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앞에서 혜린이를 봤다. 가방이 바뀌었다. 원래 빨간색에 흰 무늬가 들어간 네모난 백팩이었는데 윗부분이 둥근 보라색 가방이었다. 돌봄교실에 있는 아들을 픽업해서 피아노 학원에 데려다 주는 길이었다. 아들 손을 잡고 길을 건넜다. 저만치 멀리 피아노 학원과 반대 방향인 영어 학원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고 있는 혜린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혜린이가 나의 독서교실에 온 건 2020년, 혜린이가 일학년 때였다. 그때는 혜린이를 픽업하러 돌봄교실에 가곤 했다. 돌봄교실에서 혜린이를 픽업한 뒤 학교에서 백 미터 정도 떨어진 나의 집으로 데려가 수업했고 수업이 끝나면 혜린이 엄마가 데리러 왔다. 여름날 혜린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혜린이가 내 손을 잡았던 게 기억난다. 내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와 손을 잡는 건 처음이었다. 놀라웠고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고 어색했다. 혜린이의 책가방을 한쪽 어깨에 메고 혜린이와 손을 잡고 걸어가면 내가 논술선생님인지 베이비시터인지 조금 혼란스러웠다.
수업한지 얼마 안 됐을 때 혜린이가 내게 물었다.
“선생님도 이혼했어요?”
그때 깨달았다. 아, 혜린이 부모님이 이혼했구나.
혜린이 엄마의 카톡 프로필 사진이 생각났다. 혜린이 엄마와 아빠가 결혼 예복을 입고 있고 여덟 살인 혜린이가 두사람 사이에 서있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보고 처음엔 리마인드 웨딩인가? 했다. 그런데 벌써 리마인드 웨딩 사진을 찍나? 고개가 갸웃거려졌었다. 혜린이 엄마는 사십대 초반 정도로, 나와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뭐 십 년마다 결혼사진을 찍는 부부도 있으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리마인드 웨딩이 아니었던 거다. 혜린이는 재혼한 가정의 아이였다.
혜린이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조금 망설여졌다. “아니 선생님은 아직 이혼 안했어”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다가... 이게 말이야 방구야. “음... 선생님은 결혼을 했지”라는, 뭔가 뒷말을 잘라먹은 듯한 석연치 않은 대답을 했다. 선생님은 결혼했지 이혼하지 않았어. 선생님은 결혼했고 이혼은 안 한 상태야. 선생님은 이혼 안 했고 결혼한 상태를 유지 중이야. 아니 그냥 이렇게 말했어야 됐을까? “아니. 선생님은 이혼 안 했어. 계속 결혼 중이야?” 아...
혜린이는 방학 때면 경상도에 있는 할아버지댁에서 방학 내내 지내다가 서울로 올라오곤 했다. 경상도 할아버지가 친할아버지라는 걸 알게 된 건 어느 날 혜린이가 주말에 강원도에 있는 외갓집에 놀러 갔다 왔다고 했을 때였다. 아, 그럼 경상도 할아버지가 친할아버지구나... 그날 혜린이는 외갓집에 스무살 된 친오빠가 있다는 말도 했다.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친오빠를 좀 때려줘야 된다고 했다. 주말에 오빠랑 장난치면서 신나게 논 것 같았다. 친오빠라... 그렇다면 혜린이 엄마가 다 큰 오빠는 친정에 두고 재혼한 뒤 어린 혜린이만 데리고 사는 건가? 아니면 오빠는 이전 결혼에서 낳은 아들이고 혜린이는 재혼해서 낳은 딸인가? 친오빠라는 말은 같은 부모에게서 난 오빠를 뜻하지만 아이들은 단어의 뜻을 혼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친오빠가 아닐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데 혜린이는 방학 내내 경상도에 있는 친할아버지댁에서 부모님 없이 머물렀다. 만약 엄마가 이전 결혼에서 낳은 아이라면 그게 자연스러운 일일까? 아무래도 혜린이는 재혼해서 낳은 딸인 것 같았다.
혜린이는 가족에 대한 애착이 특별히 강한 아이였다. <엄마는 공부밖에 몰라>라는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며 “혜린이는 뭘 좋아해? ‘나는 ______ 밖에 몰라’라고 한다면 뭐라고 적고 싶어?”라고 물은 적이 있다. 혜린이는 게임을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교재에는 ‘나는 가족밖에 몰라’라고 적었다. 혜린이에게 가장 좋았던 일은 가족끼리 제주도로 여행갔던 일이었고 가장 하고 싶은 일은 가족과 어디로 놀러 가는 거였다.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하든 혜린이의 소망은 항상 가족으로 수렴됐다.
어느덧 혜린이는 삼 학년이었다. 그사이 혜린이에게는 혜은이라는 동생이 생겼다. 동생이 태어나서 너무 좋다고 내게 혜은이 사진을 보여줬다. 혜린이 엄마와 통화하면서 나는 아기가 태어난 것을 축하드린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참 뒤의 어느 날 혜린이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제가 오븐 근처에 있었거든요? 근데 제가 오븐 열었다고 엄마가 화냈어요.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혜린이 동생이 태어난지 얼마 안 됐을 때였고 코로나가 한창인 시기였다. 어린 아기를 돌보고 있는 혜린이 엄마는 무척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터였다. 나는 혜린이에게 엄마가 혜린이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물론 그러면 안 되지만, 너무 힘들고 지치면 그럴 때가 있다고 얘기했다. 혜린이는 말했다.
