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님 안녕하세요,
잊혀진 여성들 쉰한 번째 뉴스레터는 저승을 관장하는 신이자, 꽃과 식물을 지배하는 신인 페르세포네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어? 페르세포네는 하데스한테 납치당한 가련하고 불쌍한 사람 아니었나?’ 싶은 분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구전으로 전승해오면서 그 이야기가 변형되기도 하고, 여러 버전이 있기 마련이죠.
오늘은 지하에 잡혀 지상만을 꿈꾸는 무력한 어린 여성이 아닌, 계략이 넘치는 야망가로서의 페르세포네 이야기로 시작해볼게요.
페르세포네는 위대한 대지의 신이자 올림포스 12신 중 하나인 데메테르와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모친과 함께 불릴 때에는 데메테르들(Demeters)라고 불리기도 하고, 초목의 신으로 처녀라는 의미인 코레(Kore)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는 다른 처녀 신인 아르테미스와 아테나를 동경했다고 전해지기도 하죠. 그도 그럴 것이 지하 세계로 가기 전, 페르세포네는 다른 신들과 동떨어진 자연 속에서 꽃과 식물을 기르고 홀로 살고 있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찍이 비범한 외모로 알려져 여러 올림피아 신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친인 데메테르는 이를 마땅치 않아 했고, 딸을 (주로 시칠리아로 일컬어지는) 깊은 자연 속에 감추어 놓았던 것이죠.
페르세포네가 아테네, 아르테미스와 더불어 님프들과 들판에서 꽃을 따던 중 지하 세계의 왕인 남신 하데스가 지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아프로디테는 처녀신(또는 미혼신)이 늘어나는 것을 경계하여, 에로스로 하여금 하데스에게 화살을 쏘아 페르세포네를 사랑하도록 만듭니다. 다른 버전에서는 아프로디테가 어두운 하데스를 싫어하여 그를 사랑에 빠지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결국 하데스는 페르세포네에게 첫눈에 반했고, 꽃을 돌보던 페르세포네는 갑자기 갈라진 땅 사이 지하 세계로 통하는 길로 빠지게 됩니다. 하데스가 페르세포네와 결혼을 하고자 하여 그를 납치한 것이었죠.
모친 데메테르는 딸이 사라진 것을 알고 곡식과 수확이라는 자신의 일에서 손을 놓고 딸을 찾으러 다닙니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보아도 딸을 보았다는 이가 없었습니다. 데메테르의 마음이 타들어 가고 슬픔이 거세질수록 세상은 폐허가 되어갔습니다. 9일간 데메테르는 횃불을 들고 딸을 찾아 헤맸고, 음식을 먹지도 몸을 씻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농경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큰 기근을 맞이하게 되었죠. 그러던 중 태양신 헬리오스로부터 딸이 지하 세계에 끌려갔다는 것과 제우스가 그 공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데메테르는 제우스에게 항의했고, 제우스는 페르세포네가 지하 세계의 음식을 먹지 않았어야만 하데스로부터 그를 데려올 수 있다고 말하며 헤르메스를 보냅니다. 그것이 지하와 지상 세계 간의 규칙이었기 때문이죠.
페르세포네는 지하 세계로 끌려 온 후, 모친인 데메테르와 지상의 초목들을 그리워하며 하데스와 부하들이 주는 음식을 거부하였습니다. 하지만 주위를 살펴보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하 세계라는 곳이 무섭기보다는 보석이 많고 부유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하데스와의 결혼이 자신에게 줄 부와 권력이 명확히 보이게 된 것입니다. 명석한 페르세포네는 이 결혼이 자신에게 손해가 되지 않으리라 판단하였고, 저승에서 제공한 음식 중 석류를 3알 먹습니다. 지하 세계의 왕이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서 지하는 광물이 묻혀있는 곳으로 보석이 많고 부유하다고 여겨졌다.
