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되는 일을 겪거나 억울할 때 털어놓을 누군가가 떠오른다면, 그 누군가가 그런 당신에게 맞장구쳐 줄 거라고 믿는다면, 당신은 조금은 더 안온한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돌봄과 존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삶의 체감 온도를 분명 다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망을 사회과학에서는 ‘사회적 지지’라고 부른다. 사회적 지지는 에어백이나 안전매트처럼 인생의 크고 작은 고비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한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사회적 지지망이 탄탄한 사람들은 보다 행복하고, 우울이나 불안과 같은 정신병리의 발병율이 낮고, 신체적으로 건강하며, 심지어 수면의 질도 좋다.*
하지만 유난히 이 관계망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힘겨운 사람들이 있다. 특히 성장 과정에서 긴밀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경우, 따돌림이나 배신과 같은 상처를 가진 경우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자기만의 성에서 나오기 어렵다.
K는 마음이 통하는 이를 곁에 두는 운을 갖지 못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에 이르게까지 따돌림을 당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회사에서는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며 지냈지만, 그 이상은 선을 그었다. 퇴근 후에는 혼자 게임을 하거나 영상을 보며 보냈다. 그녀는 ‘혼자서도 잘만 지낸다’며, ‘관계는 다 소용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깊은 곳에서는 기댈 수 있는 누군가를 바라고 있었다. 단지 두려움이라는 높다란 담장에 가려져 있을 뿐이었다. 담장 너머 바깥을 흘깃거리면서도 ‘나를 진짜 알게 되면 결국 다 떠나버리고 말 거야.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라는 두려움에 갇혀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관계 그 이상을, 경험해 보지 않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이전에 겪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나를 못마땅해 했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와 비슷할 거라고 가정해 버린다. 의심과 걱정에 가로막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해 볼 용기를 내지 못한다. 타인에 대한 불신을 넘어설 수 있는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친밀한 관계로 뛰어들지 못하는 것은 신뢰하기 힘들어서이다. 상대가 믿을만한 사람일까, 하는 신뢰도 있지만, 나를 받아 줄 거라는 믿음이 흐릿해서도 있다. 좀 친해지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훅 거리가 느껴지는 그런 친구가 있었다. 분명 관심사도 많이 겹치고 대화도 잘 통하는 것 같은데 관계가 삐거덕거리면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어느 저녁, 그녀는 ‘너를 잘 모르겠어. 이 관계가 불편해.’라고 털어놓았다. 무슨 말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관계에 선을 긋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스르르 물러나버렸다.
한참이 지난 후 친구도 나도 마음이 말랑해진 어느 날, 그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랬다. 속 시원히 알려주지 않는 내 속내가 궁금했지만 선뜻 물어보지 못했고,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것에 대한 서운함만 쌓여갔다. 혼자 전전긍긍하다가 작정하고 문을 두드려 본 날이었다. 당황스러워하는 내 얼굴과 별다른 결론 없는 대화 끝에 그녀 역시 이 관계를 단념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했다.
나 또한 주관이 뚜렷한 그녀는 타인의 생각을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리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받아들여지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에 그녀 앞에서는 말을 고르게 되고, 감정을 표현할 때도 조심스러워졌다. 긴장하고 주저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호의를 신뢰하지 못해 관계에 선을 긋다가 결국 그 이상 가지 못했다.
상대 또한 ‘거절에 대한 불안’과 ‘받아들여지고 싶은 욕구’가 있는 사람이란 것을 우리는 자주 잊어버린다. 누구나 자신이 거절당할 위협에 놓일 때는 도망가거나 숨기도 하고, 이해받지 못할 때는 날카로워지기도 한다. 관계란 그렇게 취약한 두 사람이 만나 쌓아가는 것임을 기억할 때, 상대 앞에서 뾰족하게 굳은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다.
악의적인 의도로 접근하거나 성격장애 수준의 문제를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대부분 타인과 친밀해지고픈 욕구가 크고 작게 있다. 누구라도 그렇다. 그러니 일단 관계를 시작했다면, 상대에게 어느 정도의 호의가 있는 셈이니 그 한 줌의 호의를 믿고 차츰차츰 관계를 더 깊이 나가보는 것이 필요하다.
