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이라는 허튼 장난이 알려주는 것 _정희권

에센 슈필메세의 수많은 장애인들

2022.05.21 | 조회 1.01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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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문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세상의 모든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전해드립니다.

치기 어린 용기는  미답의 영역을 걸어가는데 주요한 동력이 되곤 한다. 물론 그 치기를 졸업하는 시기가 중요한데, 어떤 이는 거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어떤 이는 졸업하지 못하기도 한다. 

나는 졸업하는데 오래걸린 축에 속한다. 냉정히 말해 이 일을 업으로 선택한건 치기의 결과였다. 객관적으로 보아,  보드게임을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한 동기나 과정이 현명했다고는 할 수 없다. 분명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딱히 후회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모든 지나간 일들은 어떤 방식으로건 당사자 입장에서는 최선 이기도 한 법이니까. 

  치기에서 우러나 시작한 일이다 보니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경험도 했다.  아직 산업의 생태계가 자리잡지 않은 일을 하는데서 오는 어려움뿐만 아니라, 부정직한 인간과 같은 일을 할 때 생기는 문제들을 함께 겪었던 것이다. 대부분 불쾌한 경험은 불쾌한 관계에서 오기 마련이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젊은 시절에 사전 정보가 없는 사람들이 겪게되는 나쁜 경험을 위무하는 경우에 자주 활용된다.  대개 사회적 지위를 갖추고 자기보다 젊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들 앞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런 점잖은 말을 하는 사람들 중에 젊어서 고생을 한 사람의 비율은 높지 않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경험을 하는 것보다, 부정적인 경험을 하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물론 어떤 경험이든 배움의 여지가 있다.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험들이 주는 최선의 교훈은 그 일은 굳이 겪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굳이 엮일 필요가 없는 사람이 있고, 굳이 할 필요 경험이 있다.  결국 내가 십여 년 넘는 세월을 투자한 나의 업이 되긴 했지만, 아직 생태계가 완성되지도 않은 업계에 별로 정직하지 않은 사람을 믿고 일에 뛰어든 대가는 적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고 그중 상당수는 분명 불필요한 경험이었다. 그 댓가는 오랫동안 불쾌한 방식으로 치뤄야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이 의미가 없다고 말하기는 망설여진다.  보드게임업에 입문한 초창기 시절의 의미를  찾는다면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잘 알 수 없는 문화의 영역을 발견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매력적인 콘텐츠를 끊임없이 생산하며 성장하는 생태계가 성공적으로 생성되고 유지되는 방식을 배우고 지근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인생에서 크게 배운 것 중에 하나였다. 

아헨공대에서 온 스킨헤드족과 만나기 훨씬 전, 내가 독일의 게임쇼에 처음 방문했을 때 크게 놀란 점 하나는 행사장을 가득 매운 사람들 중 장애인의 비율이 대단히 높다는 것이었다. 목발을 짚은 경증 장애인뿐 아니라 몸을 가눌 수 없는 뇌성마비 환자들도 아주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스스럼이 없었다. 그냥 한명의 게이머로서 처음보는 사람들과 함께 게임을 즐기고 헤어졌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자 손녀의 손을 잡고 게임장에서 함께 게임을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 부럽고 즐거운 것이었는데, 장애인들과 비 장애인들이 함께 게임을 즐기는 모습도 그랬다.

 그러나 궁금했다. 이 나라에는 도대체 왜 이리 장애인이 많은 것인가? 

 여러 해 동안 나는 왜 이리 행사장에 장애인이 많은가 하는 게 큰 수수께끼였다. 

 '선진국이 되는 과정에서 환경오염 같은 게 심해져서 이토록 많은 장애인이 생겨난 것일까? '

실례가 될 까 봐 독일 친구들에게 물어볼 순 없었지만, 행사장에 그토록 많은 장애인이 눈에 띄는 이유는 내게는 독일의 게임쇼를 갈 때마다 항상 궁금한 화두였다.

