리해서 레터를 통해 구독자님들께 생생히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또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내 주변에 이 사람이 생각났다!’ 하는 분이 있다면 자유롭게 추천을 부탁드립니다. 평생해야 할 일이라면 내 일을 좀 더 사랑할 수 있게, 또 본인의 일을 즐기는 사람이 더 많아질 수 있게 함께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회신 기다릴게요~!
smallbigsisters@gmail.com로 편하게 메일 주세요!!
✅이번 주 일류여성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만족스럽거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자유롭게 남겨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이 더 깊고 나아진 일류여성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