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박물관 건너편

Story. ⟪건너편⟫ 김애란 & ⟪순수 박물관⟫ 오르한파묵

2023.08.08 | 조회 1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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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실물보관소 알렉산드리아

이야기가 필요한 이들을 위한 이야기 보관소 【알렉산드리아】

가끔, 필요할 때가 있다. 

하루의 끝.

시계마저 지친 그 자리에 설 때.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봐도, 

마음 속을 아무리 헤쳐봐도, 찾고 싶은 것을 손에 잡지 못할 때. 

아니, 무엇을 찾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렸을 때.

 

그럴때. 

사람들은 이곳을 찾는다. 

놓쳐버린.

혹은 잃어버린 이야기를 찾기 위해.

이곳의 문을 연다. 

 

이야기를 찾으러.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찾으러. 이곳에 온다.



"꼭 이래야만 할까?"

"응. 그냥. 이렇게 하자."

"그래야지. 어쩔 수 없지."

"그런데, 너 혹시 예전에 내가 준 책 읽어봤어?"

"응? 무슨 책?"

"역시."

"뭐가 역시...?"

"안 읽을 줄 알았다고."

"알면서 준 거야?"

"응. 알면서 준거야."

"왜?"

"그냥."

"역시나 넌 읽지 않겠지만 그 책에 우리랑 비슷한 사람들이 나와."

"우리랑 비슷한?"

"응. 한 번 읽어봐. 아니다. 안 읽어도 괜찮아. 넌 그 책 어디다 뒀는지도 모를걸?"

"설마."

"뭐 됐고. 악수라도 할까? 아니면 쿨하게 빠이?"

"그래. 쿨하게. 빠이."


"뭘 저렇게 오랫동안 찾는 걸까요?"

"그러니까. D가 가서 한 번 물어봐요."

"내가?"

"응, 니가."

"지금 니가라고 했어요?"

"설마."

"하여간... 일단 물어보고 올게요."

"뭐래요?"

"모른대요."

"뭘?"

"자기가 뭘 찾는질 모른데요."

"응?"

"그러니까 들어봐요."

오늘 알렉산드리아를 찾은 의뢰인. 그는 찾아야 하는 책이 있었다. 그런데 책의 제목도 작가도, 내용도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생각나는 것은 푸른 하늘을 닮은 표지 뿐. 그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서점을 뒤졌으니, 그 책을 찾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서점, 저 서점을 둘러본 끝에. 잃어버린 이야기를 찾아주는 이곳. 알렉산드리아에 온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다는 것이다. 의뢰인은 아무리 머리를 짜내봐도 더는 생각을 해내지 못했다. 그것이 여자친구가 선물로 준 책이었는데도 말이다.

"아이고~ 손님. 어떻게 여자친구가 준 책을 기억도 못하는 거예요. 혼날만 하네."

"맞아요. 혼날만 하죠. 그런데 이상하게 혼내진 않더라고요."

"오~ 운이 좋으셨네요."

"운이 좋은 걸까요? 혼내는 말 대신,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는걸요."

D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의뢰인은 말그대로 몇 년동안 함께한 여자친구와 헤어진 참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여자친구가 자신들의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말한 책. 그래서 선물한 책. 하지만 어디다 뒀는지도, 어떤 책인지도 모르는. 그런 책을 찾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찾을 수... 있을까요?

"글쎄... 정보가 너무 적긴 하네요. 하늘색 표지를 가진 한국소설. 너무 많거든요. 조금 더 단서가 필요할 것 같은데... 여자친구분이 해주신 다른 말 없을까요?"

"별말 없었어요. 반복된 '그냥'이라는 말. 귀찮다기보다는 정말 '그냥' 그렇게 되었다는 듯한 말. 그런 말만 했어요.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요? 그냥 이라니. 헤어지는 이유가 그냥일 수가 있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럴 수가 있다. 헤어지는 이유가 '그냥'일 수도 있다.


서울지방경찰청 교통안전과 종합교통정보센터. 도화는 이 긴 이름의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그에게는 8년이나 사귄 남자친구 이수가 있다. 두 사람의 성격은 MBTI 검사를 하면 정반대로 나올 정도로 맞지 않다. 하지만 연애의 시작이라는 것은. 그 맞지않음에도 불꽃이 튀는 법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사랑을 했고, 동거를 했고, 8년의 시간을 함께했다.

