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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성채, 페네르 룸 남자 고등학교에서 평지로 내려오니 바닐라 아이스크림처럼 새하얀 성당이 보였어요. 푸른 바다와 대비되어 눈이 부시게 빛나고 있었지요. 금가루를 흩뿌린 것처럼 군데군데 묻은 금박 장식이 건물을 더욱 돋보이게 했어요. 공식 명칭이 스베티 스테판 성당인 이 교회는, '철의 성당'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어요. 그러나 튀르키예인들에게 이 성당은 대체로 이렇게 기억되는 듯하지요. 아, 금각만에 있는 그 불가리아 성당?


오스만 내 불가리아인은 본래 개별 교회를 가졌었어요. 그러나 1767년 자치권을 잃고 그리스 정교회에 흡수되어요. 불가리아 성당에 그리스인 성직자들이 배정되었고, 성도 대다수가 이해조차 할 수 없는 그리스어로 예배가 진행되었지요. 세르비아인이나 알바니아인들도 비슷한 수모를 겪었어요. 그들 또한 그리스 정교회 산하로 들어갔지요.
불가리아 성직자이자 역사가, 파이시 힐렌다르스키의 저서 《슬라브-불가리아 역사, 1762》에는 당시 상황을 짐작해볼 수 있는 글귀들로 가득해요. 불가리아 화폐(유로로 바뀐 이후에는 2유로 동전에 그의 얼굴이 박혀있지요)에도 등장하는 힐렌다르스키는 이렇게 통감했어요. 오, 어리석은 자여! 어째서 스스로를 불가리아인이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며, 어째서 모국어로 읽고 말하지 않는가? 불가리아인들은 한때 강력하고 영광스럽지 않았던가? 강한 로마인, 지혜로운 그리스인들로부터 조공을 받지 않았던가? 그는 노골적으로 그리스인 성직자들의 그리스화(헬레니제이션) 정책에 경고를 던지며, 불가리아어와 불가리아 정체성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촉구했어요.
이로부터 87년 후, 콘스탄티노플의 세력 있는 불가리아 상인 스테판 보고로디는 술탄에게 청원서를 제출해요. 금각만 변에 있던 자신의 저택을 불가리아인 성직자 사택 용도로 쓰게 해 달라는 것이었죠. 이는 받아들여졌고, 보고로디는 이 부지를 불가리아인 공동체에 기증했어요. 저택은 곧 사택이 아닌 예배당으로 쓰이기 시작했어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공동체는 아예 새 교회를 짓기로 결정해요. 1872년에는 더 이상 그리스 정교회에 예속되지 않겠노라, 자치권까지 선언하며 총대리[1]를 스스로 선출해버리지요. 이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공의회를 소집해요. 민족을 단위 삼아 분리를 주장해? 그건 민족적 이기주의야. 이렇게 힐난하면서요. 러시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교회가 공의회 참여를 거부한 가운데,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총대주교청 등의 동의를 얻어 불가리아 교회는 파문에 이르러요. 그러나 파문을 당하든 말든, 불가리아인 공동체는 대대적인 설계 공모전까지 벌이며 새 건물 짓는 데 열중하지요.
오늘날 스베티 스테판 성당이 세워진 지대는 늪지 같은 지반으로 이루어졌어요. 따라서 전통적인 석조 건축은 부적합했지요. 오스만 태생 아르메니아계 건축가, 호브세프 아즈나부르는 가볍고 튼튼한 철골 조립식 건물을 설계했어요. 오스트리아의 철강·교량 건설 기업 루돌프 필리프 바그너사가 주철 부품을 제작했고, 무려 다뉴브강과 흑해를 건너 운반된 부품은 콘스탄티노플 현지에서 조립됐어요. 석조 건물처럼 보이게 하려고 건물 외벽은 하얗게 칠했지요. 약 6년간의 공사 끝에, 스베티 스테판 성당은 1898년 성대한 개관식을 올려요.
