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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핫은 내 필라테스 선생님이에요. 허리 통증 때문에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다 찾아간 것이 그였지요. 열정적인 페르핫의 지도 덕에 통증은 완화되었고, 처음으로 체육관이란 곳에 정도 들었어요. 다른 회원들과 조정에 나가보기도 했고요. 같은 크루 사람들에게 민폐만 끼치다 왔지만요. 최근 페르핫은 축구를 하다 십자인대를 크게 다쳤어요. 어릴 때 축구 선수를 꿈꾸다 전향한 그에게 축구는 애증의 종목이라지요. 그럼에도 고양이 이름은 전설의 스트라이커 탄주 촐라크의 이름을 따 탄주라고 지어준 그지요. 주말에 페르핫이 단역으로 출연했다는 영화를 봤어요. ≪레프테르: 축구장의 교수≫.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튀르키예의 축구 선수, 레프테르 퀴취칸도니아디스에 대한 전기 영화였지요. 영화의 전개는 별로였어요. 쓸데없는 드라마가 지나친 분량을 차지했지요. 그럼에도 페르핫이 등장한 씬은 알아둘 만한 장면이었어요.

1925년 출생한 레프테르는 룸이었어요. 오르한 파묵의 책에 꼭 등장해 각주가 달리는 것이 이 룸이지요. 나도 당신께 룸 얘기를 벌써 몇 번 해드렸고요. 룸은 원래 아랍인들이 동로마 제국의 로마인을 부르던 명칭이었어요. 이 명칭이 오스만 제국을 거쳐 오늘날까지 살아남았지요. 현재 룸은 아나톨리아에 사는 그리스 정교회인을 일컬어요. 당신도 잘 아시겠지만, 오스만 제국은 밀레트 체제로 통치되었어요. 밀레트란 정확히 뭘까요? 현대 튀르키예에서 밀레트는 민족이라는 의미를 가져요. 그러나 이 단어가 유래한 고전 아랍어 밀라millaمِلَّة는 신앙 체계나 종교 공동체를 뜻했어요. 예컨대 쿠란에는 ‘아브라함의 밀라를 따르라‘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는 유일신을 섬기는 그의 신앙을 본받으라는 의미지요. 신약 갈라디아서의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와도 일맥상통하는 구절이지요. 오스만 제국에서 룸, 유대인, 아르메니아 정교회인, 시리아 기독교인 등 비무슬림 종교 공동체들은 보호세를 내는 조건으로 무슬림들과 공생할 수 있었어요. 사이 좋게 하하 호호 더불어 살았냐 하면, 지나친 미화겠지요. 그들은 적당히 각자도생했어요. 자기들의 영역에서 자기들의 신을 믿고 자기들의 법규를 준수하면서요. 그리고 놀랍게도 이 제도는 거의 500년 동안이나 유지되었지요. 동시대 유럽을 휩쓴 혐오의 중량에 비하면 이는 믿기 어려울 정도예요. 예컨대 유대인이 기독교인으로부터 받은 박해의 강도를 우리가 헤아릴 수나 있을까요? 기독교 간의 신구 갈등은 또 어떻고요.

이참에 당신께 내가 좋아하는 메달을 하나 보여드리고 싶군요. 네덜란드 반란군이 만든 메달인데, 모양이 흥미롭지요. 16세기 칼뱅파가 주를 이루던 네덜란드는 가톨릭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에 저항해 독립전쟁을 80년이나 벌여요. 이 기간에 그들은 ‘교황주의자보다는 차라리 터키인이 낫다Liever Turks dan Paaps’라는 구호를 만들지요. 밀레트 체제 하에 비무슬림인들은 세금을 더 냈지만, 타고난 상업적 기질을 발휘해 자본을 축적하고 사회적 지위를 쟁취하는 데 성공해요. 이들이 쌓은 막대한 부와 영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장소가 있어요. 꿈결처럼 황홀하고도 애처로운 섬. 왕자들의 제도가 그곳이지요.


