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끝, 그 다음은

Story.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데이비드 실즈

2023.08.13 | 조회 1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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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실물보관소 알렉산드리아

이야기가 필요한 이들을 위한 이야기 보관소 【알렉산드리아】

가끔, 필요할 때가 있다. 

하루의 끝.

시계마저 지친 그 자리에 설 때.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봐도, 

마음 속을 아무리 헤쳐봐도, 찾고 싶은 것을 손에 잡지 못할 때. 

아니, 무엇을 찾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렸을 때.

 

그럴때. 

사람들은 이곳을 찾는다. 

놓쳐버린.

혹은 잃어버린 이야기를 찾기 위해.

이곳의 문을 연다. 

 

이야기를 찾으러.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찾으러. 이곳에 온다.



 평일의 영화관은 몹시도 조용하다. 스피커가 아닌 어떤 곳에서도 소리가 들리지 않고, 이곳에 숨 쉬고 있는 사람은 나 하나가 전부인 것만 같다. 난 평일의 영화관을 그래서 찾고, 또 그래서 찾지 않았다. 

 영화 속 주인공은 무슨 이유때문인지 나이를 거꾸로 먹고 있다. 아니 뱉고 있다. 태어나는 순간 무거운 숫자의 나이를 머금고 있다고, 한 해 한 해 숫자를 뱉어낸다. 그럴때마다 남자의 주름은 펴졌고, 허리는 올곧아졌으며, 허벅지와 팔에 근육이 붙었다. 머리카락이 는것은 당연했으며, 어깨도 점점 벌어졌다. 

 그렇게 남자가 나이를 뱉는 사이, 남자가 사랑하던 여자 아이는 모두가 그런것처럼 나이를 먹는다. 눈에는 주름이 선명해지고, 머리카락은 새었으며, 늘어진 가죽은 도통 돌아올 줄을 모른다. 여자는 그것이 몹시 싫다. 특히, 그와 만날때면 점점 작아지는 자신의 모습이 견딜 수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자는 발레 연습을 마쳤다. 같은 시각 어느 택시는 손님을 태운다. 손님은 누군가에게 줄 선물을 주기 위해 백화점으로 가달라고 한다. 여자는 무언가를 두고 왔는지, 친구를 기다리기 위해서인지 연습장에 머문다.

 또 같은 시각. 택시의 탄 손님은 주문한 선물을 찾으려 하는데 점원이 포장을 해놓지 않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된다. 택시는 그런 손님을 기다린다. 그리고 출발한다. 

같은 시각. 여자는 연습장을 나선다. 뒷문을 연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거리에 내려선다. 

같은 시각. 택시가 달려온다. 

같은 시각. 여자는 택시에 부딪힌다. 

이 중 단 하나만 어긋났더라도 나지 않았을 사고였다. 하지만 사고가 나는 것이 기본값이라도 된다는 듯, 사고는 일어났고 여자는 쓰러진다.  


 "오자마자 영화 타령?"

 "말하는 디자인 좀 보게? 넌 어째 바뀐게 없어 그래?" 

 "편지 한 장 달랑 써놓고 떠났다가 일 년 넘게 전화 한 통 없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소만?"

 "그런 사소한 일은 잊어버려. 요즘 애들 답지 않게. 너도 참~ 안그래? D?"

 어느샌가 커피를 타온 D가 재빠르게 자리 잡으며 말한다. 

 "아무렴요.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Y가 좀 그런게 있긴 하죠."

 "내가... 뭐?"

 "그거 있잖아요~ 애늙은이 같은거~"

 "호호호, 맞아  맞아. 우리 D가 사람하나는 잘 본다니까. 돗자리 펴도 되겠어." 

 "돗자리는 무슨요. 어머니랑 같이 앉아 있으려면 비단모포를 준비해야죠!"

 죽이 잘 맞는 두 사람 덕에 내 얼굴은 점점 죽상이 되어갔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도 되는 걸까? 싶지만... 엄마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이상, 먼저 화제를 꺼낼 수는 없었다. 아직 어느 정도 진행된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 D는 어떻게 잘 지냈어? 딸이 잘해주든?"

 "잘해준다라... 그게 기준에 따라 다른데 말이죠. 상대평가로 할까요? 절대평가로 할까요?"

 "적당히들좀 하세요. 적당히들좀." 

더는 두고볼 수 없어 두 사람 사이에 앉으며 말했다. 먼지가 내려앉을 정도의 시간. 그 시간만큼의 침묵. 그 시간을 견디기 민망해 또 다시 말한다.

 "어디... 갔다 온거야? 영화관만 간 건 아닐거고." 

 "갔어. 영화관." 

 "일 년 내내?"

 "기분은 그랬지." 


