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도시 기행은 어떻게 보면 반 이상이 미술관 기행이기도 하다. 살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림과 조각과 건축들을 끊임없이 감상하게 된다. 피렌체는 우리가 아는 미켈란젤로와 다빈치 외에도 기라성 같은 르네상스의 화가들이 자신의 예술작품을 꽃피운 도시이니만큼 미술관은 꼭 가야 하는 명소 중 하나다. 우리 가족은 두 곳의 세계적인 미술관- 우피치 미술관과 아카데미아 미술관-을 방문했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막판에야 관람 예약을 하려다 실패하여 그냥 무턱대고 줄을 서봤는데, 하릴없이 귀중한 몇 시간을 낭비해야 했다. IT 강국인 한국의 국민으로 참 부끄러운 일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어마어마한 예술품들을 만났다. 정말 교과서에서 볼 수 있었던 르네상스의 그림들이 눈앞에 지나갔다. 예술학도인 딸이 대략적으로 설명은 해 주었지만 본인도 감상하기 바빠서 대부분은 “우와~!” “오오~” 이런 말을 하며 그림 앞으로 서둘러 갔기 때문에 제대로 된 안내는 받지 못했다.
이렇게 수많은 작품들을 접할 때는 하나의 주제를 잡고 감상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다행히 중세와 르네상스의 작품의 주요 소재는 친숙한 성경의 이야기들이다. 나는 특별히 ‘수태고지’라는 주제를 골랐다.(그저 내 맘대로 고른 것이다)
성경의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유대의 한 마을에 마리아라는 소녀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난다. 천사가 마리아를 축복하며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말하자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제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반문한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임신을 예고한, 즉 수태를 고지한 이 장면은 많은 화가들의 상상력과 표현력을 극대화하는 소재였다. 마리아는 팔레스타인의 유대 소녀였을 테지만 화가들은 당대 가장 이상적인 여인으로 표현했고 수태고지에서 가장 이상적인 여인과 천사를 함께 표현할 수 있기에 인기가 있었다. 르네상스에 들어 수태고지는 화가의 개성에 따라 다양한 변주를 해 왔다.
중세 제단화의 일부인 이 그림은 어디서 봤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우피치의 중세 미술실이었을 것이다. 많은 중세의 그림들이 그렇듯 배경은 금색으로 칠해져 있는데(추상 배경) 화가에게 배경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두 그림 중 한 쪽은 예수님의 승천을, 다른 한 쪽을 수태고지를 그려서 예수님의 생애의 처음과 끝을 표현한 듯하다. 마리아는 무릎 위에 있는 성경에 손을 얹고 앉아있고 천사는 무릎을 꿇고 예언을 위해 손을 들고 있다. 천사도 마리아도 표정이 거의 없어 엄숙하게 보인다. 또한 중세의 작품은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하늘의 다른 천사로부터 한 줄기 햇살에 성령을 뜻하는 비둘기가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중세를 넘어 르네상스에 들어서면서 점차 리얼리즘이 구현되기 시작하고 수태고지도 다양한 변화를 맞는다 이 그림은 엄청나게 큰 벽화다. 구체적인 배경이 표현되기 시작하고 머리 위의 후광은 자취를 감춘다. 밖으로는 그 당시 이탈리아의 자연 풍광이 드러나 있다. 점차 인물의 표정도 드러나기 시작한다. 두 눈을 차마 뜨지 못하는 마리아를 통해 두려움과 순종을 함께 표현하고 있다.
보티첼리는 이렇게 극적으로 수태고지를 표현하기도 했다. 화려한 곡선으로 물결치는 듯한 선의 흐름을 사용한 이 작품은 수태고지가 고요하게만 표현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천사는 막 도착한 듯이 극적이고 마리아는 몸을 뒤틀고 손을 내밀어 놀라움을 표현한다. 뒷편으로 보이는 사이프러스 나무는 이곳이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이탈리아임을 보여준다.
화가 이름보다 작품이 먼저 들어왔다.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의 많은 화가들이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다고 하는데 네덜란드 출신의 마티아스 스토머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배경은 어둠에 묻혀있고 촛불에 깜짝 놀라 손을 가슴에 올린 채 눈이 커져 있는 마리아를 비추고 있다. 천사는 날개도 어떤 장식도 없지만 결연하고 단호하다. 수태고지라는 제목이 붙어있지만 이 그림은 자신의 사명을 깨달은 혹은 예기치 않은 말을 들은 한 젊은 여인의 모습으로도 읽힌다.
친정에 갔더니 벽에 수태고지임이 분명한 달력 그림이 걸려있었다. 영국 화가인 조지 로렌스 블레이드의 작품이다. 갈라진 벽과 흙바닥이 배경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마리아와 고개를 숙인 천사의 모습은 숭고해 보인다. 예기치 않은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로서 수태고지는 여전히 지금까지도 인기있는 주제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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