 그 작은 궁금증이 해결된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나서였다. 처음 독일 쇼를 참관한 후 10여 년의 세월이 지나, 내가 직접 주최자가 되어 부산에서 보드게임 쇼를 열겠다고 준비할 때였다.  내 고장에서 직접 그런 행사를 기획하고 차리는 일을 하던 나는 독일의 게임 행사에 장애인이 많은 이유를 어느 순간 깨달았다. 

 한국에서 가장 큰 행사는 25000명 정도가 참가한다. 독일의 게임쇼는 22만 명 정도가 참가한다. 참가하는 인원의 차이가 크고 행사장의 인구밀도도 당연히 독일쪽이 훨씬 크다. 그런데 테이블을 배치하는 방식에 큰 차이가 있다. 

 행사장을 빌릴때 면적에 따라 비용이 정해지고, 당연히 참가자들의 부스 비용도 면적에 따라 정해진다. 모든 사람이 경제성을 두고 부스를 설계한다.  정해진 공간에서 최대한 효율을 뽑아내려다 보니, 한국의 전시회는 부스와 부스의 간격, 테이블과 테이블 간의 간격이 좁다.  반면에 독일 행사장에서는 동선이 넓고 모든 간격이 넓다. 그래서 휠체어를 탄 사람이 테이블을 앞에 놓고 게임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독일의 경우 한국의 전시회보다 규모도 크고 사람도 훨씬 더 많아  훨씬 붐비는 전시회임에도 불구하고 장애인들에게는 훨씬 더 친절한 행사다. 그 행사는 장애인들도 기다리는 날이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가족들을 데리고, 행사장에 오는 게 하등 불편하거나 남의 시선을 신경 써야 하는 일이 아니다. 동선은 편리하며 부스들과 체험 테이블은 대부분 휠체어를 타고도 진입하여 게임을 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이게 오랜 세월이 지나 깨달은, 게임 행사장의 수많은 장애인들이 있는 원인이었다.

독일에 장애인이 한국보다 더 많은 것이 아니라, 그 나라는 장애인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자유롭게 게임전시회에 놀러 올 수 있는 곳이고, 한국은 아직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독일이라는 사회의 특성상, 부스 배치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장애인들이 상대적인 불편함을 겪지 않도록 가이드라인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으나, 그런 것이 없더라도 행사 자체가 많은 장애인들이 참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장애인들도 편하게 부스를 구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 장애인의 이동권을 확보하기 위한 시위를 하는 장애인 단체를 특정 정당인이 공개적으로 비난한 일이 있었다. 시위를 주도한 전국 장애인연맹의 대표가 서울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게 되어 있었는데 '위법한 시위를 주도한 사람'이라는 명목으로 대학생들이 강의를 무산시켰다는 한심한 이야기도 보았다.  

 인간의 기본적인 생활을 위한 이동이나 의식주와 달리 사실 게임은 안 해도 인생에 별 지장이 없다. 특히 산업화되어 대량 생산, 소비되는 엔터테인먼트로서의 게임은 근본적으로는 실없는 농담과 같은 허튼 일이다. 허튼 일이라고 해서 무가치한 것이 아니나,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확보해야 하는 인간의 기본권 같은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 이동하고 먹는 일을 멈출 수는 없다. 그러나 다 큰 어른이 게임을 안 한다고 해서 인생에 커다란 지장이 있지는 않다. (어린이의 경우는 또 다르다고 생각한다. 어린이에게 게임과 놀이는 본질적으로 교육과 구분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허튼일인 게임에도 장애인이 참여할 수 있는 사회라면, 보다 더 중요한 일들에는 더 문제없이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누구나 허튼 일에도 소외되지 않는 사회가 행복한 사회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허튼 일에도 장애인을 소외시키지 않는 사회라면 더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때로 게임이라는 허튼 장난은 이런 식으로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를 알려주기도 한다. 

 

글쓴이 - 정희권 

2000년경부터 게임, 장르문학, 만화 등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렉시오, 스파이시 등의 보드게임을 기획, 제작했고, 현재는 만화 등 다른 IP 가 갖고 있는 재미를 게임 시스템으로 구현하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내와 함께 우보라는 보드게임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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