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고래로 살아가기

2026년 9월 15일

2026.09.16 | 조회 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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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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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남자들 무리와 나는 상점이 늘어선 길목에 진입했어요. 자동차가 다닐 수 없을 정도로 폭이 좁아, 프랑스 남부 생폴드방스의 골목길이 떠올랐지요. 골목 양쪽에는 빈티지 소품들로 아늑하게 단장한 커피숍과 기념품 가게가 이어졌어요. 어떤 가게는 관광객으로 북적거려 들어설 틈조차 없더군요. 가게 쇼윈도 전면에는 작은 유리병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었어요. 튀르키예 전통 탄산음료, 가조즈를 파는 가게였지요. 오스만 제국에서 탄산음료 사업을 시작한 건 비무슬림계, 특히 그리스계 룸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이들은 프랑스에서 기계를 들여와 탄산수에 과일향을 더한 가조즈를 만들어 팔았지요. 오늘날에도 가조즈는 어디에서나 파는 흔한 음료랍니다. 그러나 가조즈보다, 나는 향도 당도 없는 튀르키예의 자연 탄산수를 즐겨 마셔요. 인공 주입한 탄산이 아니라, 탄산가스가 자연적으로 녹아든 광천수를요. 튀르키예에는 파묵칼레, 부르사, 카이세리 등 자연 탄산수가 나는 지역이 많아요. 튀르키예 현지에서 '소다'라고 하면, 자연에서 퍼올린 이 광천수를 의미하지요. 튀르키예 탄산 광천수는 내가 살면서 맛본 탄산수 중 가장 강력해요.

 

처음 튀르키예 탄산수 맛을 내게 알려준 것은 베를린에서 함께 산 룸메이트, 베카였어요. 베카는 맨해튼 출신 유대인으로, 그녀 할머니가 나치에 의해 시민권을 박탈당한 독일계 유대인이라 독일 시민권을 쉽게 얻을 수 있었지요. 베카는 나보다 어렸지만 생활력이 막강하고 이재에 밝았어요. 애당초 집 계약도 베카 이름으로 되어 있었고, 소음 문제로 반상회가 열린다거나, 건물에서 지붕 공사를 해 월세 흥정을 할 수 있게 됐다거나, 러우 전쟁 이후 가스값이 폭등해 가스 업체를 새로 골라야 했다거나, 건물 안에 자꾸 노숙인이 들어와 헤로인 주사를 놓는다거나 하는 상황에 베카는 척척 나서 해결책을 내놓곤 했어요. 가정에까지 음료를 대량 배달해 주는 서비스가 있다는 걸 알려준 이도 그녀였지요. 베카는 생수 주문하기를 참 좋아했어요. 튀르키예인 배달원이 섹시하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지요. 두 번째 이유는, 그녀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탄산수가 시중에 흔치 않기 때문이었어요. 그녀는 목이 타도록 강한 탄산을 즐겨 마셨거든요. 문간에서 배달원을 기다리며, 베카는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배달원도 배달원인데, 진짜 죽이는 건 튀르키예 탄산수야. 여행 가서 먹어보고 눈알이 뽑히는 줄 알았다니까.

 

이후 다른 동네로 이사했을 때, 광장 어귀 한 편의점의 단골이 되었어요. 미군 공군기지 PX에서 일하다 은퇴한 튀르키예계 노인이 운영하는 곳이었지요. 그이는 아주 늦은 시간까지 텔레비전을 켜놓고 자리를 지켰어요. 어느 밤 귀가하는 길에 냉장고를 훑어보는데, 베카가 늘 주문하던 브랜드의 탄산수가 눈에 들어왔어요. 반가운 마음에 그 탄산수를 집어 들어 카운터로 가져갔지요. 노인이 바코드를 찍으며 말하더군요. 톡 쏘는 거 좋아하나벼? 나는 그에게 답했지요. 제가 듣기로 진짜 맛있는 건 튀르키예 탄산수라던데요. 그러자 그가 안경을 쓱 내리며 내게 속삭였어요. 어째, 하나 마셔볼 텨? 그는 카운터 아래에 숨겨 놓은 박스에서 20cl짜리 초록색 병을 꺼내 건넸어요. 누가 자동차로 실어왔는지 모를, 밀수된 튀르키예산 탄산수였지요. 주인은 턱 끝으로 카운터에 노끈으로 매달린 병따개를 가리켰어요. 뚜껑을 따자, 탄산이 얼굴에까지 튀더군요. 베카의 말이 백 번 옳았지요. 그리고 어느새 나는 그 탄산수의 나라에 와, 얼굴에 튀는 광천수를 마음껏 마시며 살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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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조즈 가게를 지나 삼거리에서 무슬림 남자들은 흩어졌어요. 아야 소피아 그림이 그려진 자석과 때밀이 수건을 파는 매대 사이로 희미한 현판이 하나 보였지요. 얀볼 시나고그. 내가 찾던 곳이 여기였지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불가리아 얀볼 출신 유대인들이 18세기에 지은 시나고그예요. 활짝 열려 있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닫힌 문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마음이 갑갑해졌어요. 나는 근처 다른 회당, 아흐리드 시나고그를 향해 걸었지요. 아흐리드 시나고그의 이름 역시 지명에서 왔어요. 북마케도니아의 오흐리드 출신 유대인들이 콘스탄티노플로 넘어와, 1430년 이 시나고그를 완공했지요. 그들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유대인 공동체라고 여겨지는 로마니오트 유대인이었어요. 기원전 3세기 헬레니즘 시대부터 그리스에 살아온, 그리스어를 쓰는 유대인이었지요. 그들이 원래 거주하던 오흐리드(당시 알바니아 공국)는 오스만 술탄 바예지드 1세 손아귀에 넘어가요. 이후 로마니오트 유대인들은 아직 비잔티움 땅이던 콘스탄티노플로 이주하지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곳 역시 함락되어 곧 오스만의 수도가 되지요. 이 오흐리드 유대인들은 무슬림들의 기독교 땅 정복을 어떻게 바라봤을까요? 그들은 아마도 안도했을 터예요. 그 세기 말부터 오스만 내 유대인들의 길이 활짝 트이기 시작했으니까요. 어째서였을까요? 그 연원을 찾으려면, 이베리아 반도로 날아가야 하지요.

