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석 달 전. <구렁이 같은 댄서가 되고 싶어>를 쓴 2월이다. 글쓰기를 하다 보면 항상 과몰입 상태가 유지된다. 그날도 그랬다. 꿈에서 구렁이를 만났다. 초록색 큰 나무가 있었고, 하늘에서인지 나무에서인지 내 몸통보다 큰 구렁이가 내 품에 풍덩 떨어졌다. 꿈속에서 나는 소리쳤다.
안 돼. 구렁이 싫어!!!!!!
구렁이 같은 댄서가 되고 싶다고 할 땐 언제고, 구렁이가 내 품에 떨어지니 싫다고 외치는 꼴이라니. 그러자 구렁이가 갑자기 나를 놀리듯 노오란 황금 구렁이로 바뀌었다. 만화 캐릭터처럼 귀엽게 생긴 황금 구렁이가 나를 보고 생글생글 웃었다. 구렁이 꿈이라니 어안이 벙벙했다. 흉몽은 아닐까 얼른 눈 뜨자마자 검색창을 켰다. 구렁이 꿈은 복과 행운의 상징, 새로운 연인이 생기거나 태몽 정도로 해석됐다. ‘흉몽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로또라도 사야 하나.’
며칠 지나지 않아 탱고 대회가 있었다. 그새 봄이 온 듯했다. 얇은 탱고 옷 위에 트렌치코트 정도만 걸쳐도 충분한 날씨였다. 3월 초 우리의 두 번째 결혼기념일이 있었지만, 남편과 나는 휴가를 내고 연습실을 잡았다. 구렁이 꿈도 꿨겠다, 이번엔 드디어 우리가 잘할 수 있는 날인가 기대도 했다. 대회 전까지 총 세 번밖에 연습을 할 수 없는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말이다. 대회 당일 이상하게 계속 배가 아팠고, 대회장의 붐비는 인파 때문인지 산소가 필요하다며 바깥을 들락날락했다. 대회 결과는 그냥 그랬다. 준결승에는 진출했지만, 결승에는 가지 못했다.
포기가 빠른 나는 준결승이 어디냐며 나름 선방한 기분으로 다음날 밀롱가에 가서 실컷 놀았다. 연습은 못 해도 몸 관리는 하겠다며 매일같이 요가를 가서 때문인지 몸이 평소보다 잘 써져서 신이 날 대로 났다. 그게 나의 마지막 밀롱가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어쩐지 이상하게 이틀에 한번 매콤한 닭발이 먹고 싶었다. 잠을 하루에 스무 시간은 자는 것 같다며 남편은 누가 보면 탱고 대회 전 종목에 출전한 것 같다고 놀렸다. 밀롱가 끝나고 동네 탱고 언니와 집에 가는 길에 또 닭발을 주문할까 고민하던 나를 보고 탱고 언니는 혹시 임신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연초에 우리에게 새해 계획을 물었던 언니였다. 하지만 나는 곧 침울한 표정으로 언니의 질문에 “그러고 싶은데 이번에도 아닐 것 같네요.”라고 답했다. 탱고 대회를 급하게 결정한 터라 벼락치기로 연습실을 잡고, 일이 끝나면 연습을 가느라 무척이나 바빴기 때문이다.
일주일 뒤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떴다.
구렁이 꿈은 태몽이었다. 봄에 땅고 대회 나갔을 무렵 나타난 아기라 태명이 봄땅이다. 다른 버전으로는 겨우내 얼어붙은 땅이 녹아 파릇한 새 생명을 품는 땅이라는 의미랄까. 임신 사실을 알고 난 뒤, 입덧이 시작돼서 밀롱가에 갈 수가 없었다.
계획했던 임신이고, 간절히 바랐던 임신인데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많이 혼란스러웠다. 당장 탱고는 어떻게 해야 하고, 하고 있던 운동은 어떻게 하며 적응되지 않는 체력과 감정 기복에 몸도 마음도 지쳤다. 그 무렵 최근에 아기를 낳은 지난 세계 탱고 챔피언 커플 S와 P에게 임신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 커플과 우리 커플이 처음 만났을 때에는 모두 남자친구, 여자친구였을 뿐인데 이제는 두 커플 모두에게 아기가 찾아왔다.
엄마 S는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탱고를 쉬었다고 했다. 임신 기간은 생각보다 우리 인생에서 아주 짧고, 온전히 아기에게 집중할 시간이 필요했다고 했다. 탱고는 우리를 기다려준다는 유명한 말이 있지 않느냐며, 하지만 인생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며 단호하게 말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혼란스러운 감정도 금세 잠잠해졌다.
임신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해도, 정작 닥치고 나니 아는 게 하나 없는 듯했다. 밀롱가에 가지 않는 시간에 동네 도서관으로 산책을 다니면서 임신 관련된 책이나 유쾌한 책을 빌려 읽었다. 임신·출산 책을 8권 정도 읽으니 조금씩 감이 잡혔다. 불안할 때 책을 읽으면 도움이 많이 된다.
여전히 탱고를 추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마 입덧 때문일 테다. 아침마다 향긋하게 풍겼던 커피 냄새를 피한 지도, 가장 좋아했던 남편의 향수 냄새를 못 맡은 지도 오래다. 밀롱가를 떠올리면 입구부터 풍기는 지하의 쿰쿰한 냄새와 각양각색의 향수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밀롱가는 못 갔지만 종종 탱고 음악 콘서트에 가거나 밀롱가 밖에서 탱고 친구들을 만났다. S와 P는 지금 한국에 있는데, 우리의 임신 사실을 비밀로 지켜주고 있다. 만날 때마다 아기 초음파 사진을 궁금해하고, 아들 막시모 유모차를 주며 연습해보지 않겠냐며 남편에게 유모차를 넘긴다. 뱃속 아기의 첫 배냇저고리를 선물해 주기도 했다.
비록 탱고 추는 건 잠시 멈춰둔 상태지만, 밀롱가에 가서 탱고를 추는 것 외에 탱고를 즐기는 방법이 많다는 걸 배워가고 있는 중인 듯싶다. 집에서 탱고 영상을 보고, 탱고 반도네오니스트 고상지 밴드나 바이올리니스트 김아람 밴드의 공연을 보러 간다. 탱고 친구를 만나 임신·출산, 혹은 탱고와는 전혀 상관없는 유기농 채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고 말이다.
누군가가 내 글을 보고 탱고가 왜 그렇게 좋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늘 하는 생각이지만, 나에게 탱고를 빼면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가족인 남편도 없어지고, 꽤 긴 시절을 함께 보내온 친구들도 모두 사라진다. 내가 오랫동안 밀롱가에 나타나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똑같이 춤을 추고 있을 테고, 나도 먼 미래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도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뒤섞여 탱고를 추고 있을 것이다. 반가운 얼굴들에 뺨을 맞대고 인사하며 말이다.
* 글쓴이 - 보배
탱고 베이비에서 탱린이로 변신 중. 10년 정도 추면 튜토리얼 단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여, 열심히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공저 <세상의 모든 청년>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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