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다. 직장인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성과 평가 및 내년 계획 작성 및 면담을 마쳤다. 매해 겪는 일에 어쩌면 그리 매번 긴장하게되는지 모르겠다. 이 과정을 거칠 때 가장 힘든 단계는 단연 자기평가(self- evaluation)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월급보단 많은 일을 한 것 같은데, 막상 쓰려니 찔린다. 너무 부풀려서 썼다고 오히려 미운털 박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렇다고 그럭저럭 잘 지냈습니다 라고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 다니는 기관에서 3년째 일하고 있다. 첫 해 성과평가 면담을 기억한다. 총 10분의 면담시간 동안 유닛 매니저는 내 인사고과 점수, 5점 만점의 3.5점이 주는 의미에 대해 여러 각도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만점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4점이 넘어가는 점수는 부서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양적, 질적 성과를 낸 사람에게 돌아간다고, 기본적으로 하기로 한, 연초에 세웠던 계획과 기대되는 업무를 모자람 없이 이행한 사람은 3점을, 거기 못 미치는 사람은 3점 이하의 점수를 받는다고 했다. 면담에 배석한 팀장님도 유닛 매니저가 네게 3.5를 주기 위해 얼마나 가열차게 “ 싸워왔는지”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면담 내내 답답했다. 5점 만점에 3.5면 100점 만점에 70점, 딱히 자랑스러워 할 만한 점수는 아니지만, 어차피 입사한 지 얼마 안되는 기간 동안 조직을 뒤흔들만한 성과를 낼리가 만무하니 그들의 설명대로, 내게 맡겨진 업무를 충실히 해냈다는 거면 충분했다. 입사한 지 얼마 안되는 내게 3.5를 부여하기 위해 “싸움”을 불사한 유닛 매니저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면담 종료가 가까워질수록 답답한 마음은 커져만갔다. Perfect! Awesome! Great!이 난무하는 미국 직장 생활에서 좀처럼 듣기 힘든, area to improve에 대한 내 상사의 솔직한 평이 궁금했는데, 면담 시간의 80프로를 점수 체계 설명에 쓰다니, 시간 낭비아닌가.
서운했던 첫 성과평가의 장면을 얼마 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었다. 최애 조직심리학자인 애덤 그랜트(Adam Grant)가 우리 기구 커리어 강연에 와서 추천해 준 에린 메이어(Erin Meyer)의 <The Culture Map>을 읽다가.문득 유닛 매니저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싶어졌다.
미국인이 다수인 팀을 이끄는 프랑스 출신 파이낸스 디렉터 Sabine Dulac은 성과평과 후 새로운 상사인 Jake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Dulac이 성과평가를 너무 모질게 이끌었으며 평가 피드백 또한 부정적인 측면만 부각시키고 직원들의 노력과 성과를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Dulac은 억울했다. 미국 문화의 특징이 “단도직입”아니었냐며,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솔직담백하고 직접적인 의사표현을 중요하게 여기는 미국문화에 맞췄을 뿐인데, 아니 왜?
문화권에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건설적인 피드백’을 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건설적인 피드백은, 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미국 문화에 맞춘다고 솔직한 돌직구 피드백을 날렸다가 후폭풍을 맞은 Dulac의 사례를 읽으며, 프랑스 출신인 내 유닛 매니저가 면담 시간의 80퍼센트를 성과평가 점수 체계 설명에 할애한 건, 어쩌면 나를 위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뤄낸 성과를 조목조목 짚어주지 않는, “이것만 고치면” 으로 시작되는 피드백에 익숙한 나는, 아직도 솔직한 피드백에 목마르다. 잠깐, 근데, 나, 솔직한 피드백을 받아들일 준비가 진짜로 되어있나?
<The Culture Map>의 묘미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피드백, 설득, 의사결정, 신뢰, 합의 도출, 시간 관리 등의 상황에서 보이는 스펙트럼을 나라별로 제시했다는 데 있다. 한국의 예도 자주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피드백을 전하는 방식에 따른 차이를 다룬 챕터에서 한국은 평가에 있어 “직접적이지 않은 부정적 피드백(Indirect negative feedback)” 이 강한 편으로 분류 되었다. 처음엔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학교든, 직장이든 늘 불려가서 혼났던 기억이 가득한데, 한국이? 진짜? 라고 중얼거리며 책장을 넘겼다. 부정적 평가를 직접적으로 하는 것이 기대된다는 네덜란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던 한국인 Kwang의 안타까운 사례를 읽으며 작가의 분석에 조금은 동의하게 되었다.
Kwang은 로마에 가서 로마법을 따르는 마음으로 네덜란드에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분명하게” 의사 전달을 해야 한다는 현지에 오래 산 한국인 선배의 충고를 따랐다. 네덜란드 직원들이 보여준 “무례하고 거만한 피드백”의 공식을 충실히 따랐다고 억울해 하는 Kwang에게 저자인 Meyer 박사는 상반되는 문화권의 사람들을 대할 때, 익숙하지 않은 방식을 무턱대로 따라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애덤 그랜트의 신작 <Hidden Potential>에서 약간의 실마리를 찾은 것 같다. 책의 서문은 투팩(Tupac)의 시, “The Rose That Grew From Concrete”를 인용한다.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와중에 자연의 법칙따윈 가볍게 무시하고 콘크리트에서 자라난 장미가 오랫동안 살아남기를 바란다는 투팍의 말처럼, 할렘가에 위치한 중학교 체스팀 Raging Rooks는 명문 사립 Dalton의 체스팀을 이기고 미 전역 체스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애덤 그랜트는 이 기적같은 승리가 체스팀 지도교사인 자메이카 출신 이민자 모리스 애슐리(Maurice Ashley)의 상식을 뒤엎는 지도방식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모리스의 지도방식은 소질 있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기는 방법을 연마하도록 하는 일반적인 체스 지도방식과는 시작부터 달랐다. 체스가 처음인 아이들을 모아놓고 체스의 기본기부터 가르친 것이 아니라, 승부가 나기 직전의 체스 판을 두고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는지, 여러가지 방법을 보여준 후 서로 가르치게 했다. 아이들은 내 앞에 있는 상대를 이기는 것보다, “이 경기를 이기는 법”을 함께 고민하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체스팀에서 체스보다 인생을 배웠다는 아이들의 소감을 읽어내려가며 어쩐지 뭉클해졌다.
애덤 그랜트는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로 “누구에게나 발견되지 않은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리더가 가져야 할 덕목은 무조건적인 칭찬과 응원만을 퍼붓는 치어리더도,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신랄하게 꼬집는 평론가도 아니라며, 리더는 팀원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발견하고, 끌어낼 수 있는 코치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성장하고 싶다. 내게 모자란 부분이 뭔지 쏙쏙 잘 뽑아낸 후, 상처 받지 않게, 그러나 어제보다 나은 나로 키워줄 그런 코치, 어디 없을까?
황진영
미국 Washington DC에 있는 국제기구에서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우리’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공저 <세상의 모든 청년>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신간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 에 세 편의 글을 담았습니다. [사이에 서서]를 통해 '어쩌면 우리일 수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