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로부터 구해진 공주는 과연 행복했을까요?

용과 기사, 그리고 불쌍한 공주 안드로메다 이야기

2022.10.25 | 조회 1.77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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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여성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익명이었던 여성들 - 우리의 불만을 기록합니다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자리가 있습니다. 그 별자리 중 하나인 안드로메다는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가장 높은 은하이기도 합니다. 이 안드로메다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공주의 이름에서 붙여졌다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잊혀진 여성들 마흔세 번째 뉴스레터는 여성 전사들 아마조네스에 이어 안드로메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안드로메다의 이야기는 서양권 동화에서 자주 쓰이는 용과 기사, 불쌍한 공주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드로메다에게 별자리가 되기까지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지금 시작해볼게요.

안드로메다 은하 ⓒ WIKI
안드로메다 은하 ⓒ WIKI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안드로메다는 에티오피아의 왕비 카시오페이아와 왕 케페우스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에티오피아는 현대 국가 에티오피아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에서 나일강 상류의 수단 공화국 및 아프리카의 뿔 지역을 부르는 말로 현대 에티오피아도 포함되는 지역입니다. 오늘날의 에티오피아 역시 전설 속의 에티오피아를 따와 지어진 것이죠. 에티오피아는 ‘에티오포스가 사는 땅’이라는 뜻이며, 에티오포스는 ‘검은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즉, 안드로메다는 에티오피아인이라고 언급되고 있습니다.

루벤스의 <천국의 4강>에 등장하는 흑인 여성상 ⓒ Getty Images
루벤스의 <천국의 4강>에 등장하는 흑인 여성상 ⓒ Getty Images

영국 미술사학자 엘리자베스 맥그래스의 1992년 기사 “검은 안드로메다”에 따르면 안드로메다는 에티오피아 출신의 흑인 공주로 묘사되었으며, 고대 작가들 또한 안드로메다는 흑인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안드로메다를 묘사한 그림을 보면 백인으로 그려져 있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고대에는 당연하게 흑인으로 여겨지다가 근세 서양으로 와서 그 사실이 잊혀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왜 안드로메다는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백인으로 묘사된 그림이 훨씬 많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안드로메다의 아름다움 때문입니다. 안드로메다가 ‘아름답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민족적 요소를 제거한 것이죠. 당시 흑백과 아름다움은 대부분 이분법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시대에 맞는 아름다움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인종까지 바꿔야 한다면,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미의 기준은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이 정형화된 아름다움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요.

니콜라스 베르됭의 12세기 작품. 솔로몬 왕에게 선물을 가져오는 시바의 여왕. ⓒ Getty Images
니콜라스 베르됭의 12세기 작품. 솔로몬 왕에게 선물을 가져오는 시바의 여왕. ⓒ Getty Images
에드워드 포인터의 <솔로몬 왕을 방문한 시바의 여왕>, 1890 ⓒ Getty Images
에드워드 포인터의 <솔로몬 왕을 방문한 시바의 여왕>, 1890 ⓒ Getty Images

맥그래스에 따르면 안드로메다의 인종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르네상스 예술은 반복해서 안드로메다를 백인으로 묘사했죠. 기원전 10세기경 전설적인 왕국 시바의 여왕 또한 안드로메다와 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르네상스 미술사에 등장한 *마기에 대한 작품을 보면 세 명의 왕 중 한 명은 검은색 피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남성일 경우 ‘왕’이라는 계급을 가지고 신비한 힘을 가진 마법사라는 긍정적인 인물로 표현되는 반면, 여성일 경우에는 화이트 워싱 되어 표현된 것이죠. 심지어 시바의 여왕과 이 마법사는 기원이 같습니다. 같은 에티오피아에서 왔다는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은 흑인으로, 여성은 백인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 신기하지 않나요? 한때는 시바의 여왕이 검은 피부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르네상스 시대는 그를 하얀 피부와 성적 대상화하여 표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8세기에 이르러 그의 모습은 건강한 토론을 하기 위해 왕을 만나는 것이 아닌 그저 왕을 유혹하는 여성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기(Magi) : 마법사를 뜻하는 영어 단어 메이지(Mage)의 어원. 마기는 마구스(Magus)의 복수형이며, 마구스는 마기의 단수형.

카시오페이아(Cassiopeia) 자리. 허영심으로 나라를 어지럽힌 것에 대한 벌로 포세이돈에 의해 하늘로 올려진 카시오페이아는 별자리가 되어 하루의 반을 의자에 앉아 하늘에 거꾸로 매달려야 하는 벌을 받게 되었다는 말이 있다.
카시오페이아(Cassiopeia) 자리. 허영심으로 나라를 어지럽힌 것에 대한 벌로 포세이돈에 의해 하늘로 올려진 카시오페이아는 별자리가 되어 하루의 반을 의자에 앉아 하늘에 거꾸로 매달려야 하는 벌을 받게 되었다는 말이 있다.

