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유효기간

Story. ⟪제5도살장⟫ 커트 보니것

2023.07.03 | 조회 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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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실물보관소 알렉산드리아

이야기가 필요한 이들을 위한 이야기 보관소 【알렉산드리아】

가끔, 필요할 때가 있다. 

하루의 끝.

시계마저 지친 그 자리에 설 때.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봐도, 

마음 속을 아무리 헤쳐봐도, 찾고 싶은 것을 손에 잡지 못할 때. 

아니, 무엇을 찾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렸을 때.

 

그럴때. 

사람들은 이곳을 찾는다. 

놓쳐버린.

혹은 잃어버린 이야기를 찾기 위해.

이곳의 문을 연다. 

 

이야기를 찾으러.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찾으러. 이곳에 온다.


 "D, 혹시 그런 거 안 무서워요?" 

 "무섭죠." 

 "그런 게 뭔지도 아직 말 안했는데..." 

 "아, 그랬나요?" 

 "나는 그게 진짜 무섭거든요. 늙는 거." 

 "그건 Y가 무서워할 필요가 없죠." 

 "왜?"

 "Y는 이미 늙었잖아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때가 있다. 내가 너무 늙어 버린 것은 아닐까. 오늘까지만 가능했던 일을 못하면 내일은 그만큼 늙어버려 아예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때가 있다. 아직 평균 수명이라 불리는 것에 3분의 1도 살지 않았지만 말이다.

 "저도 실은! 늙는 게 무서웠던 때가 있었죠."  

 "과거형이네. 지금은 안 그렇다는 거에요?"

 "그렇더라고요. 스물 일곱 살을 무사히 넘기고 나니까. 하나도 안 무섭던데요?"

  커트 코베인, 지미 핸드릭스, 짐 모리슨, 브라이언 존스, 에이미 와인하우스... 이들은 모두 꽃이라 불리는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 나이가 모두 스물 일곱이었다는 공통점 때문에 스물일곱살 클럽 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이런 말 하면 비웃으시겠지만. 저도 스물 일곱이 되면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어요."

 "천재 라서?"

 "네. 웃기지만, 그땐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어떤 분야의 천재인지는 몰랐지만. 나는 아마도 천재일 것이고, 천재에게 요절은 운명과도 같은 것이구나... 철없는 생각을 했었죠." 

 "그런데 천재가 아니었고?" 

 "그래서 사라지지 않고 스물 일곱의 해를 보냈죠. 그러고나니 별로 무섭지 않더라고요. 너무 먼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그럼 이건 어때요?" 

 "무섭죠."

 "또, 또! 질문 안끝났거든요?"

 "아, 그랬나요..." 


 

 이런 건 어떨까. 스물 일곱을 지나 오랜 시간을 선물 받은 덕에 나이테를 수없이 그린 어느 날이 된 것이다. 좋아진 것이라곤 잠이 줄어든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쇠약해진 그때. 걸음의 속도는 반절 가까이 느려졌는데 시간의 속도는 두 배 가까이 빨라진 그때. 그때를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침에 눈 뜬 순간, 얼마나 무서울까?

 이 두려움의 가장 큰 요인은 아마도 '쓸모'일것이다. 쓸모를 찾아 걷던 어린 시절, 겨우 그것을 발견해 열심히 사용하던 젊은 날의 시간들. 그리고 영원할 것이라 믿었던 어리석은 나날들. 문제는 나의 쓸모라는 것은 돌처럼 단단하지 못함에, 예를 들면 크림치즈 정도의 연약함이기에 금방 닳아 없어져 버린다는 것을 그때는 잘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 그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은 이미 그릇의 바닥이 보일때쯤. 그만큼 닳고 닳아버린 이후라는 것. 그것이 문제다. 

 그때를 상상하자면 나는 어떤 공포 소설을 보는 것보다 무서워질 때가 있다. 물론 모든 이의 엔딩이, 그리고 나의 엔딩이 그렇게 흐를 거라는 확신은 없지만. 그래도 무서운 건 어쩔수가 없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나를 움츠러들게 한다. 그리고 이런 쓸모없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럼 좀 아껴써야 하려나...?"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가 없다. 아무리 맛있는 복숭아라고 하더라도 아껴 먹다보면 다 먹기도 전에 썩어버릴 것이다. 안타깝게 우리의 쓸모라는 것도 냉장고 밖 복숭아의 운명과 비슷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일을 불태울 수밖에 없다. 안태운다고 한들 내일도 그것이 남아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다만 바랄 뿐이다. 이렇게 활활 불타버린 다음, 숯이 될 수 있기를. 그래서 한 번 더 불태울 수 있기를. 바랄 분이다. 

 "와아... 멋있네... D." 

 "뭐가요?"