같은 시기에 같은 동네에 지어진 이웃 건물이, 바로 우리가 지나친 붉은 성채랍니다. 맞아요.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렇게 긴 길을 돌아왔지요. 도대체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인들이 왜 그토록 사치스러운 고등학교를 지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요. 불가리아인들이 그리스인 둥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모전을 벌이고 건축가를 물색하는 동안, 그리스인들은 성채에 버금가는 학교를 언덕 위에 지었어요. 감히 우리에게 반기를 들어? 상대가 누군지 잘 우러러보라고. 이스탄불 페네르 구역의 가장 아름다운 두 건물은, 말하자면 민족을 앞세운 다툼의 상징물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결 구도에 있던 두 역사적 건물의 말로는 초라해요. 페네르 룸 남자 고등학교는 몇 년 전 지진에 취약한 건물로 지정되었어요. 천문학적인 지진 보강 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학교는 다른 곳으로 이전했어요. 현재 붉은 성채는 텅 비어있는 상태랍니다. 이전도 이전이지만, 이전하기 직전 그리스계 학생의 수는 고작 서른 명 남짓에 불과했다고 알려져 안타까움을 자아냈지요. 스베티 스테판 성당도 건물 노후와 부식으로 한동안 폐쇄되었어요. 다행히 2011년 들어 상호주의 원칙에 의해 복구가 진행되었지요. 발칸 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모스크 중 하나로 관리 부실 탓에 무너질 뻔했던, 불가리아의 주마 모스크를 복원하는 조건으로요. 어쨌거나 복원은 이뤄졌으니 그만하면 만족스러운 결과 아니냐고요?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현재 스베티 스테판 성당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관광객이에요. 튀르키예에 거주하는 불가리아인 정교회 신도는 거의 찾아볼 수 없지요. 1898년 봉헌식 당시 8만 명에 달했던 오스만 내 불가리아 정교회인에 비해, 오늘날 튀르키예 영토 내 신도는 수백 명에 그칠 뿐이지요.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드릴게요. 1980년대에 들어,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에서 튀르키예로 이민자가 대거 유입되었어요. 30만에서 많게는 36만 명 정도가 이주했을 것으로 추산하지요. 친소 공산당 지도자였던 토도르 지프코프의 정책에 따라, 당시 불가리아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은 강제 동화되어야 했어요. 동화 대상 인구는 85만 명에 달했지요. 이들은 불가리아식으로 이름을 개명해야 했으며, 더 이상 튀르크어를 쓰거나, 이슬람 전통 복식을 하거나, 할례를 할 수 없었어요. 내 주위에도 이 시기에 튀르키예로 들어온 이들이 있어요. 내 손위 동서 아이셰는 소피아에서 태어나 어릴 때 이스탄불로 이주했어요. 아이셰는 불가리아식 오크라 피클을 기가 막히게 담지요. 또 다른 친구, 아흐멧 역시 1989년 불가리아에서 태어났어요. 그는 한쪽 팔뚝에 그의 불가리아식 이름 '알렉산더르'를 키릴 문자로 새겼어요. 그의 부모는 호적에 이 불가리아식 이름을 올려야 했지만, 그는 집에서 언제나 아흐멧이었지요. 아흐멧은 동화 정책에 대해 설명하던 와중, 자신의 부친의 경우가 흥미롭다며 말을 이어갔는데, 정말로 개명하기 싫었던 그의 아버지는 동사무소에 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알겠소, 알았어! 그깟 거 여기서 정하지 뭐. 그럼 이름은 흐리스토. 성은 흐리스토프.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몸에 덕지덕지 바른 무슬림, 흐리스토프 씨네 가족은, 아흐멧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튀르키예 에디르네로 이주했지요. 스베티 스테판 성당을 둘러보는 내내 난 아이셰와 아흐멧을 떠올렸어요. 그런데 경내에서 나와 생각해보니, 두 사람 다 이 성당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에 허무해졌어요.
성당에서 나와 바다를 따라 조성된 공원을 걸었어요. 페네르에서 발라트라는 동네로 넘어가는 경계였지요. 14세기에 지어진 나직한 그리스 정교회 건물이 방치되어 있었어요. 그 옆에는 무슬림 가족이 모여 앉아 고기를 굽고 있었지요.