안드로메다의 모친 카시오페이아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말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케페우스 왕과 함께 에티오피아를 다스린 통치자이자 겨룰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움을 가진 인물로 말을 좋아하는 만큼 자랑도 좋아하여 자신의 딸 안드로메다와 *네레이데스의 미모를 비교하며 사건이 시작되는데요. 이 일로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샀고 그에 대한 응징으로 에티오피아에 큰 재해를 일으켰습니다. 홍수를 일으키고 바다 괴물 케토스를 풀어 사람과 짐승을 죽여 살 수 없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나라를 망하게 만든 원인이 고작 모친의 자식 자랑이라니 믿겨 지시나요? 과연 적절한 대응인지 의문이 들면서 포세이돈이 신의 자질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됩니다. 신화에 따르면 카시오페이아 또한 엄청난 미모를 가진 인물로 묘사되며 네레이데스 또한 미모가 빼어나다는 특징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왜 항상 아름다운 여성들은 서로를 질투하고 비교하게 되는 걸까요? 심지어 카시오페이아가 미모를 비교한 대상은 ‘네레이데스’였으나 ‘포세이돈’이 카시오페이아를 응징하게 됩니다. 여신이든 요정이든 여자이든 원하면 취하고 가질 수 없으면 파괴하는 것은 남성 신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혹시 카시오페이아는 포세이돈의 애정을 거절하여 ‘허영심이 많고 오만한 여성’으로 불리게 된 것은 아닐까요? 진실은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에서는 가부장제 문화 속 여성관의 문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네레이데스 : 미모가 빼어난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바다의 요정.

폴 귀스타브 도레의 <안드로메다>, 1869 ⓒ WIKI
폴 귀스타브 도레의 <안드로메다>, 1869 ⓒ WIKI
프레드릭 레이턴의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1891 ⓒ theartinspector.com
프레드릭 레이턴의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1891 ⓒ theartinspector.com

안드로메다의 부친 케페우스는 포세이돈의 응징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신탁을 청했고 그 결과 안드로메다의 희생만이 노여움을 풀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괴물에게 안드로메다를 산 제물로 바치면 나라와 국민을 구할 수 있다고요. 케페우스는 고뇌했지만, 포세이돈이 내린 재앙을 피할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해 해안 근처의 바위섬에 자신의 딸인 안드로메다를 쇠사슬로 묶어 포세이돈의 마음이 풀어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양친이 느꼈을 죄책감과 무력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현대에서 부친인 케페우스를 ‘딸바보 아빠’라는 칭하기도 하는데요. 그에 비해 카시오페이아는 오만하고 자만하기 때문에 욕을 먹어도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양친이 한 일을 다시 한번 살펴볼까요? 카시오페이아는 자식에 대한 미모를 자랑했고, 케페우스는 자신의 딸이 바다 괴물의 희생양이 되도록 딸을 바다 위 바위에 묶었습니다. 어떤 것이 더 죄질이 무거워 보이나요? 선택은 여러분께 맡기겠습니다.

루벤스의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1622 ⓒ 루브르 박물관
루벤스의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1622 ⓒ 루브르 박물관
피에르 미그나르의 <안드로메다를 해방시키는 페르세우스>, 1679  ⓒ 루브르 박물관
피에르 미그나르의 <안드로메다를 해방시키는 페르세우스>, 1679 ⓒ 루브르 박물관

안드로메다가 괴물에게 잡아먹히기만을 기다리던 도중 메두사를 죽이고 지나가던 페르세우스는 묶여 있는 안드로메다를 발견합니다. 안드로메다의 미모를 보고 발걸음을 멈춘 페르세우스는 한눈에 반해 양친에게 안드로메다를 구하면 사위로 삼아달라 요구해 결혼을 허락받고 곧장 괴물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이 긴박한 장면은 많은 화가가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어떤 이는 신화에 등장하는 이런 장면들이 괴수 퇴치를 빙자한 관음적 시선이라 말합니다. 왜 안드로메다는 굳이 발가벗겨져 바위에 묶여야 했을까요? 왜 안드로메다의 몸은 눈부시게 하얄까요? 왜 페르세우스라는 영웅의 존재보다 안드로메다의 모습을 중심으로 그렸을까요?

유독 안드로메다를 다룬 작품들은 노출도가 높다고 하는데요. 여성은 저항하지 못한 채 남성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자유를 빼앗긴 사슬에 묶여있는 여성을 보며 욕망하는 남성의 시선이 그림에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묶여있는 안드로메다는 성적인 자극을 주는 이미지 외에도 무기력한 여성으로 보이거나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상으로 소비한 작품이 많습니다. 안드로메다는 인기 있는 소재였죠. 그만큼 이런 여성들을 소망하는 남성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폼페이 벽화에 그려진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 WIKI
폼페이 벽화에 그려진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 WIKI

안드로메다와 페르세우스의 이야기는 신화에서 보기 드문 해피엔딩 이야기 중 하나라고 합니다. ‘괴물로부터 공주를 구하는 기사’의 원형인 이 이야기는 어렸을 적부터 용기 있고 능력 있는 남자가 아름답고 불행에 빠진 여자를 구한다는 서사는 진부하지만, 여전히 클리셰로 자주 쓰이고 있죠. 내게도 백마 탄 왕자가 있을까, 유니콘 같은 남자가 나타나 구원해줄까,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면 당연한 순리입니다. 안드로메다의 이야기를 뜯어보면 알 수 있듯이 아주 먼 과거에서부터 여성들은 비슷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거든요. 이는 오늘까지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이야기가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동적인 여성상을 갈망해온 역사와 그를 욕망한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이 이야기의 결말을 결코 해피엔딩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해피엔딩인지는 이제부터 우리가 선택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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