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봄부터 엄마들 셋이서 경주 구미산 아래 300평 밭을 가꾸게 되었다. 옥수수, 오이, 가지, 토마토, 수박, 딸기, 바질과 각종 허브들을 심어 놓고는 첫해에는 비가 한 방울도 안 와서 우리들 마음은 타들어 갔다. 딱히 수도 시설이 없어서 밭 아래로 흐르는 개울가에서 손으로 물을 일일이 길러 와서 줘야 했다. 하루에 적어도 오십 번은 오르락내리락 해서 물을 주고 나면 팔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지친 몸을 이끌고 주말이 오면 “오늘은 쉬자! 무조건 쉬고 월요일에 봐요.” 하고 헤어져 놓고는, 일요일에 혼자 몰래 밭으로 나가보면 모두들 약속이라도 한 듯 와서 물을 주고 있었다. 자식 걱정하듯 밭에 심은 작물들이 마음이 쓰였던 것이다. 긴 가뭄 속에서도 산은 그저 말없이 맑은 물을 흘러 보내주고 있었다.
남편과 내가 인도 오로빌에서 이렇게 경주로 정착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자연에서 놀 수 있는 어린이집 때문이었다. 오로빌에서 매일같이 흙발로 놀던 아이들이 한국에서 지내기엔 시골이나 산속 아니고서는 도저히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친정 엄마가 가까이 계시는 곳에서 사는 게 여러모로 좋겠다 싶었다. 낮은 산 아래, 언덕배기에 마당 딸린 촌집을 어렵게 구했다. 마당에는 촌집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감나무와 엄나무가 지붕보다 높이 서 있었다. 집은 낮고 작긴 했지만 내부 인테리어를 조금만 바꾸면 웬만하겠다 싶어 기대에 잔뜩 부풀었었다. 하지만 결국 그 비용으로 마당에 깔려 있는 답답한 콘크리트부터 걷어내기로 했다. 흙이 필요했다. 꽃과 나무를 심고 작은 텃밭을 만들었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기 좋은 땅이 우리에겐 먼저였다.
여행용 트렁크 2개를 바닥에 펼쳐 놓고 냉장고 하나에 세탁기 하나로 살면서 간이용 정원 테이블을 책상 삼아 남편이 직장을 구하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햇살 가득한 마당에는 푸릇푸릇한 텃밭 작물이 자라고 온갖 꽃들이 피어나 꿀벌과 나비도 찾아왔다. 아이들도 어린이집에 서서히 적응을 하고 있었고, 다행히 남편도 직업을 얻게 되었다.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누리며 시골에서 사는 삶은 평온했다. 그럼에도 나는 어딘지 모르게 허기가 졌다. 친정 엄마 말고는 연고 하나 없는 경주에서도 집안과 아이들을 돌보는 일 말고는 특별히 내가 꿈꾸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갑자기 서글퍼졌다.
어린이집에서 만난 몇몇 엄마들과 친해져서 겁 없이 마을 카페를 시작했다. 그런데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결국 일 년도 채 못 가서 문을 닫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마음에 상처가 났다. 더욱 공허해진 나는 자연농법으로 살고 있는 지인인, 농부님을 만나러 홍천으로 무턱대고 달려갔다. 더 솔직하게는 그의 논밭이 그리웠다. 그 어떤 마음이 되어도 쉽게 져버릴 수 없는 그리고 변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그의 살아 있는 땅이 보고 싶었다. 그 땅에는 작물을 더 빨리 자라게 하려고 화학비료를 넣지 않고, 성가신 잡초를 없애려고 제초제도 뿌리지 않는다. 당연히 농약도 치지 않고 심지어 땅도 갈지 않는다. 기계 없이 호미 하나로 손과 발과 마음으로 짓는 농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논밭에서는 작물이 생명력 넘치게 잘 자란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울린 건, 이런 행위가 단순히 건강을 위한 친환경 농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구 문명에 대한 대안적 삶이면서, ‘인간을 완성시키는 활동’, ‘자신의 진리를 찾아내는 활동’이라는 점이다.
삼일 동안 나는 산속 그의 나무집에서 한가롭고 소박한 시간을 보냈다. 한번은 농부님 부부와 함께 산을 올랐다. 마치 숲속 작은 동물이 되어 사람은 다니지 않는 듯한 산길을 오르다가, 갑자기 고비(고사리와 비슷한 여러해살이풀)를 캐시는 걸 보고 그만 가슴이 울컥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눈을 감고 짧은 기도를 마친 뒤, 재빠르게 낫으로 뿌리 주변부 흙을 슥슥 도려내어 꺼낸 후, 다시 정성껏 흙으로 메우고 그 위에 낙엽까지 덮어 주는 모습을 보았다. 마치 산 어머니의 살을 도려내는 듯한 비장함과 그렇게 내어 주심에 감사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내려오는 길에는 산에 버려진 쓰레기를 함께 주우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배웠다. 그가 진실되게 자연을 받들어 모시는 마음을 말이다. 시골에서 자연을 누리기만 했던, 사람들과 엇갈린 복잡한 마음 틈바구니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지 몰랐던 내가 몹시 부끄러워졌다.
