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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는 이집트계 코미디언 카림 라흐마의 다마스쿠스 여행 영상을 봤어요. 회복의 기세 역력한 시장과 활력 있는 길거리 풍경을 보니 안도감이 들더군요. 그 지난한 내전이 정말 끝났구나, 실감이 났지요. 내 주위에도 요즘 시리아 여행을 계획하는 친구들이 생겨나고 있어요. 한편, 지난 주에 마주친 한 개발자 친구는 곧 베이루트에 방문할 거라더군요. 레바논 지인 얘기를 들으니 요즘 안전하다더라면서요. 분쟁이 빈번한 이 지역에서는 늘 이러한 이야기가 오가요. 요즘 그 동네 정세 괜찮다니까 갈 거면 빨리 다녀와. 뭐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항시 서려있지요.
내가 서둘러 다녀오길 잘했다고 여기는 도시는 예루살렘이에요. 당시 내가 만나던 남자는 이브라힘이라는 DJ였는데, 그가 텔아비브 어느 테크노 클럽에 초대를 받은 참이었지요. 마침 베를린에서 텔아비브까지 가는 비행기표가 저렴해 나도 동행하기로 결심했어요. 텔아비브 시내는 생각보다 작아서 시간이 넉넉했어요. 이브라힘과 나는 내친김에 예루살렘도 당일치기로 둘러보기로 했지요. 그리고 그것은 재앙과도 같은 결정이었어요.
갈등의 불꽃은 통곡의 벽 앞에서 지펴져 점점 커지다, 무그라비 문 앞에서 타올랐어요. 원인은 이브라힘의 완고한 의지였어요. 여기까지 온 이상, 바위의 돔을 혼자라도 꼭 봐야겠다는 거였죠. 당신도 잘 아시겠지만,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네 지구로 분리되어요. 유대인 지구, 무슬림 지구, 아르메니아인 지구, 기독교 지구지요. 그중 바위의 돔이 있는 성전산은 유대인 지구와 무슬림 지구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 바위의 돔과 알아크사 모스크 건물 내부는 오직 무슬림만이 출입할 수 있어요. 성전산 경내에 이르는 무그라비 문도 비무슬림들에게는 하루에 단 몇 시간만 열릴 뿐이에요. 우리는 하필 몇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금요일에 그 문 앞에 도달했지요. 이브라힘은 무슬림이 아니었지만, 그의 여권에는 그의 종교가 무슬림으로 표기되어 있었어요. 그럼에도 총대를 멘 경찰들은 그의 차림새가 지나치게 세속적이라고 따져들었어요. 이브라힘이 어릴 때 강제로 외웠다던 기도문이 그때 퍽 힘을 발휘하더군요. 그러나 경찰들은 여전히 경계를 완전히 풀지 않고 물었어요. 저 여자는. 저 동양인 여자는 어떻게 할 거야? 이브라힘은 고민도 않고 대답했어요. 곧 개종할 겁니다. 순간 나는 그에게 악을 버럭 질렀고, 이브라힘은 재빨리 무그라비 문을 지나 미끄러지듯 사라졌어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문을 응시하는 내 옆으로, 갑자기 구레나룻을 길게 기른 두 소년이 다가오더군요. 열 너덧 살 정도 되어보이는 그 애들은 부서져라 몸통을 흔들며 토라를 외기 시작했어요. 한 아이는 끝내 닭똥 같은 눈물까지 흘리더군요. 바위를 향해 흐느끼는 유대인 소년들과, 개종할 의사도 없으면서 무슬림과 연애하는 동양인. 경찰들은 총구를 어루만지며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았어요.
그 여행에 다녀오고 머잖아 이브라힘과 헤어졌지만, 무그라비 문 앞에서의 감흥은 두고두고 남았어요. 지키려 하는 힘과 넘어가려는 힘. 감추려는 힘과 손아귀에 넣으려는 힘. 그 압도적인 척력에 몸이 불에 데인 듯 했지요. 그 해 이후 나는 몇 차례고 예루살렘을 다시 방문하고자 했어요. 다음에는 진짜 꽁꽁 싸매고 가서 나도 성전산이고 바위의 돔이고 들어가 봐? 하지만 생각만 했을 뿐,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어요. 해가 갈수록 소망 실현의 가능성은 점점 떨어져만 가고 있지요. 하지만 대신, 나는 이스탄불에 정착하지 않았던가요. 예루살렘 구시가지만큼 척력의 세기가 크지는 않지만, 한때 이 도시에는 다양한 종교가 다육 식물들처럼 옹기종기 공존했지요. 아브라함이 후후 불어 성형한 유리 테라리움 속에서요. 다행히도 그 흔적이 아직도 일부 남아있지요. 무그라비 문 앞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을 비슷하게 느낀 동네가, 이스탄불에도 있어요. 오늘은 그 동네에 다녀온 날을 복기해 당신께 일러드리려고 해요. 함께 여행하듯.