 "난 D가 이렇게 뜨거운 사람일 줄 미처 물랐지 뭐에요? 다 타버린 뒤에도 숯이 될 생각을 하다니... 야망이 굉장히 굉장해." 

 "지금 나 놀리는 거죠? 아까 늙었다고 했다고?" 

 "반은 정답. 그런데 대단하다는 생각은 진심. 아니, 조금 존경스럽기까지 하네." 

 "존경은 무슨요. 그냥 스물 일곱의 고개를 넘어선 이들의 운명 같은 거죠. 불태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운명의 나이들이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갑자기 왜 나이 타령이에요?"

 "왜겠어. 의뢰 때문이지."

 


 

 D가 연차를 쓰고 자리를 비운 어느 날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문을 열고 들어온 노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표정이었고, 그래도 쓰러지지 않으려 서로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소 오시라는 말에도 뭐가 그리 송구한지 노부부는 고개를 들 생각을 하지 않았고, 물 한 잔을 부탁할 때나, 여기 있는 책을 조금 보고 가도 괜찮냐는 질문을 할때도 거듭 송구하다는 표정이었다. 

 "어이구, 이 책은 오랜만이네요?"

 "그렇죠? 예전엔 세로로 읽느라 혼났는데, 잘 바꼈어요. 정말."

 노부부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런 볼을 가졌던 한때로 돌아간 것처럼. 다만 손은 느렸고, 주름진 눈엔 돋보기 안경이 씌워져 있었다. 노부부는 안경을 벗었다 또 썼다 하면서 책장에 꽂힌 책을 둘러보았다. 그러면서 같은 추억이 있는 책을 만날때면 오랜 동창이라도 만난 듯 웃었고, 처음 보는 흥미로운 책 앞에서는 조심스러워 했다.

 "뭐 찾는 이야기라도 있으실까요?"

 노부부의 시간을 방해할 마음은 없었지만 혹여나 배려하는 마음에 말을 걸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 말을 건냈다. 노부부는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하기를 몇 번 주저. 이내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그럼 차는 어떠세요?'"

 노부부가 환히 웃었다.  

.

.

.

 "그래서 그분들은 어떤 이야기를 찾고 있었던 거에요?"

 "스물 일곱 살의 이야기." 

 "스물 일곱 살?"

 그랬다. 노부부는 찾고 있었다. 스물 일곱. 어느 영화의 대사의 빌려보자면 만 년 가까운 유통기한이 남았을 것만 같았던 그때. 그때의 이야기를 찾고 있었다. 이제는 어느 낡은 책에서만 마주할 수 있을 그때의 이야기를. 


 

- 이름 : 당진동 부부

- 기분 : 늘그렇죠.

- 잃어버린 것 :

저희 부부는 뭐라고 해야 하나. 언제나 젊게 산다고 자부했습니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남들을 가르치려 하지 않고, 무엇보다 호기심. 그것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전시나 물건, 그리고 소식들을 귀찮아 하지 않고 찾아 다니며 즐기곤 했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늙지 않았다고. 늙은 것은 머리카락 정도가 전부라 생각했었죠. 그덕에 손주들과 놀아주는 것도 전혀 힘들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던 며칠 전이었죠. 언제 컸는지 벌써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된 손주와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어요. 손주놈은 특히나 그네타기를 좋아했는데 어찌나 게으른지 아직 발을 접었다 펴는 것을 잘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할어버지에게 어서 밀어 달라며 떼를 썼죠.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요. 그깟 그네. 아직 20킬로그램도 나가지 않는 아이를 밀어주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불과 1년 전만 해도 그랬죠.

우리가 1년 늙은 만큼, 아이는 1년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점점 용감해졌죠. 1년 전만 하더라도 조금만 그네를 세게 밀면 무섭다며 눈물 짓던 아이. 하지만 1년 만에 그 아이는 더 높은 세상을 겁 먹지 않게 되었어요. 그래서 더 높이, 더 높이. 할아버지, 더 높이. 소리 쳤죠. 아이의 소리에 맞춰 더 힘껏 팔을 뻗고 ,다리를 굴렀습니다. 그렇게 힘차게 그네를 밀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숨이 찰 정도의 그 일이 아이에게는 시시한. 만족할 수 없는 것이었나 봅니다.

아이는 이내 다리를 뻗어 땅에 발을 대 그네를 멈췄습니다. 그 조그만 것이 언제 커서 다리가 땅에 닿게 되었을까요. 손주의 신통방통한 모습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아이는 저흴 생각해서인지 이제 집에 가자며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을 잡았습니다.

"더 놀다 가지?" 라는 질문에도 괜찮다며, 집에가서 버스 놀이를 할 거라며. 대신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은 사줘야 한다며 웃었습니다. 배려라는 것을 배워버린 것이죠.