농부님은 틈틈이 번역한 책이 곧 출간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알게 된 야마오 산세이의 <어제를 향해 걷다>라는 책이 드디어 내 손에 안겼다. 와세다대학에서 서양철학을 공부하다 한때 인도와 네팔로 순례 여행도 다녀온 도쿄 출신 야마오 산세이가 일본의 규슈 남쪽 야쿠섬에서 터전을 잡고 농사를 짓고 집을 돌보고 섬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쓴 산문 모음집이다. ‘내가 바라는 자식들의 삶’이라는 대목의 글에서 그의 네 명의 자식에게 전하는 말이 있는데, 그중 마지막 딸에게 하는 말은 마치 내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너는 내 뒤를 이어 농부이자 시인이기도 한 삶의 여행을 여성으로서 해 볼 생각은 없을까. 산다는 것은 곧 자연으로 영원히 돌아가는 것이라는 메세지를 나와는 다른 언어로 이야기해 줄 수는 없겠니?”
나는 우연찮게 마을 카페에서 밭으로 내려앉게 되었다. 그런데 이 우연은 나를 살리기 위한 필연 같았다. 다들 농사가 처음인 엄마들이 머리를 맞대고 책으로 농사를 배웠다. 단일 작물이 아닌 여러 작물들이 조화롭게 서로 살리는 ‘섞어짓기’를 기본으로 한다. 아이들과 놀기 위해서 엄마들이 시작한 일이었는데, 흙을 보자 본능적으로 씨앗을 뿌리고 생명이 올라오는 것을 기다리고 흙을 만지는 행위에서 우리들의 마음이 서서히 회복됨을 느꼈다. 땅에서의 기쁨은 아이들보다 정작 우리가 누리고 있었다. 이렇게 나의 밭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야마오 산세이는 말한다.
“나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밭이지만 밭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땅이다. 밭을 통해, 혹은 밭을 넘어서 직접 산이나 들을 통해 더욱 깊이 땅의 본질을 마주해 가는 여행이 내가 이제까지 해 왔고, 앞으로도 하고 싶은 여행이다. 그것은 곧 나 자신에게 정착해 가는 여행이기도 하다.”
나는 그동안 시골에서의 삶을 막연히 동경해 왔다. 그리고 어떤 글로 내 마음을 담아내야 할까 고민했었다. 나는 대도시에서 빠르고 복잡하게 돌아가는 삶에서 마음을 쉽게 뺏기고 곧잘 헤매곤 했다. 어딘가 잘못 돌아가는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데 정작 나는 내 삶도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야마오 산세이는 그저 농사나 자연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는다. 이 세상이 나아갈 길에 대해서 끊임없이 사유하고 “이 사회의 삶의 방식에 의문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찾고 있는 이” 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이 시대를 비판하기도 한다. “우리 시대의 문명은 얼마 남지 않은 숲조차 베어내며, 막 태어난 갓난아이처럼 싱그럽게 빛나는 초승달이 뜨는지 지는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어디를 향해 진화 발전해 가려고 하는 것일까?”
나는 문명의 발달이 가져온 편리함에서 조금은 불편해도, 잃고 싶지 않은 어제의 지혜와 이치를 소중히 여기며 살고 싶다. 농부이자 작가이자 구도자로 사는 점이 꼭 닮은 두 사람을 통해 내 마음 밭에 심어야 할 소중한 씨앗을 전해 받은 것 같다. 세상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맑은 눈빛으로, 자연이라는 ‘본래 고향’으로 가는 길을, 내게 주어진 밭에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 그리고 소박하게나마 욕심을 부려 보자면 나 역시도 밤에는 작은방으로 돌아와 자연 속에서 보낸 마음을 나만의 언어로 잘 옮겨내고 싶은 바람이다.
창밖으로 비가 오면 이젠 비님이 오신다 감사하고 밭에서 내어준 작물을 길렀다 하지 않고 주셨다고 말하리라. 산을 오를 땐 산 어머니라 부르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 수 있다면 지구에게 조금은 덜 폭력적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기후위기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 이 시대에 여느 때 보다 더 절실하게 다가온 야마오 산세이의 이야기가 조화로운 삶을 찾는 사람들에게 더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
글쓴이 : 윤경
생태적인 삶과 자연농 농부로 사는 게 꿈입니다.
마음을 어루만지며, 보다 나다운 삶을 살려고 합니다.
여덟 살 여자아이, 여섯 살 남자아이, 남편과 시골에서 살림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yoonirise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