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4월 28일, 고등학교 3학년 봄소풍을 간 날이었다. 그날 봄소풍 장소가 어디였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뒤늦게 나타나 울음을 터뜨리던 한 아이의 모습은 평생 잊을 수가 없게 되었다. 한 끝 차이로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사고를 모면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눈물을 흘렸다. 자기가 놓친 버스에 탄 사람들이 사고로 죽은 것 같다는 것이었다.
자기가 죽을 뻔해서 놀랐다는 것인지, 사고를 모면해서 다행이라는 것인지, 그 자리에서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안됐다는 것인지, 우는 이유를 헤아리는 것조차 복잡하게 만드는 이야기였지만, 사람들이 죽었을지도 모르는 사고가 일어났다는 부분에서는 그만 가슴이 내려앉아버렸다.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였다. 1995년 4월 28일 오전 7시 50분쯤, 대구 달서구 상인동 영남고등학교 앞 네거리 지하철 공사 현장에서 도시가스관이 폭발했다. 폭발음과 함께 6층 건물 높이의 불기둥이 치솟았고, 등굣길 학생 42명을 포함해 101명이 숨지고 202명이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무너진 세상
가스 폭발이 일어나던 그 시각, 나 역시 봄소풍 장소를 향해 버스를 타기는 했지만, 사고 현장과는 한참 떨어진 곳을 달리고 있었다. "상인동 쪽에 사는 사람은 지금 당장 앞으로 나와라" 하고 외치던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또렷하다.
사고 두 달 후, 6월 29일에는 서울의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TV만 켜면 폐허가 된 현장에서 사상자가 나왔고 가족을 찾아 울부짖는 장면이 줄을 이었다. 그보다 9개월 전인 1994년 10월 21일에는 멀쩡하던 다리가 무너져 내려 수십 명이 죽고 다친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 있기도 했다. 그러니까 1년도 안 되는 사이, 천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참사가 반복되고 있었다.
누군가 지척에서 목숨을 잃는 사이, 누군가는 목숨을 건졌다며 간증을 했다. 가족을 잃은 누군가가 통곡을 하는 사이, 누군가는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 사이에서 '죽을 뻔해서 놀랐다는 것인지, 사고를 모면해서 다행이라는 것인지, 그 자리에서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안됐다는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내 마음은 혼란스럽고 부끄러웠다. 그나마 친구들과 뉴스에서 들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시간은 위로가 되었다.
어떻게든 몸에서 말을 밀어내고 나면 형용하기 어려운 충격이나 공포, 불안감 같은 것들이 덜어졌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오로지 입시에만 집중해야하는 고3 시절이었지만 '누가 어떤 식으로 위기를 넘겼다더라'는 식의 소식을 들은 날은 마음이 조금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다행이다"는 말을 친구들과 몇 번씩이고 반복하고 나면 왠지 모든 것이 괜찮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고는 했기 때문이다. 너무 쉽게 안도하는 대화 방식 때문에 또 다시 죄책감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고 기사는 조금씩 잦아들었다. 거리가 통째로 무너지고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는데 세상은 다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돌아가게 되었다. 나의 일상 역시 그랬다. 그렇게 큰 사고를 지나고도 학교, 집, 교회를 오가던 나의 일상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일로 다시 수다를 떨고 싶지도 않았다. 사고를 직접 목격하거나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경험이 없는 내가 그 일을 다시 언급하는 것은 죄스러운 일이라는 생각도 했다.
기억을 공유하는 일
그러던 어느 날, 김보라 감독의 자전적 영화 <벌새>를 보게 되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방앗간집 딸 '은희'가 주인공이었다. 1990년대 주택이 가득하던 동네가 아파트로 재개발되는 현장이라던가, 트램펄린이라던가, 사이좋게 지내던 친구와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싸우는 장면이라던가, 전을 굽던 엄마의 뒷모습이라던가, 중학교 2학년 은희가 보내던 지극히 일상적 순간들이 스크린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잊고 지내던 그 시절 나의 기억들이 장면장면 함께 엮이며 호응했다.
그리고 1994년, 은희는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소중한 한 사람을 잃어버렸다.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하고 마음을 열게 하던 동네학원 한문 선생님 '영지'였다. 은희는 사고 현장을 직접 찾아갔다. 사방에 둘러놓은 접근금지 테이프를 넘어서서, 선생님을 집어삼킨 그곳을 똑바로 응시했다. 은희의 시선을 통해 무너진 성수대교가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났다. 울음이 터져버렸다.
시간이 지나 없어져 버린 줄 알았던 1995년 4월 28일, 내가 겪은 그날의 기억들이 또 다시 연결되기 시작했다. 소풍을 가서 보았던 친구의 울음도, 가슴을 졸이며 지켜보던 뉴스도, 쉬는 시간 내내 친구와 이야기를 하며 진정시키고 싶었던 불안한 마음도, 무어라 특정할 수 없는 감정으로 내내 시달려왔던 죄책감도, 없는 듯이 가만히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침묵하기만 하던 그 복잡한 순간들까지 찬찬히 꺼내어 들여다보았다.
그토록 많은 이들을 잃은 이후에도 대구 지하철 참사,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오송 지하차도 참사까지 사회적 사건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과거사들이 유족들만의 아픔으로 좁아지고 있어서였을까. 시간을 거슬러 당신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내 마음이 무언가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하게 되었다. 나일 수도 있었을 당신의 시간으로, 그리고 나의 것인 줄만 알았던 '우리'의 삶으로 지금을 정성껏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소망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와 우리의 삶을 좀 더 책임감 있게 연결해 보고 싶어졌다.
‘보이지 않는 가슴’
그룹홈에서 일하는 보육사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그룹홈에서 일하는 나의 이야기가 당신과 우리의 이야기로 나누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영
아동그룹홈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입니다. 내 시간의 45%는 네 아이와 함께 그룹홈에서 보내고, 나머지 55%는 내가 낳은 두 아이와 남편이 있는 집에서 보냅니다. 집과 일터, 경계가 모호한 두 곳을 오가며 겪는 분열을 글쓰기로 짚어보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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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잇
나와 우리의 삶을 책임감 있게 연결하길 함께 기도하며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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