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에서서

Happy Lunar New Year! 에 담긴 뜻_ 사이에 서서_ 황진영

새해를 맞는 우리들의 자세

2024.02.15 | 조회 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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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지난 주, 사무실에서 마주친 동료 E가 내게 설에 뭘 할거냐고 물었다.

“글쎄? 뭐 특별한 계획은 없는데, 떡국 끓여먹고 한국 어른들한테 화상통화해서 세배하면 되지 않을까?” 라고 대답하자 갑자기 고민을 쏟아놓는다. “아니, 돌도 안 된 아이한테 세뱃돈을 주신다는데,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계좌를 만들기도 뭐하고, 선물을 보내주신다는데 그것도 번거롭고. 설엔 또 뭘 해먹어야 하지? 요리도 할 줄 모르는데.”

100일도 안된 아이를 돌보며 출산휴가에서 복귀한 지 얼마 안 된 직원에게 ‘명절의 도리’ 같은 걸 운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어서 이렇게 말해줬다. “그냥 어른들은, 우리가 뭐라도 하는걸 보고 싶은걸거야. 돈으로 선물을 주는게 좀 이상해보이지만, 529 계좌 (미국에서 아이들 명의로 대학 등록금 명목으로 개설할 수 있는 세금감면 혜택이 있는 계좌) 일찍 만든다고 생각해. 우리도 처음 몇번은 주시는 돈 우리가 쓰다가, 아이 통장을 만들고 나니 쌓이는 금액이 꽤 쏠쏠하더라고.” 라고 말하며 명절 음식을 살 수 있는 가게를 알려줬다.


가족들은 모두 한국에 있고 미국엔 남편과 나, 아들, 이렇게 셋 뿐이라 특별히 찾아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다. 그래도 아예 모른 척 넘어가기는 뭐해서 냉장고 안 깊숙한 곳에서 떡국떡을 발굴했다. 떡을 하나하나 떼어낸 후 씻어서 채반에 올려놓고, 냄비에 코인 육수 한 알을 넣는다. 떡의 쫄깃한 식감을 싫어하는 두 남자를 위해 잘 저어가며 떡이 흐믈흐믈해질 때까지 끓이고, 팬에 계란을 풀어 얇게 지단을 부쳤다.

내가 끓인 떡국은 사진을 찍을 수 없는 비주얼이었기에, stock image를 사용했다. <br>Image by soscs from Pixabay
내가 끓인 떡국은 사진을 찍을 수 없는 비주얼이었기에, stock image를 사용했다. 
Image by soscs from Pixabay

떡국만으로는 뭔가 부족할까 싶어 냉장고를 다시 뒤져봤다. 돼지 갈비와 불고깃감이 보인다. 뭔가 명절 음식 같지는 않다. 한쪽 구석에서 국거리용 소고기 한 팩을 발견했다. 살짝 데쳐낸 후 압력솥에 갈비 양념과 함께 넣었다. 기름기가 없는 부위를 산 탓일까, 윤기가 흐르지 않는다. 마침 물엿도 떨어졌다. 아쉬운대로 자투리 야채를 썰어넣고 참기름을 살짝 올려본다. 아, 이번 상차림은 실망이다. 사진을 찍기에도 부족한 비주얼이라 얼른 그릇을 비우고 저녁상을 치웠다.

잠옷을 입고 있던 아이에게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세배를 해야하니 옷을 갈아입으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공수해온 한복을 입고 세배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열 살 쯤이었나, 사이즈가 작아진 한복을 이웃집에 물려주고는 더 큰 한복을 사오지는 않았다. 화상통화가 연결되자 아이는 익숙한듯 핸드폰을 거치대에 올려 카메라 앵글을 확보한 뒤 두 손을 마주잡고 능숙하게 세배를 한다. 

4년 전,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만들어온 복(福) 카드를 들고 세배를 했다. 사진 @황진영
4년 전,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만들어온 복(福) 카드를 들고 세배를 했다. 사진 @황진영

서툰 한국말로 “새해 복 많이 받아주세요.” 라고 했던 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세배를 하고 난 후 바로 일어나지 않고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덕담을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것까지 완벽하게 숙지했다. 혼자 계실 어머님이 걱정되었는데, 다행히 이모님이 방문해주셨다. 세배를 화상으로 했으니 세뱃돈을 입금해줘야하는것 아니냐는 농담을 주고 받았다. 저녁으로 떡국을 먹었다고 말씀드리자 어른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렇게 올해 설 맞이 미션은 모두 클리어했다.


