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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모든 논쟁과 분쟁의 중심에 있었지만 제대로 호명되지 못한 신이 있습니다. 바로 불화의 신 에리스Eris입니다. (로마 신화에서는 디스코르디아 Discordia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피하고 싶어하는 많은 부정적인 감정과 반응들을 대변했고, 본인의 즐거움을 위해 사람들 사이 불화를 일으키고 전쟁을 일으키도록 자극했습니다. 혼란과 불행 속에서 기뻐하는 가혹한 신으로 여겨진 에리스는 어떤 신이었을까요? 지금부터 에리스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리스의 탄생
에리스의 탄생에 대한 설화는 다양합니다. 대지의 신 가이아와 함께 태어난 어둠의 어머니이자 밤의 신인 닉스의 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며, 그의 자매들은 죽음, 불행, 파멸, 노령과 같은 영역을 책임졌습니다. 에리스는 전쟁의 남신 아레스의 동료로, 전쟁터에 함께 등장하여 유혈과 비참함, 전쟁의 고통을 즐겼다고 전해집니다. 전쟁의 남신 아레스는 전쟁과 지혜의 신인 아테네와 그가 늘 전쟁터에 대동했던 니케를 만날 때마다 패배했습니다. 승리 자체를 상징하는 니케의 위력과 아테네의 지혜를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아테네보다 역량이 부족했던 아레스는 자신의 배우자인 살상과 파괴의 신 에뉘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에뉘오는 병사들의 피로 몸을 씻고 인간의 뼈와 가죽으로 단장할 만큼 전쟁광이었습니다. 에뉘오는 아레스와 전장에 함께 다니지만 정작 전장에 나서면 적진을 향해 홀로 돌진했고, 아레스가 아테네와 싸울 때도 아레스가 당하든 말든 관심도 없이 오직 살육에만 몰두했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에뉘오였지만, 쿵짝이 잘 맞았던 에리스만큼은 엄청나게 아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에리스 숭배가 강한 지역 중 일부에서는 이들의 우정을 여성 간 동성애의 심볼로 삼기도 했죠. 아마존 전사들 역시 그들 스스로를 에뉘오와 에리스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둘은 엄청난 시너지를 내며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휩쓸었습니다. 이를 본 아레스는 에뉘오와 에리스에게 전쟁에 함께 나가자고 간곡하게 부탁하였고, 그 둘과 함께한 아레스는 비로소 아테네, 니케에 견줄 수준이 되었다고 합니다.
에리스와 황금사과
에리스의 파괴력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트로이 전쟁을 촉발한 황금사과 사건인데요. 티탄족 신이었던 테티스의 결혼식에 홀로 초대받지 못한 에리스는 이 상황을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올림포스 신들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합니다. 에리스는 헤르페리데스로부터 황금사과를 받아 올림포스 산 입구에 놓아두었죠. 사과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에게’라고 적혀있었습니다. 물론 그 사과가 누구의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소란스러운 와중 올림포스의 최고 권력자였던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나타나 자신이 사과의 주인이라고 주장합니다. 황금 사과는 그리스 신화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의 신화나 설화에 등장하는 소재로 영원한 젊음과 불멸의 상징이었으니 신들이 탐을 내기 충분했죠. 제우스는 고민하다가 어떤 신도 비난받지 않게 하기 위해 트로이 왕자 파리스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세 신은 파리스의 마음을 흔들기 위해 선물 공세를 펼쳤습니다. 아테나는 군사력과 승리를 약속했고, 헤라는 지상의 권력과 엄청난 부를 아프로디테는 사랑을 약속했습니다. 파리스의 선택은 아프로디테였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파리스와 사랑에 빠질 여성은 이미 스파르타의 왕과 결혼한 헬렌이었죠. 아프로디테는 에로스를 보내 헬렌과 파리스가 사랑에 빠지게 했고 그들은 트로이로 도피했습니다. 이는 트로이 전쟁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스파르타 입장에서는 트로이가 헬렌을 납치했다고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은 그 시대의 많은 영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인간들뿐만 아니라 신들도 편이 갈려 혼란스러운 상황이 10년이나 지속되었죠. 유일하게 편을 들지 않았던 신은 에리스였습니다. 그는 전장에 중심에서 성공스러운 복수에 만족해하며 10년간의 전쟁에 희열을 느꼈습니다.
에리스는 갈등 그 자체를 뜻하는 신이라 어느 편도 들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쪽에도 이득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에리스는 어떤 신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킨 원한과 불화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또한 에리스에 대한 기록과 그를 위한 신전이 없었다는 점을 보았을 때 에리스는 그리스에서 가장 인기 없는 신이었을 겁니다. 에리스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사랑받는 신은 아니였을지 몰라도 크고 작은 논쟁을 일으켜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고 더 열심히 일하도록 동기를 부여하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불만과 경쟁심을 갖고 전쟁과 갈등을 통해 많은 문명을 개척시켰기 때문이죠. 컴퓨터, 인터넷, 우주과학, 지구과학 등 과학기술의 상당수가 전쟁의 그늘에서 성장했기에 전쟁이 없었다면 20세기 과학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는 하루하루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서 성장하고, 불화를 겪은 후 성숙해지기도 합니다. 삶에 굴곡이 있을 때마다 에리스를 떠올리며 고난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것은 어떨까요?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에리스는 항상 중립일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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