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온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_독일에서 살게 될 줄은_메이

2023.09.22 | 조회 1.32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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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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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이 넘도록 서울의 한 동네에서 쭉 나란 나에게 고향이라는 말은 그다지 와닿지 않는 단어였다. 내게 서울은 태어나 자란 곳이기는 하지만 매일 똑같이 학교를 다니고, 회사를 다니는 반복적인 일상의 장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방학이 되면 본가로 돌아간다는 친구들이 “본가에서 푹 쉬고 왔더니 힘든 마음들이 한결 좋아졌다"고 말할 때마다 궁금하기도 했다. 회색빛의 입시를 지나 진로 고민으로 한숨, 회사를 다니면서도 여전히 한숨 푹푹 쉬며 살아가는 나에겐 훌쩍 떠나 푹 쉬다 올 고향같은 건 없는걸까. 가끔 가슴이 너무 답답할 땐 제주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서 며칠씩 푹 쉬고 오기는 했지만 여행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고향의 느낌이 늘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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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독일에 온 지 2년이 넘어가자 이제야 내게도 고향이 어떤 의미인지 선명하게 와닿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동안 한국을 한 번도 방문하지 못하고 멀리서 소식만 들을 뿐인데, 한국 드라마를 보다가 아는 골목과 간판들이 보이면 남편과 호들갑을 떨기 시작한다. 우리 연애할 때 손잡고 걸었던 거리다, 퇴근하면 꼭 저기를 들렀는데 하면서 추억 삼매경에 빠진다. 단순히 익숙한 곳이 보여서 반가운 감정 이상의 애틋함도 생기곤 한다. 어느 정도 독일 생활에 익숙해졌다곤 하지만 여전히 외국인으로써 겪는 낯선 상황과 이방인으로써의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알 수 없는 외로움이 들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도 익숙한 동네들이 생겼고, 이웃들이 생기면서 오가다 인사를 하기도 하고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럴 때면 어쩐지 이 곳에 적응해서 잘 지내는 것 같아 스스로가 뿌듯하고 대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눈에 띄는 동양인이다보니 예기치 못한 말들로 상처를 입기도 한다. 종종 나에게 익숙한 동네에서조차도 뜬금없이 ‘칭챙총(동양인을 비하하는 말)’ 같은 말을 듣기도 하는데, 나의 고향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노골적인 비아냥은 언제 들어도 당황스럽다. 이제는 고작 그런 말들로 상처를 받는 단계는 지났지만, 가끔 길가다 낯선 사람이 말을 걸면 약 2초 정도는 강한 경계를 하며 나를 공격하는 말을 하지는 않을까 긴장하는 것이 습관이 됐다. 그리곤 이런 나를 자각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불쾌하다기보다는 좀 쓸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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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외로움이나 쓸쓸함이라는 감정이 떠오르는 건 나의 고향인 서울에서 살아온 내 모습이 지금의 모습과 대비되는 부분들이 있어서인 것 같다. 나의 모국어로 의사소통을 하며, 누군가 말을 걸더라도 두려움없이 대답할 수 있고, 단호하게 거절하거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곳이 주는 편안함이 당연했던 시절에는 몰랐다. 언제나 누군가와 대화할 때 한 번 더 단어를 고르고, 혹시나 실수를 할까 몇 배는 더 친절하려 노력하고, 외국인이라고 손해를 보는 건 아닐까 바짝 긴장한 상태로 사는 것이 익숙하다보니 긴장감없이 생활을 하던 시절 자체가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심지어 서울에서는 어딜가나 ‘똑부러진다'는 소리를 듣던 내가 독일에 와서는 ‘착하고 친절하다'는 말을 더 많이 들을 때면 성격이 좋아진 게 아니라 똑부러지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 내 능력 부족인 것 같아서 괜히 주눅도 들곤 했다.

