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나가노 하루의 엄마는 정신장애인이다. 여덟 살이 되던 해부터 일하러 가서 집에 없는 아빠를 대신해 엄마를 데리고 조현병 약을 타러 병원을 다니고, 엄마가 망상으로 옷을 벗거나 소리를 지르고 집 밖을 배회할 때마다 곁을 지켰다.
어린 보호자였던 나가노 하루가 살아남기 위해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가 되어버리는 장면이다. 나 역시 ‘장애를 가진 부모에게서 나고 자란 비장애 자녀’라는 점에서 겹쳐서 떠오르는 시간들이 여럿 있었다. 엄마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통역을 하던 순간이며, 고관절 통증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천식으로 숨을 몰아쉬는 엄마를 업고 인파 가득한 길을 걷던 장면이며, 번갈아 입원하는 엄마 아빠를 병간호하던 순간까지… 정신장애인인 나가노 하루의 엄마와 뇌병변장애인인 우리 엄마는 너무나 다르지만, 비장애인 중심 세상에서 장애를 가진 몸으로 사는 것도 그들의 자녀로 사는 것도 쉽지가 않다는 사실을 또 다시 확인했다는 점에서 남다른 마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어린 나가노 하루는 알았다. 말하지 않는 편이 사는데 더 유리하다는 것을. 그간 받아온 부끄러움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말이다. ‘불쌍한 사람’이 되는 위험에 이어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라는 낙인까지 생기는 일이다. “부모가 장애인이니까…” 하는 사람들의 편견이 올가미가 되어 궁지에 몰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간 장애를 가진 당사자들이 직면하는 문제나 장애 자녀를 둔 부모의 양육 부담, 장애 형제를 가진 비장애 형제의 어려움에 대한 글은 제법 접했지만 장애부모를 가진 비장애 자녀에 대한 글은 드물었다. 모르긴 몰라도 어린 나가노 하루와 그리 다른 심정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반짝이는 박수 소리>와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의 저자 이길보라와 <아빠의 아빠가 됐다>의 저자 조기현의 글에 그나마 기대어 내 삶을 언어화해보려고 더듬거리고 있을 즈음 반가운 책을 만났다.
사람들이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볼 때 엄마는 어떻게 소리를 질렀는지, 본인은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의 삶 이후로 어떤 삶을 지속하고 있는지, 가장 아픈 기억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삶을 똑바로 마주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며 함께 울었다. 그리고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을 받아들이고 누군가에게 손을 뻗으려는 사람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었다. 이미 마흔이 넘은 저자가 말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굳이 짚어 말하는 심정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의 유년시절은 나가노 하루와 또 다른 모습이기는 했다. 부모님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사는 법을 택했으니까. 부모님이 장애가 있는데도 공부를 잘하고 친구와 잘 지내면 칭찬과 인기가 몇 배가 된다는 걸 터득한 쪽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는 안다. 그것도 팔할이 운이었다는 것을.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의 저자 나가노 하루와 달리 나에게는 기꺼이 달려와 도움을 준 어른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엄마가 아파서 병간호를 해야 한다거나 밥을 해주지 못할 때, 말하지 못할 때, 어린 내가 나서야 하는 상황을 이해하고 설명할 언어는 가지고 있지 못했다. 무엇보다 내가 돌봄의 주체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엄마 아빠를 두고 내가 어떻게. 더군다나 장애를 가진 몸으로 살아야 하는 엄마 아빠의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그들을 의지할 수 없었던 순간을 잊지 못하는 내 마음은, 엄마 아빠를 무시하고 미숙한 존재로 만드는 세상과 합세하는 것만 같은 가책을 느꼈다. 딸인 나를 지키고 보호하고 싶어 했던 그 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기를 선택한 나가노 하루를 응원하기 위해서 나는 오늘 말하기를 선택했다. 그의 말과 용기가 곧바로 묻히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의 경험과 성찰, 고통과 보람이 개인만의 문제로 남겨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또 다시 그를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고 마는 1/n의 시선으로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지나온 시간이라고 없는 듯이 빠져나올 수는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가노 하루가 침묵의 반대편, 성공신화와 싸우고 있는 모습 역시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이렇게 잘 자랐다는 극복서사를 만들기 위해 고통을 진열하고 편집하고 연출하고 싶은 욕망을 깡끄리 밟아버린 그의 모습이 미더웠다. 나가노 하루는 백 만 년 동안 살았던 아이에서 머물기를 거부했다. 사춘기에 들어서고 엄마의 증상이 누그러졌을 즈음, 혼자 힘으로는 현실에 발 딛고 서지 못하는 모습과 지금의 불안한 모습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진실하게 대면하고 드러내고 성찰해 나간다.
알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극복 불가능한 굴레를 낱낱이 드러내고 싸우는 나가노 하루를 보면서 이상하게 희망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장애를 가진 부모에게서 나고 자란 비장애 자녀의 경험을 이해하고, 돌봄의 대상인 아이이자, 돌봄의 부담을 지닌 존재인 영케어러의 현실을 알리고 그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나눌 방법을 함께 찾아보고 싶어졌다. 조기현이 추천사에서 쓴 것처럼, 누구나 차별 받지 않을 권리, 부모가 될 권리, 보호 받으며 자랄 권리가 존중받는 사회를 이야기하기 위해 ‘독서가 연대가 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싶어졌다.
‘보이지 않는 가슴’
그룹홈에서 일하는 보육사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그룹홈에서 일하는 나의 이야기가 당신과 우리의 이야기로 나누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영
아동그룹홈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입니다. 내 시간의 45%는 네 아이와 함께 그룹홈에서 보내고, 나머지 55%는 내가 낳은 두 아이와 남편이 있는 집에서 보냅니다. 집과 일터, 경계가 모호한 두 곳을 오가며 겪는 분열을 글쓰기로 짚어보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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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
읽기 힘든 글이 아닐까, 보기도 힘겨운 글이 아닐까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걸 정성껏 읽어주시고 감사하다고 남겨주신 말씀. 사실 매일마다 꺼내 읽습니다.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적었던 삶들에 일일이 관심을 가지고 곁에 서고자 하는 그 마음이 감사해서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답글 써주시던 날, 눈이 왔었지요? 여기는 밤에만 눈이 약간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룹홈 아이들은 자기 전에 창문을 열고, 깜깜한 하늘에 가로등 불빛이 비치는 부채꼴모양 아래서만 하얗게 점점이 내리는 모양을 보고 예쁘다고 하면서 설레했습니다.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눈을 받기도 하고요. "손에 닿자마자 비처럼 녹아요." 하면서 웃던 얼굴도 기억이 나네요. 이모, 아직 할 일도 많이 남았는데, 짜씩 빨리 좀 자라니까, 하던 제 마음도요. ㅎㅎㅎㅎ 서울에는 눈이 많이 왔다는데.... 부디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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