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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여성들 열여덦 번째 뉴스레터는 한인애국단의 핵심 인사였으나 알려지지 않았던, 이화림입니다. 그는 14살에 3·1운동에 참여하고, 윤봉길·이봉창과 함께 김구의 측근으로 일하며 친일파 밀정을 처단하는 등의 임무를 맡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독립운동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누구보다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여 독립 운동이 생애 그 자체였던 이화림의 이야기, 지금 시작할게요.
※ 이번 주 메일 발행이 다소 늦어졌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이화림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입니다.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은 독립운동가인 오빠 이춘성, 이춘식의 영향을 받아 1919년 14세의 나이에 친구들을 이끌고 3.1운동에 가담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평양 학생 조직인 역사 문화 연구회에 참가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고, 이를 계기로 1927년 조선 공산당에 입당했습니다. 이후 그는 계속해서 학생운동을 전개했으나, 극심한 일제의 탄압으로 1930년 중국 상해로 떠났습니다.
이화림은 상해에서 한글학자인 김두봉을 통해 임시정부 김구 주석을 만났고, 한인애국단에 가입했습니다. 그가 그토록 원하고 바랬던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죠. 그는 이름을 이동해로 바꿔 사격과 무술을 익히며 친일파 밀정을 처단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습니다.
이화림은 한인애국단 내에서도 핵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김구는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과 독립을 향한 열망을 높이 사 이화림에게 비서 역할을 맡길 정도였죠.
1932년 일왕 암살 지령을 수행하기 위해 이화림은 이봉창의 속옷 안쪽에 수류탄 주머니를 만들어 폭탄을 일본으로 몰래 옮기는 데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 해 4월에는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또 한 번 폭탄을 던지기 위해 윤봉길과 미리 정찰하여 거사 지점까지 계획하는 등의 주요 임무를 맡아 수행했습니다. 도시락 폭탄 또한 같이 던지기로 돼 있었으나 둘은 발각될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작전을 바꿨습니다. 이화림은 윤봉길이 기념식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부부로 가장해 동행했고, 윤봉길의 거사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습니다.
그 이후 이화림은 개인 희생에 의존해서는 독립을 가져올 수 없다고 생각했고, 김구의 만류에도 그는 사회주의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백범일지>에는 이화림의 이름이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죠.
1932년, 일본의 감시가 심해지자 이화림은 광저우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해 부녀국 의료보건사업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1936년엔 민혁당에 가입해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부녀대의 부대장을 맡았습니다. 1945년 중국의과대학에 입학해 그해 8월 옌안에서 해방을 맞았지만 학업때문에 귀국하지 못했고, 대학을 마치고 중국 공산당에 가입해 하얼빈에서 의사 생활을 했습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인민군 제 6군단 소속으로 참전했고, 위생소장으로 복무하기도 했습니다. 사회주의자이자 인민군으로서 6·25 참전은 후에 독립운동가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조차 이화림을 포함한 조선의용군은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남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것이죠.
그는 문화대혁명 때 반혁명 분자로 몰려 박해를 받기도 했으나, 1987년 대련시 조선족 노인 협회의 명예 회장, 1988년 장춘시 조선족 사회 과학 일군협회의 고문으로 초빙되었습니다. 1999년 2월 10일 전재산 5만원을 조선족학교에 전액기부하고 사망했습니다.
역사에 남겨진 기록은 그의 고작 몇 장 뿐일지 몰라도, 그가 인생의 대부분을 독립 운동에 불사한 투사였음을 이제 우리는 기억해야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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