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 내가 일하는 그룹홈에서 사회복지시설평가를 받았다. 보건복지부와 한국사회보장정보원이 삼 년에 한 번씩 사회복지사업법에 근거해서 진행하는 평가였다. 학계, 공무원, 현장전문가로 구성된 세 명의 현장평가 위원이 방문해서 몇 시간씩 머물며 시설을 둘러보고 서류를 검토하고 나서 그룹홈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한 명씩 불러다가 인터뷰 했다. 그간의 모든 시간이 점수로 환산되는 과정이었다.
“아동의 편의와 안전을 증진하기 위해서 기울인 노력과 성과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세요.”
학계 위원이 나를 쳐다보면서 질문했다. 미리 배포한 평가지표를 통해서 묻기로 한 내용이었다.
“음… 저는 제가 애들 엄마가 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안 되더라고요. 음, 그러니까…”
말이 헛나가고 있었다. 고생한 시간이 아깝지 않게 그간의 사업과 성과를 정연하게 발표하겠다고 다짐하며 원고도 정리했더랬다. 그러나 나는 지표에 맞춘 그 문서를 손에 쥐고 자꾸만 딴 말을 했다. 준비한 내용보다도 절실한 무언가 말하기를 택한 것 같았다.
엄마의 역할을 하지만 부모는 따로 있고, 이모라 불리지만 월급을 받고, 두 개의 집을 오가며 생활을 하지만 엄연히 일은 일이어야 하고, 아이들에게 가장 편안한 집을 만들어야 하지만 보조금이나 후원금을 사용하는 사회복지시설 특유의 규칙이 엄격하고, 가장 친근한 관계이지만 언제든 사표를 쓰고 끝낼 수 있는 관계를 맺으면서 겪는 분열들이 잠잠하다 말다를 반복하는 상태였다. 시설평가 현장위원 앞에서 ‘사업평가보고’ 보다는 불가능에 가까운 ‘고백’을 하려고 더듬거리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질 즈음이었다.
체구가 건장하고 점잖아 보이는 현장평가위원 한 명이 답변을 듣다말고 안경을 벗더니 무언가를 찾아 손을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아동양육시설에서 일하는 현장전문가였다. 책상 위에 얹어둔 휴지뭉치를 집어 들어서는 눈가를 몇 번씩 꾹꾹 눌렀다. 내 대답 못지않게 평가지표를 넘어서버린 그의 눈물이 정확한 표현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내 마음을 꼬옥 붙들어주었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중년 남성 동료에게서 가르침 말고 그렇게 열렬한 감정적 지지를 받은 건 처음이었다.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지속할 수 없는 일이죠.” 학교에서 사회복지를 가르치고 연구를 수행하는 학계 위원도 저 멀리 있는 무언가를 보는 사람처럼 아득하게 눈을 반짝였다.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는 사람만 아는 어떤 분열을 공감하는 그 짧은 순간, 본인만 아는 어떤 시간들을 줄줄이 만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평가지표에 있던 질문에 대한 답변을 거의 마쳤을 때였다. 평가위원들은 이제 서류에도 없는 질문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룹홈 말고도 다양한 경력들이 있으신데요. 다른 현장에서 일하던 것과 비교해서 그룹홈은 어떤 점이 다른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 마지막 질문이었다. 사회복지운동단체 활동가로, 노인복지관 독거노인 담당자로, 학교사회복지사로, 협회 관리자로 일하던 순간들이 빨리 돌려보는 사진 영상처럼 지나갔다. 과로에 시달릴 만큼 매번 열심을 다해 일을 해왔지만 어딘가 조금씩은 설명하기 어려운 헛헛함을 겪었더랬다. 그러나 그룹홈에서 유달리 채워진 뭔가가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막막했지만 그냥 뱉어보기로 했다.
“찐찐해요.”
말하고 보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버렸다. 방청소하는 일로 아이들에게 언성을 높이던 순간이며, 수학문제를 함께 풀다 말고 셋째와 손바닥을 마주치며 하이파이브를 하던 순간이며, 아이를 대신해 아이 엄마에게 연락을 시도하던 순간이며, 동네 행정복지센터를 찾아가 아이 후원금을 알아보던 순간까지, 너무 많은 장면들이 달려들기 시작해서 말을 이을 수도 없었다.
“징하게 찐찐하죠.”
긴 말이 더 필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학계 위원이 다 안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평가위원과 시설 직원 간 역할과 위계가 모두 사라지고 동료간의 공감과 응원이 공간을 채웠다. 평가나 점수와 상관없는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에 충만해져버린, 희한하고 행복한 평가였다. 평가위원들이 인터뷰 도중에 눈물을 흘리거나 웃음을 터뜨리던 것과는 상관없이 평가지표에 아주 충실하게 점수를 깎으려고 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도 그때만큼은 점수를 지킬만한 증빙서류들을 찾아 기를 쓰고 내밀었다. 눈물은 눈물이고 점수는 점수였다.
‘보이지 않는 가슴’
그룹홈에서 일하는 보육사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그룹홈에서 일하는 나의 이야기가 당신과 우리의 이야기로 나누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영
아동그룹홈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입니다. 내 시간의 45%는 네 아이와 함께 그룹홈에서 보내고, 나머지 55%는 내가 낳은 두 아이와 남편이 있는 집에서 보냅니다. 집과 일터, 경계가 모호한 두 곳을 오가며 겪는 분열을 글쓰기로 짚어보며 살아갑니다.
댓글 1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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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rt
너무 훌륭하시네요 뵌 적은 없지만 선생님의 삶을 응원합니다
수영
매일매일 좌충우돌이지만... 시공간을 초월해가며 곁을 지키는 사람들 덕분에 하루하루 살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시는 그 마음도, 품을 내어 댓글 달아주신 그 마음도. 넘넘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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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aph50
저의 생활과는 다른 생소한 삶을 보며 저도 티슈를 꺼내듭니다 그 마음과 노력에 감사드리고 응원합니다
수영
소중한 마음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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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room25
응원합니다.
수영
응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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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치기땅치기
그룹홈은 아니지만, 3교대 24시간으로 위기청소년들 근접돌봄 수행중입니다. 아주 약간은 '찐찐하죠'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조금 뭉클해졌어요. 항상 선생님 자신의 건강부터 챙기시며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수영
일부러 로그인 해서 달아주셨을 답글 읽으면서 울컥했습니다. 일요일인 오늘, 저는 아까 퇴근했는데 북치기땅치기님은 오늘 쉬셨나요?^^ 선생님이야말로 정말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시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우리 긴 말은 않아도 알잖아요. ㅎㅎ ㅠㅠ 선생님의 찐찐한 하루가 선생님의 건강하고 행복한 내일을 힘차게 끌어가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북치기땅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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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치기땅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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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슈야
따뜻한 마음이 와 닿습니다.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보냅니다
수영
짧은 글을 깊이 읽고 진심을 담아 건네 주시는 그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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