왕자들의 제도는 이스탄불 내 위치한 네 개의 섬을 일컬어요. 뷔위카다, 불가사다, 헤이벨리아다, 크날르아다가 각각의 이름이지요(아다는 섬을 뜻하고, 여자 아이 이름이기도 하답니다). 내가 사는 동네 선착장에서 페리를 타고 약 한 시간이면 그 섬들에 닿을 수 있어요. 비잔티움 시기 폐위된 황족들은 이 섬들로 유배 보내졌어요. 그래서 왕자들의 제도Prinkiponisa라는 그리스식 이름이 남았지요. 비잔티움 때 벌써 수도원과 교회들이 지어진 데다 그리스어를 쓰는 정교회 공동체가 생겨났으니, 섬에 대대손손 룸, 유대인, 아르메니아인들이 유입되었음은 어쩌면 당연했어요. 이들은 아름다운 목조 건물들을 지어 한가로운 생활을 이어갔고, 공동체는 점점 불어났어요. 이런 배경에서 태어난 이가 축구 선수 레프테르였어요. 알바니아 출신 그리스계 이민자인 그는 섬들 중 가장 큰 섬, 뷔위카다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영화를 보면 레프테르와 그의 가족, 친구들은 그리스어와 튀르키예어를 섞어 써요. 룸들이 대대로 그랬듯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룸 학교와 교회에 다니고, 정교회 전통을 이어가며 살았지요. 섬 촌뜨기 레프테르였지만, 공만은 얼마나 잘 찼던지 그의 실력은 육지에까지 널리 퍼져요. 그는 곧 페네르바흐체 팀에 영입되고 국가대표로 선출되는 등 승승장구하지요. 레프테르는 국가대표로서 아테네로 친선 경기를 나가기에 이르러요. 그러니까 튀르키예 대표로서 그리스를 상대로요. 이 아테네 경기에서 내 필라테스 선생님, 페르핫이 등장하지요. 튀르키예 선수로 분한 페르핫은 레프테르에게 패스를 주고, 레프테르는 여지없이 골을 넣어요. 이윽고 관중석에서 마구 날아오는 것은 양상추와 오렌지에요. 그리스 관중들은 악 지르지요. 배신자, 반역자! 네가 무슨 그리스인이야! 튀르크 종자새끼.
민족보다 국가를 택한 죄로 이런 수모를 당했다면, 자국에서 영웅으로 평생 대접 받으며 살아야 했겠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국은 그런 평안을 허용하지 않았어요. 오스만 패망 이후 광대했던 영토는 툭툭 쪼개져요. 발칸 반도에 사는 무슬림과 아나톨리아에 사는 정교회인들은 증오의 대상으로 몰리지요. 언제 우리가 더불어 살던 적 있었냐는 듯. 알라와 야훼가 같은 하늘 아래 공존한 적 있었냐는 듯. 타 종교 간 폭력과 강간, 살인 등 탄압의 수위는 날이 갈수록 높아져요. 이러한 가운데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가 다수로 인정받는 땅으로 이주하기 시작해요. 이렇게 발칸 반도나 캅카스 등에서 아나톨리아로 이주한 이민자들을 무하지르muhacir라고 불러요. 내 시조부 압둘라흐 씨가 무하지르로, 그는 오늘날 북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페 출신 무슬림이었지요. 압둘라흐 씨는 아홉 살이던 해에 이스탄불에 당도했어요. 전 재산을 이고 지고 서울에서 오사카에 이르는 거리를 건넌 거지요. 압둘라흐 씨처럼 많은 이들이 고향을 떠났는데도 탄압은 멈출 줄을 몰랐고, 끝내 그리스와 튀르키예는 서로 인구를 교환하기로 협의해요. 때는 1923년. 로잔에서 교환 협약이 체결되고 200만에 이르는 인구에게 단 2년 안에 떠나라는 명이 떨어져요. 다른 선택지는 없었어요. 두 정부는 선언해요. 집은 마련해 줄 테니 이 땅을 곧장 떠나. 정해준 동네에 가서 같은 신자끼리 살아. 그 동네가 좋든 말든, 그 동네 말을 알든 모르든, 하여간에 속히 떠나. 이 법규에 따라 아나톨리아에 들어온 무슬림 이민자들은 뮈바딜mübadil이라고 불러요. 튀르키예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난 무하지르 자손이야, 너희 조부모님은 뮈바딜이지, 아마? 이런 얘기를 곧잘 들을 수 있어요. 이 마을 사람들 이만큼을 저리로 보내고, 저 마을 사람들을 그만큼 데려온다. 말은 쉽게 들리지만 어마어마한 고난이 뒤따르는 일이었겠지요.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 이사하기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요.
이스탄불은 이 인구 교환의 대혼란에서 예외 지역으로 선정되었어요. 상업, 해운, 금융 분야의 요직에는 룸들이 앉아 있었거든요. 게다가 총대주교청의 문제가 걸려있었어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비잔티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하고 동방 정교회의 심장, 총대주교좌는 줄곧 이스탄불에 위치해왔어요. 그리스와 서구 열강들은 비잔티움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총대주교좌를 존속시키길 소망했지요. 복잡한 협상 끝에 양 정부는 서트라키아의 무슬림과 이스탄불의 룸을 상호 예외 대상으로 인정하기로 해요. 이렇게 어렵사리 10만 명 정교회인들이 이스탄불에 남았지만, 이스탄불 역시 최후로 엎어진 모래시계 처지에 불과했어요. 2차 대전 중 튀르키예 정부는 긴급 재정 확보를 명목으로 부유세를 걷어요. 그런데 비무슬림들에게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금액을 부과해요. 부과된 만큼 세금을 내지 못한 이들은 노역 현장에 강제 동원됐어요. 많은 비무슬림들은 재산을 헐값에 처분하고 사실상 파산했어요.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앉은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나라를 떠나야 했지요. 비무슬림 엘리트들이 축출된 후 생겨난 공석을 무슬림들이 채웠어요. 대규모 경제 재편성이 일어난 것이지요. 내가 언어 습득을 위해 여러 번 돌려 본 시리즈 ≪더 클럽≫은 비무슬림에게서 무슬림으로 경제권이 넘어가던 시기를 배경으로 삼아요. 주인공은 이 부당한 부유세 정책으로 파탄 나버린 유대인 가정의 딸이지요. ≪더 클럽≫과 ≪레프테르≫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사건이 하나 있어요. 1955년 일어난 이스탄불 포그롬이 그것이지요.