 

1469년 페르난도 2세와 이자벨 1세가 결혼하며 스페인은 통일 왕국으로 나아가요. 그곳의 세파르디 유대인들은 가톨릭으로 강제 개종을 종용당하지요. 겉으로는 개종한 척, 그러나 몰래 유대교를 계속 따르는 이들을 색출하고자, 두 군주는 종교재판소를 설립해요. 1492년에 이르러 이베리아 반도 최후의 이슬람 왕국이던 그라나다 토후국마저 함락되자, 두 군주는 알함브라 칙령을 내려요.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들은 7월 말일까지 왕국을 떠날 것. 칙령을 내린 것은 3월 말이었으므로, 고작 4개월이 주어졌지요. 끝까지 개종하지 않은 이들은 자국을 떠나 일단 부랴부랴 포르투갈로 향해요. 거기서도 쫓겨난 유대인들은 북아프리카, 타 유럽 국가, 그리고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어요.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손아귀에 넣고 나서 사흘 뒤, 아나톨리아 각지의 로마니오트 유대인 공동체에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해요.

하나님은 내게 많은 나라를 주셨고, 아브라함과 야곱의 자손들을 보호하며 먹이고 나의 보호 아래 두라 명하셨다. 누가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와서 정착하여, 자기 소유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서 평화롭게 살고, 자유롭게 교역하고, 재산을 소유하고 싶은가?

편지 내용은 수도 정복으로부터 70년이 지나, 유대교 학자 엘리야 카프살리에 의해 주장된 것이라 진위를 판단하기 어렵지만, 술탄 메흐메드 2세가 새로 세운 수도에 유대인을 포함한 비무슬림 공동체를 필요로 했음은 사실이에요. 그는 비무슬림의 인력과 그들의 경제적 역량, 네트워크가 제국 번성에 큰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지요. 실행력 으뜸이었던 그는, 편지에 그치지 않고 아나톨리아 각지의 유대인을 강제로 콘스탄티노플에 이주시키기까지 해요. 그렇게 새로 유입된 유대인들이 출신 공동체별로 회당을 가질 수 있게 암묵적 허가를 내려주지요. 또한, 정교회 총대주교를 새로 임명했듯 크레타 출신 모세 카프살리(앞서 메흐메드 2세의 편지를 기록한 학자의 친척)를 수석 랍비로 임명해요. 이는 공식적으로 유대인 공동체를 자신의 제국 일부로 포함시키겠다는 인가나 다름없었지요. 메흐메드의 아들 바예지드 2세가 왕좌에 올랐을 때, 페르난도 2세와 이자벨 1세에 의해 쫓겨난 세파르디 유대인들이 오스만 제국으로 쏟아져요. 이 상황을 두고 술탄이 이렇게 말했다는 일화가 있지요.

그대들은 페르난도를 현명한 군주라 부르는가? 자기 나라는 가난하게 만들고 내 나라를 부유하게 만든 자를?

