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나의 힘, 키르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 악당이 된 그리스 로마 신화 최초의 마녀

2022.11.15 | 조회 3.34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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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여성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익명이었던 여성들 - 우리의 불만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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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여성들 마흔여섯 번째 뉴스레터는 이전 뉴스레터에서 다뤘던 메데이아의 고모이자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최초로 등장한 마녀이자 마법사인 키르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사람들은 마술과 마법을 통해 해결책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키르케는 영향력 있는 여성이자 치명적인 여성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리스어로 '독수리'를 의미하는 키르케는 모든 약초의 효능에 능통하며 적과 자신을 분노하게 만든 자는 모두 동물로 바꾸는 마법을 부리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에서 다뤄지는 키르케는 남성을 유혹하거나 질투에 눈이 멀어 교활한 방식으로 복수하는 인물로 묘사되어 왔습니다. 키르케가 그렇게 못된 악당이었는지 같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법에 걸린 동물들에게 둘러싸인 키르케, 라이트 베이커 ⓒ WIKI
마법에 걸린 동물들에게 둘러싸인 키르케, 라이트 베이커 ⓒ WIKI

바다의 님프 페르세이스와 티탄이자 태양의 신 헬리오스 사이에서 태어난 키르케는 신이지만 다른 형제자매들과 다르게 인간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어 가족들에게조차 멸시를 당했습니다. 님프는 신의 권력이 없었고 암묵적으로 왕국에서도 거부당한 키르케는 이런 자신의 결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냈습니다. 이 기간에 키르케는 무력감 대신 절망과 분노를 양분 삼아 약초를 이용해 물약을 만들고, 주문을 외우며 스스로 마법 능력을 터득하였죠. 태어날 때부터 돌연변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가족마저 자신을 부정하는 세상을 어떤 마음으로 견뎠을까요? 쓸데없는 동정보다는 모두가 무서워하는 괴물이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질투에 찬 키르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 WIKI
질투에 찬 키르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 WIKI

키르케가 마법과 약초에 능통하다는 소식을 듣고 바다의 신 글라우코스는 키르케를 찾아가게 됩니다. 글라우코스는 짝사랑하던 님프 스킬라와 이어질 수 있는 사랑의 묘약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반은 사람이고 반은 물고기였던 글라우코스의 모습이 겁이 났던 스킬라가 그의 구애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키르케는 글라우코스의 사랑을 받는 스킬라를 부러워했고 그 욕망은 글라우코스에 대한 사랑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질투심에 휩싸인 키르케는 글라우코스에게 괴물이 되는 약을 주었고 스킬라는 머리가 여섯 달린 흉측한 괴물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키르케를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못된 마녀'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죠. 

만약 키르케가 글라우코스에게 느꼈던 감정은 사랑이 아닌 분노였으며 스킬라에게 느꼈던 감정이 시기와 질투가 아니라 여성의 자유로운 해방을 위한 일이었다면 어떤가요? 영원히 아무것도 모른 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신처럼 괴물이 되는 것이 낫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아주 오래전부터 독립적으로 자란 키르케라면 스킬라를 안타까이 여겨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남성에게 대항하며 여성을 도와주는 모습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키르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 WIKI
키르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 WIKI

키르케는 님프인 스킬라에게 마법을 행한 죄로 아이아이아 섬으로 쫒겨나게 됩니다. 키르케의 힘에 위협을 느낀 제우스가 키르케의 부친 헬리오스와 상의하여 추방시켰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키르케는 달이나 태양을 구름 뒤에 숨김으로써 하늘을 어둡게 할 수 있었고, 독으로 적을 파괴할 수 있었습니다. 키르케의 능력이 드러나자 이를 두려워하는 신들의 모습을 통해 가부장제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여성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멸시받던 집과 가족, 그리고 남성 중심의 사회를 벗어나 비로소 자신만의 왕국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키르케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원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키르케를 가두기 위한 섬은 사실상 유토피아였던 것이죠.

키르케, 구스타프 아돌트 모사 ⓒ WIKI
키르케, 구스타프 아돌트 모사 ⓒ WIKI

아이아이아 섬은 울창한 숲이 우거진 곳으로 묘사되며 섬 한가운데의 석조 저택에 키르케가 살았습니다. 그 주위에는 마법에 의해 사람에서 동물로 변한 사자와 늑대, 곰 같은 짐승들이 배회했습니다. 키르케는 섬에 찾아오는 이들에게 마법을 걸어 짐승으로 바꾸었습니다. 아름다움으로 남성을 유혹하여 사랑을 빼앗고 눈이 먼 돼지로 만들었죠. 

키르케가 있는 곳은 마법으로 숲과 땅을 움직일 수 있었고, 주변의 나무를 하얗게 만들거나 저택의 벽을 피바다로 만드는 등의 환각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키르케는 아이아이아 섬에 살면서 영웅들의 여러 모험담에 등장하게 되는데요. 조카 메데이아도 죄를 용서 받기 위해 이곳을 들렀고, 키르케는 올림포스 신들에게 바치는 제단을 차려 메데이아의 죄를 씻어주고 무사히 항해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오디세우스에게 음료수 잔을 건네는 키르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 WIKI
오디세우스에게 음료수 잔을 건네는 키르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 WIKI

키르케를 둘러싼 가장 유명한 신화는 오디세우스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오디세우스 일행은 쉬기 위해 키르케가 지배하는 섬에 정박하게 됩니다. 섬을 정찰하다 발견한 키르케의 저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끌려 부하들은 차려놓은 술과 음식을 탐욕스럽게 먹어 치우고 모두 돼지로 변하게 됩니다. <센과 치히로의 모험>에 등장하는 치히로의 부모가 공짜 음식을 먹다가 돼지로 변한다는 설정의 근원을 알 수 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헤르메스가 준 약초를 먹었기에 키르케의 마법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마법이 통하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에 오디세우스와 키르케는 일종의 동맹을 맺어 서로를 해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습니다. 키르케는 부하들에게 건 마법을 풀어주었고 1년간 오디세우스 일행을 섬에 머물게 하며 극진한 대접을 해주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행이 섬을 떠날 때 그들의 출발을 도왔고 세이렌을 피해 고국으로 돌아가는 항로를 가르쳐주기까지 했습니다. 

키르케와 그의 돼지, 브리튼 리비에르 ⓒ WIKI
키르케와 그의 돼지, 브리튼 리비에르 ⓒ WIKI

키르케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유혹, 질투, 속임수 등과 같은 단어와 동일시되는 인물이었습니다. 오디세우스를 유혹하고, 부하들에게 마법을 걸고, 사람들을 유인하여 처벌하는 모습만이 그림으로 묘사되어 질투의 화신이자 악당으로 전해져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키르케가 왜 그렇게 살아올수 밖에 없었는지를 알고 나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나요? 키르케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일을 해왔던 것뿐입니다. 지금의 우리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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