누구나 고향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감정들이 있을 것이다. 편안함, 익숙함, 자연스러움, 치열하게 경쟁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해맑았던 모습들. 나는 이런 단어들이 서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서울만큼 치열하게 경쟁하고, 걱정 많고, 주눅들게 하는 도시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서울은 ‘고향’이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도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타지 살이 몇 년만에 나에게 서울은 그리운 고향이 됐다.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의식조차 할 필요 없던 모국어를 사용하는 것, 길 가다 인종 차별을 당할까 걱정할 필요 없이 흔하디 흔한 군중 속의 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 치열하게 경쟁하고 일했지만 끝나고 맥주 한 잔 할 친구들이 있는 곳, 가족들과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그 공간은 나에게 고향 그 자체였다는 걸 느낀다.

부쩍 요즘 고향을 그리워하던 중, 얼마 전 남편과 그리스로 여행을 다녀왔다. 그 곳은 정말이지 단 하나의 글자도 알아볼 수 없는 낯선 타지였다. 관광지는 훌륭했고 음식도 맛있었지만 단 한 글자도 읽을 수 없는 도시를 걷는 느낌은 묘했다. 그나마 그리스어를 조금 읽을 줄 아는 남편이 더듬더듬 힌트를 찾아내긴 했지만 구글 맵이 없으면 우리는 순식간에 미아가 됐다. 겨우 2년 남짓 독일어 좀 썼다고 가뜩이나 못하던 영어는 더 엉망이 됐고, 뚝딱거리며 반토막이 된 영어로 의사소통을 겨우 이어갔다. 인사 한 마디 현지어로 건네는 것도 어색한 도시에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환승을 위해 뮌헨 공항에 도착했을 땐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 어색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독일어가 이렇게 반가울 수 있다니. 독일인들 특유의 겉으로는 딱딱해보이지만 친절한 인사를 보는데 웃음이 나왔다. 그 사이에 독일어에, 독일인에, 독일 문화에 익숙해졌구나. 한국과 비교하면 말할 수 없이 불편한 타지라고만 생각했는데, 정말로 낯선 곳에 다녀와보니 불편한 줄만 알았던 외국에서 나도 많이 의지를 하고 있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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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고향이라는 말은 같은 곳에 머무는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선물같다는 생각을 했다. 낯선 곳에서 고군분투하며 완전히 스며들지 못하는 이방인의 신세를 견뎌낸 사람에게 주어지는 작은 보물 같은 건 아닐까. 낯설어하고 힘들어하는 시간동안 너무 지치지 않도록 기댈 곳을 내어주다가도, 조금씩 새로운 곳에 의지하게 되고 경험을 쌓아가면서 두번째, 세번째 고향을 만들어가는 것이 꼭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떠올려보면 꼭 도시만이 아니라, 학교나 회사를 옮겼을 때, 졸업을 하고 새로운 시작을 했을 때 지나온 시간들은 아득히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미화되곤 한다. 나에게 익숙해진 것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아마 떠나온 모든 사람에게 고향이란 그런 것일 테니까.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 그리스의 화려한 관광지와 대비되는 독일의 조용한 시골 마을을 걸으며 마음이 점차 편안해졌다. 가로등도 켜지지 않아서 깜깜했던 작은 동네의 늦은 , 집으로 돌아오자마자집이 최고다!”하며 쓰러지듯 누워버린 곳도 언젠간 그리워질 나의 고향이 되겠지. 삶이 지루하고 무기력할 낯설고 어색한 환경으로 나를 던져버리는 것도 도움이 있다. 떠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그리움이라는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삶의 순간순간을 긍정하는 힘을 얻게 될테니까. 회색빛으로 떠올렸던 지긋지긋하게도 복잡하고 도시 서울도, 지루한 시골이라고만 생각했던 지금 독일의 작은 동네도, 낯선 곳에서 바라보면 그저 그리운 나의 공간이 된다.

 

* 메이 - 유학생 남편과 함께 독일에서 신혼 생활을 꾸리며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이야기. 프리랜서로 일하며, 독일어를 배우면서, 일상의 풍경들을 낯선 시선으로 관찰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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