이수는 6년째,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매년 떨어지고 있다. 도화는 경찰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교통방송 캐스터를 하고 있다. 그것도 2년 만에.

"여기까지 듣고 질문. 지금까지 들려준 이야기 속에 두 사람이 헤어질 이유를 찾으셨나요?"

나의 질문에 D와 의뢰인은 당연히 찾았다는 듯 앞다투어 말했다.

"그거네. 성격이 안맞았어. 원래 저렇게 안맞으면 처음만 좋지 나중엔 싸울 일 투성이거든."

"아니, 잠깐만. 이 분이 중요한 걸 빼놓고 계시네. 생각해봐요. 여자는 2년 만에 시험에 합격했는데, 남자는 지금 6년째 낙방이잖아요. 그리고 보아하니 공부도 열심히 안하는 것 같고. 그러면서 야망은 크고. 그런 스타일이네요. 그러니 헤어질 결심을 할 수 밖에 없죠."

아니다. 둘 다 답이 아니다. 조금 더 이야기를 전해본다.

그날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친구의 결혼식 사회를 갔던 이수는 만취한 상태로 집에 돌아온다. 그렇게 크리스마스 이브는 아무렇지 않은 날의 하루로 지나가 버린다.

"그거네. 그 중요한 날을."

"아니에요! 더 들어봐요."

"네..."

크리스마스. 세상 모든 연인들에게 의미가 있다는 그날. 이수는 노량진 시장에 가서 기분을 내자고 한다. 크리스마스와 기분과 횟감의 연결성을 찾는 것은 시험지의 킬러문항 답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래서 도화는 말한다.

"그냥, 집에서 피자나 시켜먹자."

하지만 이수는 사회보고 받은 돈은 빨리 써야 한다며 도화의 손을 이끌고 노량진으로 향한다. 그리고 25만원짜리. 비싼 생선회를 사 초장집에 들어간다. 그리고 우걱우걱. 회를 먹는다. 지나치게 비싸고 지나치게 많이 산 덕분에 회는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다. 그래서 먹어야만 했다. 로맨틱한 이야기를 나눈다거나, 알콩달콩한 손짓을 주고 받는다거나, 사랑스런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일을 할 시간이 없었다. 먹기에 바빠야만 했다.

"이거네요. 지금 자기 상황도 모르고 비싼 회를 먹으러 가는 게 말이돼요?"

"아니지. 그것보다 문제는 크리스마스에 수산시장에서 회를 먹는 데이트 코스를 짠 게 문제가 아닐까요?"

"땡, 땡, 땡. 어쩜 이러실까들?"

"그럼 뭔데요?"

"들어봐요. 좀만 더."

도화는 이수가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을 알고 있었다. 얼마 전, 함께사는 전세집 주인에게 연락이 왔다. 주인은 내년초까지 방을 비워달라고 말하며 이런 이야기를 한다.

"몰랐어? 같이 살던 친구가 지난 번에 방을 월세로 돌렸는데? 그 뭐냐. 보증금 팔백오십은 그 친구한테 돌려줬지."

도화가 이수에게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말하자, 이수는 집을 돌려 놓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도화는 아무렇지 않게 답한다.

"괜찮아. 그럴 필요 없어."

도화의 그 말은 이별의 통보였다. 그는 이미 혼자 살 집을 알아보고 있다 말하며 이별을 암시한다. 이수는 그런 도화의 모습에 더는 말을 더하지도, 손을 얹지도 못한다. 그저 바라만 볼 뿐. 더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때요? 이제 알겠어요?"

 "아..."

 "전세금을 빼가서 그렇구나..."

 "아니... 그게 아니고요. 결국 결말까지 말해줘야겠어요?"

 "네... 부탁해요."

 이건 김애란 작가의 단편 <건너 편>의 이야기에요. 그리고 이 소설의 결말은 이래요. 

 “나는 네가 돈이 없어서, 공무원이 못 돼서, 전세금을 빼가서 너랑 헤어지려는 게 아니야.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 같아." 