그런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집에 데려다 주고 나오면서 우리 부부는 서로의 손을 잡았습니다. 한겨울이나 거놎한 봄날씨도 아닌데. 우리 두 사람의 손은 갈라질 듯 건조했습니다. 그 촉감이 뭐랄까... 판사의 선고처럼 들렸습니다. 두 사람은 이제 늙음을 인정하라는. 두 사람의 유효기간은 모두 다 되었다는. 그것을 인정하라는 판결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아마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주보았을 때, 옅게 지었던 두 사람의 미소는 똑같이 쓸쓸했습니다.

억지였을까. 우리가 늙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들. 그 모든 것이 억지였던 것일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주인장은 이 글을 보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정도 생각을 할 정도의 일은 아니지 않나? 이런 생각들. 하지만 이 나이가 되면 종종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생각이 훌쩍 뛰어가곤 한답니다. 아쉽지만 그건 막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손주놈이 그랬듯이. 우리도 아이스크림 하나 집어 들고 가야지. 이가 시리니 조금은 덜 차가운 걸로. 그래도 달달한 놈으로다가.


 

"유효기간이라..."

"몇 년 같아요?"

"어떤 유효기간이요?"

"D의 유효기간."

"글쎄요. 이미 지났을라나..."

언제나 대답에 망설임이 없던 D였지만, 나이에 있어서는 확신이 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필요한 거겠지. 이야기가. 우리보다 먼저 그 구간을 지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말이다. 언뜻만 떠올려도 모지스 할머니나 박완서 작가, 황현산 선생, 폴 매카트니,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노년의 나이에도 활발히 활동한 이들의 이름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이들이 있으니 힘을 내라는 말. 더 젊게 살 수 있다는 말. 그런 말은 노부부 의뢰인에게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걸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닐테니.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가 필요할까? 혹시 이런 건 어떨까?

"어떤 거요?"

"아 깜짝이야.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들은 거에요?"

"몰랐어요? Y 만날 그러잖아요. 혼자 생각할 때 중얼중얼. 다 들려요."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해줬어야지. 아무튼, 여행 가방이나 줘봐요."

"이번엔 어디로 가시려고요?"

"음... 조금 코~ 지한 곳으로?"

"코~ 지요..?"

 


 

추리의 왕이라 불리는 애거서 크리스티는 처음 추리 소설을 쓰고자 했을 때, 자신의 분신을 만들기로 했다. 일찍이 코넌 도일이 그랬듯이 말이다. 그가 생각한 탐정은 기존의 탐정들과는 다른 모습이어야 했기에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름과 국적을 정하는데 애를 먹었는데, 셜록 홈즈처럼 영국인으로 설정해두기에는 무언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그는 생각했다. 탐정이 벨기에 사람이 아니라는 법은 없잖아? 이 생각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고정관념을 깨는 그녀의 첫 아이디어였다. 그렇게해서 에르퀼푸아로라는 추리소설 사상 첫 벨기에 탐정이 탄생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애거서 크리스티는 에르퀼 푸아로라는 훌륭한 캐릭터를 이용해 수없는 명작을 쏟아냈다. ㅇ르퀼 푸아로는 전 세계를 무대로 할 정도로 활발했던 캐릭터인지라 애거서 크리스티의 자품 배경 역시 스케일이 점점 커져갔다.

하지만 크리스티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아주 활달한 모험가가 주는 재미가 있는 것처럼, 아주 작고 평화로운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치 젊은이의 활극과 노인의 옛날 이야기가 서로 다른 매력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크리스티는 세인트 메리 미드라는 영국의 작은 시골 공간을 만들어냈다. 작은 곳이지만 분명 사람이 사는 곳이고, 작은 규모에도 긴 시간을 견뎠을 정도로 이야기가 많이 쌓인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을 보낸 한 사람을 만들어냈는데, 그의 직업은 탐정이나 은퇴한 경찰, 혹은 저명한 수학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바느질을 좋아하는 노인, 미스 마플이었다.

"마플 양은 허리에 꼭 끼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었다. 가슴에는 폭포 모양 얇은 망사 레이스가 달려 있었다. 손에는 검은 레이스 장갑을, 높게 올린 새하얀 머리에는 검은색 레이스 캡을 쓰고 있었다. 마플 양은 하얗고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실로 뜨개질을 하다 말고 다정하고 인정 많게 생긴 하늘색 눈을 들어 조카와 조카가 데리고 온 손님들을 즐거이 훑었다. 다섯 명을 짤막하게나마 둘러본 마플 양은 다정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다시 뜨개질을 시작했다."