뒤늦게 도착한 헤르메스와 함께 페르세포네는 지상으로 올라갑니다. 페르세포네는 데메테르의 품에 안기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합니다. 딸을 찾아 데메테르의 마음이 놓이자 땅에 새싹이 돋고 생명력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이미 저승의 음식을 먹은 페르세포네는 1년 중 1/3은 저승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렇게 이 시기는 겨울이 됩니다. 이전까지는 세계는 계절이 없이 생명력이 가득한 시기만 있었지만, 딸이 지하 세계에 있는 동안의 데메테르의 슬픔으로 인해 겨울이 생겨난 것이죠.**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납치되었고 모친에게는 힘든 겨울의 시간을 주었지만, 페르세포네는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파악하여 결국 그리스 로마 신 중 가장 무서운 신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당시 그리스인들은 저승, 지옥, 지하 세계를 다스리는 페르세포네의 이름을 감히 입에 올리지도 못하여 네스티스라는 완곡적인 표현으로 부르기도 했다는 걸 보면, 그가 갖게 된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 가늠할 수 있죠.
** 이 시기는 한국의 겨울이 아닌, 그리스 로마 신화가 전승되던 시기 주식이던 밀의 농한기를 의미한다는 해석이 있다.
페르세포네의 이야기는 지하 세계로의 납치 일화가 가장 유명하지만, 아프로디테와 얽힌 이야기도 몇몇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다운 미청년 아도니스에 대한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쟁취하려는 두 신의 싸움을 제우스가 중재하여 1년 중 일부의 시간을 각각의 신과 공평하게 보내도록 합니다. 하지만 아도니스는 아프로디테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죠. 분노한 지하 세계의 왕인 페르세포네는 아프로디테의 연인인 아레스를 활용하여 계략을 짭니다. 귀여운 미청년이 지하 세계에 오도록, 아레스가 그를 죽이도록 하는 계획이었죠.
페르세포네는 아레스에게 아프로디테가 아도니스에 푹 빠져있다고 알려주었고, 질투에 눈이 먼 아레스는 페르세포네의 계획대로 아도니스를 죽입니다. 그렇게 페르세포네가 아름다운 미청년을 독점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프로디테의 항의로 제우스가 나서서 6개월씩 나누어 지내게 됩니다. 아름다움의 상징인 아프로디테와 페르세포네가 아름다운 남성을 쟁취하기 위해 싸운 이야기는, 그들이 아름다움의 상징이 된 것이 스스로가 아름다움 그 자체여서라기보다는 아름다움을 사랑해서라고 보이기도 합니다.
무서운 지하 세계의 왕으로서의 페르세포네 일화 중 하나는 민테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민테와 페르세포네에 관한 일화는 여러 버전이 있지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하데스가 바람을 피웠고 이에 분노한 페르세포네가 민테를 밟아서 죽였다는 이야기이죠. 그렇게 민테가 죽은 자리에서 민트(박하)가 피어났고, 밟을수록 향이 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편인 하데스가 아닌 민테를 밟아서 죽게 만드는 이야기 형식은 너무나 익숙한 여적여 구도의 전개입니다. 다른 버전에서는 페르세포네가 납치당하기 전 함께 꽃을 돌보던 민테가 페르세포네가 납치당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민트가 되었다는 완전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지하 세계의 왕과 민트가 같이 언급되는 이유는 고대 장례식에서 시신의 냄새를 감추기 위해 민트를 사용했고, 이에 하데스의 상징적 식물로 여겨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페르세포네가 지하 세계의 왕좌에 오른 이야기와 님프 민테와의 이야기 모두 우리가 어떤 버전을 택하고 전달해 나가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페르세포네를 그저 무력하고 수동적인 인물로만 볼 수도 있고, 빠른 사리 분별 능력과 명석한 머리로 자신의 위상을 드높인 야망가로 볼 수도 있죠. 아름다움의 신을 그 자신이 아름답고자 하는 인물로 그릴 수도, 아름다움을 탐미하는 인물로 그릴 수도 있습니다. 또한 두 인물의 관계를 여적여 구도로 소비할 수도 있고, 절절한 우정으로 볼 수 있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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