무턱대고 믿어보라는 것이 아니다. 그가 타인의 입장을 얼마나 존중하고 신경 쓰는 사람인지, 지나치게 변덕스럽진 않은지를 살피며 시간에 따라 신뢰의 크기를 늘려갈 필요가 있다. 혹여나 관계에서 계속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고 불안하다면, 잠시 멈추고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다만, 매번 모든 사람이 나에게 관심이 없고 친구가 될 마음이 없다고 결론짓게 된다면, ‘초점’이 문제일 수도 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무언가 새로운 장면을 보거나 소리를 듣거나 냄새를 맡게 되는 등 예상치 못한 자극을 만날 때 그 자극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을 정향 반사(orienting reflex)라고 한다. 이러한 본능적인 자동 반사 덕분에 우리는 위험한 상황이 닥쳤을 때 빠르게 감지하고 피할 수 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어떤 자극에 의식적으로 초점을 둘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다. 지금 이 글에 주의를 두기로 선택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의식적으로도 정향하며 살아간다.
의도적으로 원하는 쪽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주의는 자동적으로 익숙하고 본능이 이끄는 쪽으로 향하게 된다.** 관계에서 아픔이 많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상대의 실망한 눈빛이나 심드렁한 표정과 같은 부정적 단서로 주의가 옮겨간다. 순식간에 ‘역시 나에게 관심이 없어. 누가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하겠어’라고 생각하며 마음이 작아져 버린다.
하지만 상대에게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잘 살펴보면 나를 만났을 때 보냈던 환한 미소, 보고 싶다던 메시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던 호응 같은 것도 있다. 의식적으로 정향한다는 것은 내 불안과 반대되는 자극에 집중해 보는 것이다. 무심한 표정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 잠깐 스친 다정한 눈빛 같은 것에 주의를 둘 수도 있다. 1시간 늦은 답문 같은 것보다 늦게 봐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 사람의 진심에 초점을 맞춰보는 것이다. 그럴 때 관계 속으로 들어갈 용기를 얻는다.
상태가 좀 더 괜찮아지면, 조금 덜 우울해지면, 자신감이 생기면 담장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관계를 위해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는 없다. 여전히 타인이 나를 받아주리라는 확신이 없고, 사람들과 비교하며 내 부족함이 커 보이고, 긴장감에 도망가고 싶지만, 한 걸음 가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불안감은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상대 또한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때로 우리의 진심을 몰라주고 상처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가능성까지 끌어안고 다가가보면 좋겠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며, 불완전한 존재 곁에 서보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연말이라는, 갑작스러운 안부 인사가 어색하지 않은 시절이 돌아왔다. 누군가가 떠오른다면, 이 시절을 핑계 삼아 연락을 해보면 어떨까. 상대가 나에게서 호의 어린 단서를 쉬이 찾아 정향할 수 있도록 그가 궁금하다는 표정, 온화한 말투, 다정한 인사를 건네어보면 좋겠다. 상대가 나를 받아들여줄까 걱정하는 마음을 넘어 내가 상대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되어줄 때, 관계는 돛을 달고 더 멀리 나아갈 것이다.
참고문헌
*Heinze, J. E., Kruger, D. J., Reischl, T. M., Cupal, S., & Zimmerman, M. A. (2015). Relationships among disease, social support, and perceived health: A lifespan approach. American Journal of Community Psychology, 56(3-4), 268-279.; Heinze, J. E., Kruger, D. J., Reischl, T. M., Cupal, S., & Zimmerman, M. A. (2015). Relationships among disease, social support, and perceived health: A lifespan approach. American Journal of Community Psychology, 56(3-4), 268-279.; Kent de Grey, R. G., Uchino, B. N., Trettevik, R., Cronan, S., & Hogan, J. N. (2018). Social support and sleep: A meta-analysis. Health Psychology, 37(8), 787.
** Pat Ogden & Jenina Fisher (2021). 감각운동 심리치료. 이승호 역. 하나의학사.
* 글쓴이_이지안
여전히 마음 공부가 가장 어려운 심리학자입니다. <나를 돌보는 다정한 시간>,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를 공저로 출간하였고, 심리학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며 상담을 합니다.
캄캄한 마음 속을 헤맬 때 심리학이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습니다. 같은 고민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닿길 바라며, 심리학을 통과하며 성장한 이야기, 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일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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