배경은 키프로스에 있었어요. 1950년대에 들어, 영국령이던 키프로스를 놓고 그리스와 튀르키예는 공방을 벌여요. 키프로스와의 합병을 요구하는 그리스에 반해 튀르키예가 들고 일어선 거지요.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테살로니키에 있는 아타튀르크 생가에 폭탄이 터졌다는 보도가 나요. 실질적인 피해는 미미했지만, 이 보도는 튀르키예의 민족주의자들을 자극하는 촉발제가 되어요. 폭도들은 이스탄불 전역의 룸 거주지를 거침없이 덮쳐요. 무자비한 파괴와 약탈이 일어나지요. 왕자들의 제도와 레프테르 집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흥분한 군중이 레프테르의 자택을 둘러싸고 돌을 던지기 시작했을 때, 페네르바흐체 팬들이 모터보트를 타고 달려와 레프테르를 비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요. 다행히 레프테르는 이스탄불에 남아 생을 마감할 수 있었지만, 이 사건 이후 룸들은 섬을 비롯한 이스탄불 전역에서 자취를 감춰요.


왕자들의 제도를 걷다 보면, 복구도 판매도 되지 않은 채 스러져가는 그리스식 저택이 간간이 보여요. 문간에서는 부랴부랴 떠나는 룸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지요. 유배로 시작된 섬의 역사는 퇴거로 마감되었어요. 핀셋으로 들어올린 쌀알 같은 운명이었지요. 그러나 삶이라는 것은 무언지, 부유하는 땅에서 부유하던 사람들이 일궈낸 풍경은 그저 감탄스럽기만 해요. 언덕 위 수도원, 텅 빈 보육원, 팻말 하나 없는 기도실, 말들이 떠난 마차 광장, 누군가의 부서진 정원, 현판이 바랜 학교, 무덤과 비석들, 사방에는 눈부신 바다, 바다, 바다···. 이렇게 당신께 편지를 쓰다 보니 내 마음은 어느덧 섬에 엎어져 있어요. 오늘은 슬픔으로 섬 역사의 포문을 열었지만, 다음에는 활기차고 싱그러운 섬의 면모도 양껏 보여드리도록 할게요.
그리스와 튀르키예는 그래서 앙숙이기만 할까요? 이스탄불에 와서 살게 될 줄은 꿈도 못 꾸던 때, 그리스 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원과 하루≫라는 영화를 보고 한동안 사운드트랙을 찾아들은 적 있어요. 엘레니 카라인드루가 작곡한 곡들 링크에 달린 댓글 중 태반은 튀르키예어로 쓰였더군요. 그녀 역시 그리스인인데도요. 그게 난 의아스러웠어요. 나중에 여기 온 후 듣기로, 그 사운드트랙은 튀르키예에서 너무 인기를 끈 나머지 한 가게에서 옆 가게로 들어가면 같은 곡이 연결될 정도였대요. 영화의 끝에서 주인공은 죽은 아내에게 묻지요. 내일은 얼마나 갈까? 아내가 건넨 답이 마치 섬들의 운명 같군요. 영원과 하루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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