-엄마가 화내면서 이런 말도 했어요. 내가 미쳤지 왜 니네 아빠랑 결혼해가지고.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그리고 잠시 뒤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혜린아, 그 말 듣고 많이 속상했겠다. 원래 화가 나면 말을 조심해야 되는데 어른들도 완벽하지 못해서 실수할 때가 있어. 너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선생님도 아들한테 화가 나서 뾰족한 말을 내뱉을 때가 있거든. 그러고 나서 나중에 후회해. 아마 혜린이 어머니도 그러셨을 거야.
혜린이가 수긍하듯 잠잠해졌고 나는 담담하게 다시 수업을 진행했다.
혜린이는 아빠의 이전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나는 보통 아이 엄마와 연락을 하는 편이지만 혜린이 아빠와는 몇 번 연락한 적이 있었다. 한번은 현금영수증 발급 문제 때문이었고 아빠가 혜린이 책을 가지러 온다고 연락한 적도 있었다. 수업이 끝난 뒤 혜린이를 데리러 왔을 때도 봤다. 육아에 꽤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아빠라고 생각했다. 혜린이가 아빠와의 카톡을 내게 보여준 적이 있다. “혜린이 사랑해 (하트)” “나도 아빠 사랑해” 일상에서 혜린이와 아빠는 애정 표현을 많이 하는 듯 보였다. 아빠가 혜린이를 신경써서 챙기는 것 같아 안심이 됐다.
얼마 전이었다. 혜린이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혜린이가 그만둔다는 연락이었다. 혜린이는 나와의 수업뿐 아니라 미술, 태권도 등 모든 학원을 당분간 끊을 예정이라고 했다. 혜린이 엄마가 물었다.
-혜린이가 집에서 저랑 얘기를 한 마디도 안 해요. 선생님한테는 얘기 잘 하죠?
-네, 저랑 수업할 때는 활발하게 얘기 잘 했고... 집에서 혜린이가 그러는지 몰랐네요.
-중학생 되면 더 안 좋아질 것 같아서 당분간 집에서 같이 시간 보내면서 바로 잡아야 할 것 같아서요. 너무 힘들어서 경상도에 있는 할아버지댁에 보낼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그럼 혜린이가 거기서 학교를 다니게 될 수도 있나요?
-네,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왠지 혜린이 엄마한테 혜린이 마음을 대변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린이 엄마는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잘 모를 것이다.
-어머님, 혜린이가 가족에 대한 애정이 무척 깊어요. 엄마, 아빠, 동생 혜은이도 엄청 예뻐해서 저한테 사진도 보여주고요. 또 경상도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랑 같이 살고 싶다고 얘기 한 적도 있고(아뿔싸, 이건 실수였다. 어느 며느리가 시부모님과 같이 살고 싶겠는가).
내 생각에 혜린이 엄마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동안 혜린이를 엄마쪽 아이라고 여겼던 건 내가 혜린이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알려주며 칭찬했을 때 혜린이 엄마가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혜린이 엄마와 통화한 뒤 마지막으로 혜린이와 수업하는 날이었다. 혜린이는 그만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가 그렇듯 혜린이도 그 지겨운 학원들을 앞으로 안 다녀도 된다는 사실에 은근히 들떠있는 것 같았다. 혜린이와 수업한 지난 삼 년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혜린이를 많이도 웃겼다. 혜린이는 수업시간에 깔깔거리며 웃는 것을 좋아했다.
-혜린아, 글씨가 날아가네?
-꺄르르
-혜린아 얼굴만 예쁘면 다야? 얼굴만큼 글씨도 예쁘게 써보자.
-꺄르르
-엇! ‘읽다’를 ‘익다’로 썼네? 감이 익었나 사과가 익었나?
꺄르르 웃으며 리을을 덧붙이는 혜린이였다.
마지막 날 혜린이는 그동안 한 번도 한 적 없는 얘기를 꺼냈다. 친엄마에 관한 이야기였다. 혜린이 말에 따르면 혜린이가 세 살 때 혜린이의 친엄마는 “엄마가 외국에 가서 일해야 되는데 혜린이가 다섯 살이 되면 돌아올게”라고 했다. 혜린이는 세 살 때라고 했지만 사실은 다섯 살 때일 수도 있다. 아이들은 정확한 때를 잘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혜린이가 지금보다 많이 어린 시절이었을 것이다. 혜린이가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엄마는 친엄마가 아니란 얘기죠.”
어린 아이들도 꺼내기 힘든 이야기가 뭔지 안다. 혜린이는 엄마의 말을 믿고 다섯 살이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엄마는 다섯 살이 됐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혜린이는 다시는 가족을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혜린이는 지금의 새엄마를 소중히 여기고 아빠와 새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도 사랑한다. 혜린이는 어렸을 때 경상도에 있는 친조부모의 손에서 자랐다. 혜린이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아주 많이 사랑한다.
나는 말없이 혜린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분명히 보았다. 혜린이의 미간에 통증이 스치는 것을. 그 통증은 초등학생의 것이 아니었다. 그 통증은 어른스러운 통증이었다.
나는 오늘 학교 앞에서 혜린이를 보았고 혜린이는 아직 경상도 할아버지댁에 가지 않았다. 혜린이가 할아버지댁에 아예 살러 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방학 때만 가도 되지 않을까? 다음에 아이를 픽업하러 학교에 올 때는 주머니에 간식을 좀 넣어가지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런 사연을 가진 아이가 보라색 가방을 메고 혼자 털레털레 걸어가고 있었다.
*저의 모든 글의 아이 이름은 가명입니다.
*글쓴이 - 진솔
어린이들과 책 읽고 이야기 나누는 독서교실 선생님입니다. 초등 아이 키우는 엄마이기도 합니다.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에 '오늘도 새록새록'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진솔의 브런치 - https://brunch.co.kr/@kateinthe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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