4만에서 6만 명으로 추산되는 세파르디 유대인들이 오스만 제국에 유입되고, 이들은 콘스탄티노플과 살로니카(테살로니키)에 집중적으로 정착해요. 17세기에 이르러서는 항구 도시 스미르나(이즈미르) 역시 유대인 집성지로 자리를 굳히지요. 오스만에 도달한 이 유대인들은 당연히도 고향에서 쓰던 카스티야어를 사용했어요. 약간의 히브리어를 섞어 사용했을 뿐이었지요. 그러나 이베리아 반도에서 몸이 멀어짐에 따라, 말 역시 독자적으로 진화해요. 튀르크어, 그리스어, 아랍어, 프랑스어까지 뒤섞이지요. 이 언어를 유대 스페인어, 혹은 라디노어라고 부른답니다. 라디노어는 또 지역에 따라 다시 갈라져, 튀르키예와 로도스 쪽에서 사용되는 '동부 라디노어'에는 카스티야어 특징이 더 살아있고, 그리스·마케도니아·보스니아·세르비아 쪽의 '서부 라디노어'에는 북스페인·포르투갈어적 요소가 더 두드러진다고 알려져 있지요. 실제로 불가리아에 거주하는 세파르디 유대인들의 라디노어를 들어본 적 있어요. 단어는 스페인어가 주를 이루지만 억양은 포르투갈어에 더 가깝더군요. 듬성듬성 튀르키예어 명사나 부사가 들려오기도 했고요.

 

라디노어는 현재 소멸 위기 언어로 지정된 상태랍니다. 가장 큰 타격은 오스만 제국 해체 이후, 그리스령이 된 살로니카가 나치 독일 점령하에 들어가며 발생했지요. 살로니카는 한때 발칸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어요. 그만큼 유대인 인구 비율이 높아, 전성기에는 도시 내 가장 많이 쓰인 언어가 라디노어였을 정도였지요. 4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은 기차에 실려 살로니카에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로 끌려갔어요. 이베리아 반도에서, 발칸 반도로, 중유럽으로, 이동을 거듭한 이들은 연고도 없는 먼 땅에서 허망하게 절멸했어요. 콘스탄티노플이 속한 튀르키예 공화국은 2차 대전에서 중립을 지키며 이러한 대참극을 막을 수 있었어요. 그러나 이 도시의 유대인들은 다른 위기를 맞이하지요. 앞서 룸 이야기를 해드리며 여러 차례 언급한, 1942년 부유세 정책이 그것이지요. 이 정책으로 비무슬림들에게는 150%에서 많게는 200%가 넘는 세금이 부과되었어요. 그만큼 세금을 내지 못하면 재산을 몰수당하고 강제 노역소에 끌려가야 했지요. 유대인들은 이 시기 즈음부터 아나톨리아에서 서서히 빠져나가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 그리로 대거 이주하지요.

 

올해 초 하메네이 관저에 폭탄이 떨어진 날, 나는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참이었어요. 집주인 이갈은 거실에 알 자지라 채널을 틀어놓은 채 좌불안석이었지요. 이스라엘에 대다수의 친인척이 거주하기 때문이었어요. 이갈 역시도 이스라엘에 잠시 살다 온 튀르키예인이고요. 우리는 식탁에서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어요. 식탁 한가운데에는 홈이 아홉 개 파인 푸른 도자기가 놓여 있었어요. 홈은 마른 담뱃잎인지, 먼지 덩어리인지로 채워져 있었지요. 내 옆에 앉은 친구가 도자기를 어루만지며 그게 뭔 것 같냐고 물었어요. 유선형으로 생긴 모양 때문에 내 눈에는 작은 고래 조각처럼 보였지요. 그것이 하누카 때 쓰는 촛대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 집에서 나올 때가 다 되어서였어요. 아주 적지만, 유대인들은 아직도 이 땅 일부에 남아 있어요. 그들 대부분은 등에 파인 아홉 개 홈을 숨기고 수심 깊은 곳을 헤엄치며, 고래인 척 살아가지요.

 

다리오 모레노 <추억은 환상이 되었군>

처음 독일에서 다리오 모레노 음악을 들려준 친구는, 이 가수가 이즈미르를 대표하는 가수 중 한 명이라고 했어요. 아직 튀르키예에 대해 전혀 모를 때라, 웬 튀르키예 가수 이름이 다리오고, 또 모레노야? 하고 생각했지요. 다비드 아루게테라는 이름을 갖고 태어난 모레노는 유대인 고아원에서 자랐고, 유대인 학교를 다녔으며 유대인 성인식에서 노래를 부르며 커리어를 시작했지요. 튀르키예어, 라디노어, 프랑스어 등을 구사했던 그는 튀르키예 전역을 넘어 프랑스에서도 큰 사랑을 받으며 자국민들의 긍지를 높여 주었지요. 선술집에서는 아직도 모레노의 노래가 한 곡은 꼭 들려온답니다. 그의 묘지는 이스라엘 홀론에 있다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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