며칠전부터 이메일에 “Happy Lunar New Year!”이라는 문구가 보였다. 다음주엔 설을 지내는 국가의 직원들이 모여 설 행사를 치를 예정이다. 글로벌 기업에 다니는 친구들도 Happy Lunar New Year!이라는 인삿말을 주고 받는다는 얘기를 했다.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대신 "Happy holidays!"를 쓰는 데 익숙해 진 것이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것 같은데, 이젠 설을 기념하는 인사도 기존에 쓰이던 Chinese New Year보다는 Lunar New Year(음력 설)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K-pop 아이돌 뉴진스의 호주 출신 멤버 다니엘이 팬들에게 “Chinese New Year에 뭐해?” 라고 물었다가 거센 항의를 듣고 사과문을 게재한 적이 있기도 하다. Lunar New Year라는 표현이 가장 올바른 표현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설을 기념하는 특정 국가가 아니라, 많은 나라를 아우를 수 있는 비교적 중립적인 표현이라는 데는 의견이 모이는 것 같다.

조금 더 세심한 배려를 하는 조직에서는 Lunar New Year라는 명칠을 사용한 후 각 나라별로 사용되는 명칭을 따로 언급해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한국에서는 설날(Seollal), 베트남에서는 Tết, 중국에서는 Chūn Jié(Spring Festival) 이라 불린다는 걸 알려주는 것이다.

각 해마다 12간지의 동물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하는 이미지를 쓰기도 한다. 브루나이 출신의 부모님을 둔, 캐나다 국적을 가진 직원이 보낸 이메일에 있던 용 그림이 그려진 Happy Lunar New Year! 배너 이미지를 보며 “이런걸 어떻게 알았지?” 하며 혼자 웃음을 짓기도 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각국의 설날 표기를 확인하다가 대표적 중국 문화권인 나라들, 이를테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등의 나라 외에도 브루나이나 수리남에서도 설을 기념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적잖이 놀랐다.

외국에 나와 살면서 “고향의 명절”을 기념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여기 사람들’이 ‘우리의 명절’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던 시절은 이제 옛 것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우리의 명절을 알아줄 거라면, 다른 나라의 이름을 빌려 말하지는 않아줬으면 좋겠어."라고 말을 꺼낼 수 있는 시대가 되어버렸다고나 할까?

물론, 외국에 나와 사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배려를 체감하며 살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처음 미국 생활을 시작했던 샬로츠빌에서는, 월병을 굳이 선물하는 사람들에게 어디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마워, 잘 먹을게.” 라는 인사를 건네곤 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지역은 각국 대사관도 있고, 각종 국제기구도 있는 터라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다른 문화를 대해야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내가 일하고 있는 기관에서도 설이나 추석을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하게 된 것이 아주 오래된 일은 아니라고 했다. 

핵가족을 넘어서 1인가구가 보편화된 요즘, 명절이란 건, 언제나 반가움과 동시에 귀찮음을 몰고 오는 것 같다. 누군가의 집에 굳이 모여서, 평소 식단과는 거리가 먼 기름진 음식들을 만들고, 서로 선물을 주고 받고, 안하던 대화를 이어나가려 애쓰는 그 시간들, 지나고 보면 소중하지만, 사실 그 기회를 만드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명절에 느끼는 ‘귀찮은 반가움’, 아니 ‘반가운 귀찮음’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감정일 수도 있겠다. 하루 하루 흘러가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가족, 친지와의 연결고리를 확인할 수 있다는건, 사실 그 기회를 잃기 전에는 체감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어디에 있든, 뿌리를 잊지 않고 살아가기’라는 과제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지 생성 Dall-E가 탑재된 챗GPT에게 세배하는 모습과 한국 음식 떡국을 그려달라고 했다.

이미지 생성 @Dall-E via Chat GPT
이미지 생성 @Dall-E via Chat GPT
이미지 생성 @Dall-E via Chat GPT
이미지 생성 @Dall-E via Chat GPT

아직, 멀었다.

챗GPT가 한 번에 우리의 세배와 떡국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도, 귀찮음과 수고로움을 조금 더 감수해서 우리의 ‘설날’을 기념해야겠다.


[사이에 서서] 황진영
미국 Washington DC에 있는 국제기구에서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우리’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공저 <세상의 모든 청년> ,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 를 썼습니다.
 [사이에 서서]를 통해 '어쩌면 우리일 수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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