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으로부터 10여 년도 훨씬 더 되었을 때였던 것 같다. 한겨레신문에서 홍승우 작가의 <비빔툰>이라는 만화가 연재된 때가 있었다. 아마도 기억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정보통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정보통’이라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평범한 샐러리맨의 일상을 그린 만화였는데, 정보통이 결혼을 해서 가족 이야기가 중심이 될 무렵, 만화의 이름이 <비빔툰>으로 바뀌었다. <비빔툰>에는 부인 ‘생활미’와 두 아이가 등장한다. 내 기억에 아이들의 이름은 ‘정다운’ ‘정겨운’이었다. 정말 정답고, 정겨워서 이 이름을 기억한다. 평범한 가정의 모습을 리얼하고 재미있게 그려내서 제법 인기가 있었다.
그때 봤던 <비빔툰> 중에 하나가 나에게 큰 울림으로 온 적이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겠지만, 일상적이고 무심한 것들이 나에게 와서 특별한 것이 되게 하는 가장 큰 요소는 바로 ‘타이밍’이다.
그때의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딸을 둔 엄마였다. 전문직을 갖고 있다가 출산과 육아, 부모의 병간호 마저 겹치게 되자 ‘경력단절’ 여성이 되었다. 돌봄을 받을 사람이 생을 마감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시민사회 단체라는 직장에서 다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학부모 역할과 직장 생활, 가정 생활을 함께 꾸려가야 했던 나는 하루하루 떠밀려 오는 날들을 받아내기에 급급했다. 절도 있는 삶을 꾸려가지 못한 개인 성향 탓도 있겠지만, 아무리 체계적인 인생의 수행자라 해도 저학년 학부모 역할과 저녁이나 주말에도 행사가 있는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 그리고 주부의 역할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은 너무 버거운 시간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냥 무심코 훑어봤던 신문 한 켠. 숨 막히는 깨알 활자보다 그림으로 잠시나마 감각을 돋우게 하는 몇 컷 만화에 눈이 먼저 갔는데, 만화를 보고 너무 공감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오래된 기억이라 디테일한 것들은 상상력에 기초하여 재구성 해본다.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주부인 ‘생활미’ (비빔툰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름). 식구들 아침을 챙겨 먹이고 두 아이를 학교에, 어린이집에 보내는 전쟁 통을 치르고 겨우 한숨 돌리고 집안을 살펴본 순간, 눈에 들어온 풍경. 식기가 가득 쌓인 싱크대, 먹다 남은 음식과 접시가 남아있는 식탁, TV가 켜진 채 어질러져 있는 거실, 이불과 옷가지가 널브러진 침대, 그리고 빨아야 할 옷들로 산더미인 세탁물통... 어디를 둘러봐도 내 맘 한자리 쉴 곳이 없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생활미는 부랴부랴 속도를 내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치워야 효과적일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며, 청소와 정리를 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때 그날 만화 속 ‘활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난장판이 되어 있는 집안 한가운데서 활미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고는 여유 있는 걸음으로 설거지가 쌓여 있는 부엌으로 가서는, 찬장 위 곱게 모셔 두었던 예쁜 커피 잔에 정성스레 커피를 타서, 마룻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옷을 발로 밀어붙이고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한 잔 마시는 것이었다.
그동안 수도 없이 많은 <비빔툰>을 봐왔지만, 이날 본 것은 가장 기억에 남았다. 난 이때의 ‘활미’의 마음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활미는 이 순간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활미는 난장판이 되어 있는 집에서 발끝으로 옷가지들을 밀어내고 지금, 거기, 그 자리에 앉아 한 잔의 커피를 마셨으리라. 그 절박한 마음이 나의 마음을 적셨다. 그 이전의 나는 이렇게 어지럽혀진 산만한 곳에서,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온통 마음이 무거운 상태에서, 어떻게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나 생각했을 터였다. 그것은 온전한 휴식이 아니라고, 최상의 휴식이 아니라고, 스트레스가 더 쌓일 거라고.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가 원하는 때에, 모든 일들을 멈추고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지 않으면, 그것을 우선 순위에 두지 않으면, 그 시간은 오지 않는다. 늘 나 자신은 다음, 다음, 다음이 될 것이다.
그 만화를 본 이후로 나에게는 습관이 생겼다. 가장 할 일이 많고, 어질러진 한 가운데에 있을 때 모든 것을 멈추고 여유 있는 커피 한 잔을 드는 것. 마치 온갖 머릿속 번뇌에도 코 끝의 숨에 집중하는 ‘명상’ 과도 같은 이 행위가 나에게 묘한 힐링을 준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나’를 알고 싶고, 돌아보고 싶고, 마주하길 원했으면서도 늘 주저했다. 내 삶이 어지럽다고, 정리가 필요하다고, 준비가 안 되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그럴 뭐라도 되냐고 머뭇거렸다. 그런데 삶이 널브러져 어수선한 한 가운데에서 나는 느낀다. 피하다간 아마 다음은 없을 것이다. 늘 허덕이며 삶을 치우다가, 정리하다가 말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닿는 길’에 용기를 내서 가 보려고 한다.
그러니 만약 지금 오랫동안 고대하던 뭔가를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고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부디 지금 시작하시기를. 마침 새해라는 ‘타이밍’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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