 의뢰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연인과 헤어지는 순간, 그의 모습도 저랬을 것이다. 아무 말도,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한 채, 저런 표정으로 서있었을 것이다. 왜 손을 뻗지 못했을까? 언제나처럼 손을 뻗고 미안하다 말하고, 잘하겠다 보여주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여기에 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이유로. 말하자면 '그냥' 도로가 놓였다. 그것도 8차선 정도의 넓은 도로가 놓였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건너편에 서있다.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지만 그 사이에 놓인 도로는 두 사람이 손을 아무리 늘려도, 두 사람이 아무리 소리쳐도, 서로에게 닿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 두 사람이 다시 닿을 수 있는 방법은 한참 반대의 길로 향하다 유턴을 해 돌아오는 것. 아니면 육교나 횡단보도가 놓이길 기다리는 것.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 지난한 시간을 기다리기에 두 사람의 시간은 너무 짧게 남아 있었다. 그러니 그냥. 헤어지는 수밖에. 아니면... 

  아니면 이런 방법도 있다. 이스탄불의 한 작가가 했던 방법. 이를테면 박물관을 짓는 것 같은.


"여기가 순수박물관인가요.?

이스탄불의 수많은 박물관 중, 가장 사적이며 가장 은밀한 박물관이 하나 있다. '순수의 박물관'이라 이름 붙은 이곳은 여기 박물관이 있어? 싶은 곳에 있다. 나는 지금 그곳에 와있다. 물론 이곳을 오기 위해 이스탄불로 여행을 온 것은 아니다. 그저 언젠가 그 사람과의 관계가 정리된다면 이스탄불 정도로 여행을 오고 싶었고, 그래서 도착했다. 기왕 이스탄불까지 왔으니 순수박물관을 들르지 않을 이유도 없다. 마침 가방에 오르한 파묵의 소설 <순수 박물관>이 있었고, 이 책의 끝에는 진짜 순수 박물관에 들어갈 수 있는 표가 있다. 그래서 그냥. 온것일 뿐이다.

이곳에는 정말이지 사적인 물건들로 가득하다. 그것도 짧은 시간, 뜨거운 사랑을 했고, 그 사랑이 끝난 뒤, 그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두 사람의 물건을 모은 남자. 그가 모은 물건들이 빼곡히 전시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이 피웠던 담배꽁초 백여개. 그가 좋아했던 드레스, 그가 어린 시절 탔던 자전거, 그와 함께 덮은 이불, 함께 누운 침대, 함께 쳤던 두꺼운 커튼. 그런 것들이 전시되어 있다.

남자는 애써 물건을 모으고 박물관을 짓고, 자신과 사랑하는 연인의 이야기를 소설로 남기려 했다. 왜 그랬을까?

이 질문은 나에게로 이어진다. 나는 왜 그 사람과 헤어지고 떠나온 이곳에서 구태여 순수박물관을 찾은 걸까. 이별의 방식. 그것을 배우고 싶었던 것일까?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아직 다 정리되지 않은 것일까. 그렇다면 나도 이렇게. 그 사람과의 시간을 기억할 만한 것들. 그런 것들을 모아두면 나의 한 시절을 갈무리 할 수 있을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순수 박물관> 그 소설 속 주인공은 어땠나요? 그 박물관을 짓고 마음의 정리를 할 수 있었나요?"

그건 <순수 박물관> 이 소설을 쓴 작가 오르한 파묵도 정확히 말해주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누구도 그것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사자라 하더라도. 어쩌면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박물관까지 만들필요가 있을까? 하고. 괜히 추억의 물건을 모아두는 바람에 미련만 더 남는 것은 아닐까?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미련도 후회도 남지 않았을까? 그건 아닐것이다.

이별의 순간. 한 시절의 마무리. 그것은 찰나와도 같아서 그 순간을 지나서면 또 다음 씬을 찍어야 한다. 건너편으로 건너가든, 반대의 길로 질주하든, 그냥 잠시 주저앉은 채, 멍하게 건너편 그곳을 바라보든 말이다. 그렇게 씬이 이어지고 시퀀스가 완성되고 시퀀스와 시퀀스가 연결되한 편의 영화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엔딩 크레딧을 본 후에야 우리는 영화관을 나설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영화를 마주할 수 있다.

그러니 지금은.

"건너편으로 가보겠습니다."

새로운 씬을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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