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이었던가. <다 잘 된 거야>라는 영화를 봤다. 처음 이 제목을 봤을 땐 ‘다 잘 될 거야’를 잘못 썼나? 했다. 이 영화는 엠마뉘엘 베르네임이라는 작가가 쓴 자전적 소설 <다 잘 된 거야>를 영화화한 것으로, 금기를 깨고 아버지의 죽음을 돕는, 즉 아버지의 안락사를 돕는 딸의 이야기를 다룬다.
뇌혈관 사고로 반신마비가 온 아버지. 그는 제대로 보지도 먹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절망을 느껴 딸에게 이 모든 것을 “끝내게”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안락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다. 이 상황은 잔인하고 슬프지만, 이 영화에서 아버지의 부탁은 일시적이고 감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존엄성이 무너진다고 느끼는 매 순간마다, 간절하게 원하던 선택이었다. 주인공은 죽음을 적극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자기 삶의 '끝'을 돌보았다.
우연히 혼자 본 이 영화는 논란거리가 될 만한 영화였다. 그 당시의 나는, ‘삶의 시작을 선택할 수는 없었으나 끝을 선택할 수는 있겠다’는 생각을 담담하게 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인권’적인 선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은 누구도 알 수 없으며, 이승의 끝은 인간의 소관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 마지막 순간만은 인간의 소관임이 확실하다는 생각을, 나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알게 되었다.
5년 전, 아버지가 만성 폐 질환으로 오랜 세월을 고통스러워하다 생의 마감을 맞이할 즈음이었다. 어느 날 그렇게 당신을 괴롭히던 숨찬 증상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눈도 초롱초롱하고 호흡도 거칠게 하지 않았다. 이때 아버지는 섬망이 이미 와 있었다. 두려움도 들뜸도 없이 한곳을 골똘히 응시한 아버지에게 ‘아빠,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라고 물었었다. 그런 나에게 들려준 뜻밖의 대답.
“으응... 오늘 갈지, 내일 갈지 생각하고 있어”
순식간에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차올라서 나는 그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병실 문을 바라보며 “저 문만 나가면 살 것 같은데, 저 문 바깥으로 가면 안 되나?”라고 계속 물었던 아버지였다.
그다음 날 위급한 상황이라고 연락이 왔고, 우리 가족들은 다 모였다. 다행히 우리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위급한 상황을 넘기셨다. 우리 모두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간 그날 저녁,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깨달았다. 배터리 수명이 다 되듯 인간의 수명을 닳게 만드는 것은 하늘의 뜻이지만, 마지막까지 이 삶의 끝자락을 잡고 있다가, 마지막까지 잡고 버티고 있다가, 결국 그 손을 놓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을...
오늘 갈지 내일 갈지 고민하셨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날 우리들을 모두 불러내서 얼굴 한번 다 보시고는, 모두가 안심하고 돌아간 그날 저녁, 이생의 끈을 놓아버리셨다.
나는 왠지 <다 잘 된 거야>의 아버지처럼 우리 아버지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하셨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이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부모님이 상대적으로 일찍 돌아가셔서 고아가 된 지금, 부모님이 안 계셔서 무엇이 슬픈 지 생각해 본다. 무엇이 불편한 지 생각해 본다.
크게 슬프지도 않고 불편하지는 더더욱 않다. 다만 내가 혼자라는 외로움, 보고 싶은 때 볼 수 없는 것. 그것이 전혀 무방비 상태에서 쓰나미처럼 닥쳐올 때가 있다. 며칠 전 공중파 방송에서 잊을 만하면 재방하는 ‘응답하라’ 씨리즈 중 <응답하라 1988>이 방송되었다.
정봉이 아버지(김성균 분)가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마음이 울적해져서 잘 먹지도 웃지도 않고 넋 나간 사람처럼 지내자 가족들이 걱정하기 시작한다. 마치 여성들의 완경기처럼, 울적하고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 없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옛날 부모님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를 듣다가 문득 깨닫는다. 그 알 수 없었던 의문의 감정, 세상 허전하고, 세상 울적하고, 즐거울 것 하나 없고, 의미 있는 것 하나 없는 그 묘한 기분의 실체가 바로 ‘그리움’이었다는 것을.
오래된 테이프 속 저 멀리서 배경 음악처럼 들려오던 살아생전의 어머니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어머니가, 엄마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 역시 그 장면을 볼 때 느닷없이 솟구쳐 오르는 그리움을 눌러 담을 길이 없어 나도 모르게 “나두! 너무 보고 싶다!” 외치며 속절없이 울었더랬다. 딸내미가 보든 말든 상관없이.
볼 수 있을 때 보고 싶지 않다가 왜 볼 수 없을 때를 알고 나서야 이토록 보고 싶은 것인지. 인간은 왜 이토록 어리석은 것인지.
위안을 삼자면, 그런 그리움의 ‘쓰나미’가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났다면, 아마 인간들은 겨울 왕국에 살았을 터이다. 가끔, 잊을 만하면, 예측 불허 순간에 솟구쳐서 정말 다행이지 뭔가.
우리 집에서 아버지가 살던 곳은 불과 5분 거리에 있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한 골목 끝 집 2층이 아버지가 사는 집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치는 이 길은 한때 나에겐 돌아만 봐도 마음 시린 길목이었다.
일부러 근처를 몇 번이고 돌기도 했던 길목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돌아보는 날들이 줄어들었다. 많은 날들을 그냥 스쳐 지난다. 언젠가부턴 아버지가 거기 잘 살고 계시는 것 같이 느껴진다.
가끔은 창문을 쳐다보고 안부를 묻는다. 살아있을 때처럼. 슬프지 않게.
그럼 아버지가 내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괜찮아! 다 잘 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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