극장 안에는 나를 포함 열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계산해보았다. 이들 중 몇 명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까? 절반? 반에 반의 반? 아니면. 나 혼자. 아니다. 그럴리가 없다. 열 명이 모였는데 나 혼자만 그런 아픔을 겪는다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없어야 한다. 그것이 나의 욕심에 불과 할지라도.

다시 영화에 집중해본다. 아니, 그러지 못한다. 내 필름은 방금 그 장면을 무한히 리와인드하고 있다. 그리고 장면 마다 '만약'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만약 연습이 늦게 끝났다면. 만약 택시가 그 손님을 태우지 않았더라면. 만약 친구를 기다리지 않았더라면. 만약 점원이 포장을 해두었다면. 만약, 만약, 만약, 만약... 그이도 그랬더라면.

그랬더라면 지금 이 극장 안엔. 열한 명이 있었을까?

부질없는 생각을 잇다보니 영화는 끝나 있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엔딩 타이틀이 오른다. 극장의 불이 켜진다.


"그러니까. 대체 어딜 그렇게 다닌거야?"

"그냥 여기저기. 난 내가 이야기 찾는걸 진짜 잘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안나오는 거 있지."

"무슨 이야기? 의뢰라도 받은 거였어?"

엄마는 한숨을 작게 내쉬며 말했다.

"받았지. 진짜 받기 싫었는데."

"무슨 의뢰?"

"늘 그렇지. 잃어버린 것에 관한. 의뢰."

엄마는 자그마한 수첩을 내게 건넸다. 거기엔 이렇게 써있었다.

11월 9일.

허우적거리면서 나는 겨우겨우 슬픔을 건너가는 길을 찾아나가고 있다.

끊임없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로, 뜨겁게 달아오른 어떤 지점이 되돌아온다. : 말들, 죽음과 싸우면서 그녀가 내게 입김과 더불어 불어넣곤 하던 말들, 너무도 메마른, 지옥 불처럼 타오르는 고통의 점화점, 나를 완전히 압도해버리는 말들.

이 순수한 슬픔, 외롭다거나 삶을 새로 꾸미겠다거나 하는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슬픔. 사랑의 관계가 끊어져 벌어지고 파인 고랑.

모든 것들이 줄어든다, 글 쓰는 일도, 말하는 일도. 그러나 이것만은 제외하고.

롤랑 바르트는 사랑하는 엄마를 잃고 일기를 썼다. 아니, 일기라기 보다는 기억의 단편. 그것을 뱉어냈다. 엄마는 그 기록을 필사한 것이었다. 동반자를 잃은 슬픔. 그것을 아직 다 씹어내지 못한 엄마는 그것을 뱉을 힘도 없어 남의 애도를 배껴야 했던 것이다.

11월 21일.

저녁.

어딜 가나 지루할 뿐.

몇 장을 더 넘겨본다. 엄마의 지난 일년의 시간을 넘겨본다. 어떤 이야기든 페이지가 넘어가면 그만큼. 엔딩이 다가온다. 이것은 이야기가 가진 유일한 물리적 특성이다. 하지만 엄마의 애도일기는 그러질 못했다. 아무리 페이지를 넘겨도 시작, 다시 시작이었다. 슬픔의 재시작. 엄마는 매일 새로운 페이지에 새로운 슬픔을 담아야 했다. 그러니 끝날 수 없었던 것이다. 잃어버린 이야기를 찾는 것은.


"그러니까, 나도 한 번 의뢰를 좀 해볼까?"

엄마는 내게서 노트를 뺏어들며 말했다.

"무슨 의뢰?"

"모르는 척 하지 말고."

모르는 척 하고 싶었다. 내가 어떻게 찾겠는가. 죽은 아빠를 향한 슬픔. 그 감정을 매듭지을 이야기를. 나도 아직 찾지 못한 것을.

"어디보자."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의뢰서를 쓰기 시작했다. 남은 칸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엄마는 아주 짧게 썼다. 무언가 쓰는 것에 질렸다는 듯이.

"비어버린 자리. 그곳을 채울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름 자리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다.


엄마는 의뢰서를 두고 자리를 비웠다.

D는 한 번 더 물을 끓여 커피를 내려주었다.

"괜찮겠어요?"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아니 그래도... 어? 근데 이름은 안쓰셨네요?"

"엄마가 원래 그래. 하라는 거 잘 안하고. 사회생활 진짜 못할 스타일."

"에이~ 그게 아닌데 뭘."

"아니긴 뭐가?"

"자리가 모자랐던 거죠."

"자리?"

"네. 이름 쓸 자리가. 두 사람이나 써야 하니까."

"이상한 소리 말고, 이야기나 찾으러 가죠."