자세히 불판을 들여다보니 고기만 굽는 게 아니었어요. 가지며 양파며 고추며 야채도 함께 굽고 있었지요. 육향을 입은 채소에서 나는 향기에 군침이 돌았어요. 녹지가 사라지고 차도가 보일 즈음, 작은 모스크가 하나 보였어요. 그러나 그보다 내 눈에 더 선명히 들어온 것은 모스크 맞은편의 내장탕집이었지요. 이름하여 이름난 발라트 내장탕집.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간편하고 저렴하게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방법. 게다가 한국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방법. 후루룩 먹고 떠날 수 있는 국 한 사발이지요. 현지인들에게 두루 사랑받는 국으로는 렌틸 수프나 닭고기 수프를 꼽을 수 있어요. 한국 매체에 단골로 소개되어 유명해진 베이란 국 같은 경우, 현지에서는 호불호가 많이 갈려요. 고깃국 자체를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요. 베이란은 양의 어깨살이나 목살 등을 뼈와 함께 푹 고아서 만들어요. 거기에 버터에 볶은 고춧가루와 마늘, 살코기, 쌀 등을 끼얹지요. 재료가 다르지만 신기하게도 맛은 우리의 육개장과 거의 비슷해요. 베이란은 동남 아나톨리아, 가지안텝 지역의 향토 음식이에요. 따라서 이스탄불 깍쟁이들은 베이란 얘기를 꺼내면 그게 뭐냐고 내게 되려 묻기도 한답니다. 뭔지는 알지만 한 번도 안 먹어봤다는 사람들도 많고요. 베이란은 매우 지역색 강한 음식이라, 가지안텝 출신의 주방장이 있거나 향토 음식을 파는 전문점에서만 먹을 수 있어요.
그보다 더 대중적인 고깃국으로는 켈레파차가 있어요. 켈레는 머리, 파차는 다리를 뜻해요. 말 그대로 양의 머리와 족을 오래 삶아 머릿고기를 함께 넣어주는 국이 켈레파차랍니다. 켈레파차는 베이란보다 조금 더 걸쭉하고 기름기가 많아요. 기름을 덜 걷어낸 사골국 같지요. 켈레파차는 국 전문점이라면 거의 대부분 찾아볼 수 있어요. 내장탕집에서는 백이면 백 이 켈레파차를 함께 팔지요. 한국인인 내게 베이란과 켈레파차는 이국 생활을 그나마 견디게 해주는 고마운 보양식이에요. 그전에는 국 문화가 없는 유럽에서 살았기에, 대량으로 밤새 끓인 고깃국을 어디서나 저렴하게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난 감동스럽기만 하지요. 내가 베이란과 켈레파차가 없어서 못 먹는다고, 게다가 아침에 백반집에 가서 그걸 먹는 걸 즐긴다고 하면 튀르키예인들은 길길이 뛰어요. 그런 하드코어한 음식을 아침부터 어떻게 먹느냐고요. 양고기 국에 마늘을 듬뿍 끼얹어 먹으면 그 자리가 내게는 고향이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꿈에도 모르겠지요. 나는 이름난 발라트 내장탕집에 들어가 켈레파차 한 그릇을 주문했어요. 그다음 행선지로 가려면 배가 두둑해야 했기에, 고기 한 점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싹싹 해치웠지요. 텅 빈 구리 그릇이 비친 쇼윈도 너머로, 두루마기처럼 긴 옷을 입은 무슬림 남자들이 떼 지어 지나갔어요. 나는 무엇에 홀린 듯 그들을 따라나섰어요.

튀르키예에서 가장 사랑받는 발칸 작가는 단연 고스포디노프예요. <타임셸터>라는 책으로 부커상을 수상한 불가리아 작가,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책 곳곳에는 발칸 반도의 유머가 깊고 녹진하게 스며있어요. 따라서 그 문화를 직간접적으로 아는 튀르키예인들에게도 큰 인기를 끄는 듯해요. 그의 최근작 <죽음과 정원사>가 튀르키예어로 출간되었을 때, 집 근처에서 열린 그의 북토크(북토크 브이로그)에 간 적 있었어요. 어찌나 문전성시던지, 독자들의 열기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요! 무려 자동차로 열 시간을 달려 고스포디노프를 보러 온 이들도 있었어요. '골로간'은 고스포디노프의 책들을 지난 십오 년 이상 영어로 번역한 번역가 앤젤라 로델의 불가리아 에스노-록 프로젝트예요. 미국인인 그녀가 불가리아인 전 남편과 불가리아에서 결성해 활동했지요. 고스포디노프는 그녀의 곡을 공유하며 이렇게 말한 바 있어요. 당신의 번역가가 전문 가수일 경우, 당신의 소설은 간단히 노래가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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