<화요일 밤의 모임> 이 짧은 단편을 시작으로 미스 마플은 세상에 등장했다. 그의 등장씬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소개만 보면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사건과 관련된 특별한 전사도 없어 보였고, 그가 평생을 살아온 동네나 집 역시 어떤 비밀도 품고 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건 독자뿐 아니라, 작품 속 인물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 참에 모임을 하나 만들까요? 오늘이 무슨 요일이었더라... 화요일인가요?

그럼 화요일 밤 모임이라고 이름을 붙이죠. 앞으로 매주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문제를 내는 거예요. 각자 정답을 알고 있는 미스터리를 하나씩 내놓는 거죠. 어디 보자... 모두 몇 명이죠? 하나, 둘, 셋, 넷, 다섯 명이네요? 여섯이면 좋을 텐데..."

화요일 밤의 모임. 이 모임은 마플의 조카가 지인들을 데려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의 지인들은 작가부터 변호사, 경시청 직원까지, 다양했다. 모두들 소위 한가닥 하는 인물들인 것이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높은 자존감이 있었고, 그것을 겨루려 미스터리 사건을 푸는 모임을 만든 것이다. 물론, 그런 그들의 시선에 노부인 마플은 보이지 않았따.

"나를 빼놓으셨군요, 조이스 양. 나야 똑똑한 축에도 못 들겠지만, 세인트 메리 미드에서 몇십 년을 사는 동안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많은 걸 깨닫게 됐답니다."

마플은 자신도 모임에 참여하겠다 말한다. 그러자 다른 이들은 그저 참관인 정도로 허락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코 저 노부인은 사건을 풀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도 함께였다. 하지만 게임이 시작되고, 첫 번째 미스터리가 시작되었지만 누구도 답을 찾지 못했다. 그 똑똑한 이들 중 누구도, 사건의 본질을 꿰뚫는 이가 없었다.

"이야기를 하도 열심히 듣다고 또 코를 빼먹었네."

그런 멤버들 속에서 뜨개질을 하며 그저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마플이 입을 연다. 그는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을 예로 들며 사건의 과정과 트릭, 결과와 범인을 모조리 찾아낸다. 단 하나도 틀림없이.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진 그 순간. 조카가 말한다.

"이번 문제는 제인 이모가 맞추셨네요. 그나저나 어떻게 눈치를 채신 건가요? 가정부가 범인일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알렉산드리아를 찾은 할아버지, 할머님께.

 

제가 꺼내드린 이야기, 마음에 드셨을까요? 아니, 두 분은 호기심이 많으신 분이니 아직 덜 말씀드린 마플 양의 남은 대사가 궁금하실 것 같네요. 조카의 말에 마플 양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보다는 내가 인생 경험이 풍부하니까 알 수 있었던 게지."

두 분에게 마플 양의 이 대사를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물론 노인은 경험이 많다느니, 한 사람의 노인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느니 하는 말을 전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것을 몰라 알렉산드리아를 찾으신 건 아니실테니까 말이에요.

그럼에도 애거서 크리스티가 창조한 미스 마플. 그가 등장한 첫 번째 작품 <화요일 밤 모임>을 찾아드린 이유는 마플 양이 앉아 있는 의자 때문이에요. 그녀는 아주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 있어요. 그리고 오랜 시간 그곳을 떠나지 않죠. 정원을 가꾼다거나 집을 정리할 때를 제외하곤 말입니다. 그건 아마도 마플이 그만큼 나이를 먹은 노인이어서겠죠. 오랜 시간 서있을 만큼 근육도, 체력도, 뼈의 단단함도 없었으니까. 부부의 사례를 빌리자면 더는 그네를 세게 밀어줄 수 없으니까. 의자에 의지하고 있는 것일 거예요. 저는 이 설정이 몹시도 좋습니다. 잘나가는 추리 소설가의 분신에게는 굳이 필요하지 않았던, 이 설정을 크리스티가 마플에게 만들어 준 것이 너무나 좋습니다.

크리스티는 이 설정을 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할머니 탐정으로써 과거에 잘나가던 전사를 대신 넣어줄 수도 있었을 것이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더하기 위해 강인한 신체적 설정을 더해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크리스티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되려 그녀는 마플이 가장 마플 다울 수 있는 설정. 노인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 놓인 이에게 그에 꼭 맞는 설정을 더해주었습니다.

왜그랬을까요? 아마도 크리스티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겠죠. 그런 현실 속에서도. 서 있는 시간보다 앉아 있는 시간이 더 많다하더라도. 앉아서 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많고, 노인만큼 그것을 잘할 수 있는 이는 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두 분도 더 높이 그네를 밀 수 없음에 슬퍼하기 보다는, 그네보다도 높이 아이를 올려줄 수 있는 두 분만의 방법을 찾아보시면 어떨까요. 오직, 노인이라는 훈장을 지닌 이들만 할 수 있는 방법을 말입니다.

 

<유실물 보관소, 알렉산드리아> Y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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