"저요? 저 퇴근할건데?"

"아 MZ. 맞다. D는 MZ지. MZ야..."

"아유 뭘 또 그렇게 말해요."

"됐어요. 가서 워라밸 챙겨요. 나는 그냥 뭐, 남편 잃은 엄마의 슬픔을 달래줄 이야기나 혼자 찾으러 다니고 있지 뭐."

"어휴~ 진짜!"


영국에 왕립화학협회라는 곳이 있다. 왠지 어마어마한 연구를 할 것 같은 이곳에서 2013년에 시도한 연구는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만드는 비용을 계산한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일반적인(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들으면 화를 내겠지만) 인간 하나를 만드는데 어떤 원소가 필요하고, 그 원소를 모두 구입하는데 얼마가 필요한지에 대한 연구다.

일단 연구의 시작은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소의 종류와 양을 파악하는 것이다.다행히 우리 몸은 탄소, 산소, 수소, 질소, 칼슘, 인 이라는 매우 많이 들어봤을 법한 원소들로 99퍼센트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산소는 우리 몸의 61퍼센트를 차지하는데 원소 중에서 가장 값싼 원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왕립화학협회에 따르면 우리 몸의 61퍼센트를 차지하는 산소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8.90파운드면 충분하다고 한다. 9파운드도 안되는 돈으로 우리 몸의 61퍼센트를 만들어 낼 수 있다니… 놀랍고 또 허망한 일이다.

산소를 제외하면 이제 수소와 탄소, 질소, 칼슘, 인을 사야 한다. 이들을 모두 구입하면 총 금액은 2013년 기준으로 96,546.79파운드가 든다고 한다. 환율로 계산해보면 약 1억 5천만원 정도의 돈인데, 이 돈만 있으면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구입할 수 있다니. (쓸데없는)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우리의 몸은 태어나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말할 만큼 놀라운 모습을 보여준다. 일단 원자수만해도 70억에 10억을 곱하고 또 10억을 곱한 숫자만큼의 원자가 담겨 있고, 혈관을 모조리 모아 연결하면 지구를 몇 바퀴는 돌 수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몸을 가지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해도 몸은 나름의 정화작용을 거쳐 우리를 살아남게 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인체의 신비를 밝히려면 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적어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아빠와 엄마, 그리고 내가 태어난 인체의 신비를 밝히는 것도 우리 생애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비밀은 어떨까. 그것을 밝히는 것은 가능할까? 이 질문의 답은 데이비드 실즈의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에 담겨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들.

우리는 더없이 높이 날았다. 각각의 개체엿다면 보지도 못할 것들을 보았고, 숨 쉬지 못할 공기를 맛보았다. 하지만 중력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 하늘을 날 수는 없을 것이란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우리의 외피는 노인의 그것처럼 밀도가 감소했고, 아무리 불을 떼고 따뜻한 공기를 불어 넣어도 쉽게 추위를 느꼈다. 젊은 녀석이 우리의 열기구에 타고 있었다면 “더우니 불 좀 그만 때요!” 라고 성질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이가 들면 우리 몸은 쉽게 추위를 느끼는 것을.

조금만 더, 여정을 이어갈 수는 없을까? 조금만 더 살 수는 없을까? 우리는 진동하듯 흔들리며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방법은 있었다. 최대한 적게 먹는 생활을 하고, 회사는 그만두고, 하루에 여덟시간 꼬박 잠을 자고, 술은 줄이고, 운동은 고통스럽더라도 꾸준히 계속! 가치가 상실되지 않도록 가치있는 취미를 갖고 조금 더 유머러스한 생활을 이어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오래살 수 있는 방법이다. 물론 이런 것을 하나도 지키지 않는다하더라도 장수한 부모님의 유전자를 받았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걷는 것은 넘어지지 않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우리 몸의 생명은 죽지 않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유지된다. 삶은 연기된 죽음에 불과하다.”

우리는 한때 가고자 하는 곳이 있어서 걸었다.

하지만 지금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걷는다.

우리는 한때 죽어도 좋다는 기분으로 온갖 낭떠러지로 돌진했다.

하지만 지금은 죽지 않으려 침대 밖을 나서지 않는다.

그것을 영원히 몰랐다면 좋으련만 나이가 든다는 것은, 늙는다는 것은 젊은 시절보다 더 많은 단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설명할 단어도 알고 있었다.

"이별."

엄마와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었다.

그렇지, 엄마?

알렉산드리아의 문밖에서 엄마가 손을 흔든다. 나는 이야기를 고이 접어 봉투에 넣었다. 이것으론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지금은 여기까지다. 남은 이야기는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채워야 하는 것이다. 나와 엄마가.함께 써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빈 종이도 한 장 같이 넣는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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