나는 웬만하면 걸어서 다니는 여행을 즐겨요. 탈것 주행에 능하지 못하기도 하고요. 오늘의 동선은 이스탄불의 유럽 지구, 에미뇌뉘 선착장에서 시작되어요. 선착장 앞 광장은 승객과 상인들로 늘 북적여요. 거기 서면 누구나 웅장한 돔 무더기의 규모와 풍채에 넋을 놓지요. 에미뇌뉘. 이름에서부터 벌써 그 중요성을 간파할 수 있어요. ‘에민(emin)‘은 아랍어에서 온 단어로, 관세 관리라는 뜻이에요. ’외뉘(önü)’는 ~의 앞이라는 뜻이지요. 금각만 수출입 관세를 걷던 사무소가 에미뇌뉘에 위치했었어요. 메흐멧 2세의 콘스탄티노플 정복 이후, 행정이 재편성된 시기부터 이곳은 상업·교통 중심지로서 작용했어요. 튀르키예나 중동 지역에 대형 뉴스거리가 생기면, 에미뇌뉘 선착장 앞에서 취재하는 방송국 기자들을 심심치 않게 보아요. 가끔 한국 기자들을 보는 것도 거기서지요. 특파원들이 배경으로 삼을 만큼, 에미뇌뉘는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어요.


선착장에서 나와 길을 건너면 이집션 바자르가 혼미해진 관광객들의 발목을 잡아끌어요. 이집션 바자르는 바로 옆에 붙어있는 예니 모스크의 부속 시설로 지어졌어요. 모스크 살림 유지에 들어가는 재원을 이 시장을 통해 마련했던 것이지요. 이런 이슬람식 재단 제도를 아랍어로는 와크프(waqf), 튀르키예어로는 바크프(vakıf)라고 해요. 영구 신탁처럼 재산을 신에게 바치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을 공익 목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이지요. 예니 모스크와 이집션 바자르는 바크프로 묶인 관계라고 볼 수 있어요. 시장의 이름은 이집트에서 들여오던 커피, 향신료, 쌀 등에 매겨진 수입 관세로 지어지고 운영됐다는 데서 유래했어요. 오스만의 핵심 속주이던 이집트에서 물품이 들어오면, 이스탄불의 상인들에게 수입세가 매겨졌고, 그 세금은 예니 모스크를 운영하는 자금으로 쓰였던 거지요.
나는 개인적으로 그랜드 바자르보다 규모가 작은 이집션 바자르를 선호해요. 진열된 물건들은 언제나 다채롭고 신선하지요. 일렬로 쭉 늘어선 상점들을 총총 지나 건물 밖으로 나오면, 지붕만 사라질 뿐 노점이 그대로 연결되어요. 우리나라 재래시장과 풍경도, 파는 품목도, 호객 방식도 비슷하지요. 다만 낡은 천막 위로 이리저리 점프하는 고양이들이 이국적인 정취를 더하는데, 마치 만화영화 알라딘 속으로 들어온 듯하답니다.
이 시장 골목에는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칠 수밖에 없는 보물이 하나 숨어있어요. 오스만 제국의 최고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지은 뤼스템 파샤 모스크가 그것이지요. 이 모스크의 별칭은 타일 모스크(Çinili Camii)예요. 모스크의 벽면과 기둥, 미흐랍(메카 방향을 표시하는 벽감) 등이 온통 이즈니크식 타일로 뒤덮여있지요. 규모는 작지만 이스탄불에서 가장 높은 밀도로 이즈니크식 타일이 쓰인 모스크라고 알려져 있어요. 이즈니크식 타일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나요? 이스탄불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이즈니크라는 소도시가 있어요. 고대에는 니케아라고 불렸던 도시로, 규모는 작지만 한때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도 기능한 곳이에요.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던 이즈니크는 오늘날까지도 교황이 찾는 등, 종교적으로 무척 중요한 함의를 갖는 도시지요. 오스만 제국 시기 이즈니크에서는 명나라의 청화백자에서 영향 받은 타일 산업이 꽃펴요. 참고로 눈치채셨겠지만, 타일이라는 단어 자체가 튀르키예에서는 ’중국의(Çini)’라는 의미를 지녀요. 처음에는 특정 스타일의 타일만 그렇게 부르는 줄 알았는데, 장르 불문 모든 도자기 타일을 그렇게 부르더군요. 이즈니크식 타일은 붓으로 꽃이나 풀 등을 그려넣은 스타일이 많아요. 가마 속 고온에서도 색이 선명하게 유지되는 붉은 유약이 도자기 역사상 처음으로 개발되어 쓰인 것이 바로 이즈니크에서라지요. 그 시기가 1550년 무렵이에요. 뤼스템 파샤 모스크가 지어진 것은 그로부터 약 10여년 지난 시점이지요. 건축가 미마르 시난은 이제 막 개발되어 따끈따끈한 신기술을 새 모스크를 통해 전시하고자 했던 모양이에요.

입구가 복작스러운 시장 한편에 숨겨진 탓에, 뤼스템 파샤 모스크는 언제 방문해도 한산해요. 구조가 약간 특이한데, 비좁은 통로를 통해 층계를 올라가야 해요. 말하자면 시장 상가 위에 모스크가 지어진 것이지요. 2층에 들어서면 하얀 대리석이 깔린 넓은 마당이 나오는데, 내가 갔을 때는 고양이 한 마리만 태평하게 어슬렁거리고 있었어요. 거대한 돔을 인 대형 모스크들에서 구조미를 엿볼 수 있다면, 이 작은 모스크에는 낭만과 한가로움이 돋보여요. 분명 시장 한복판인데도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개울가에 앉은 기분이 들지요. 무엇을 사거나 팔거나 먹거나 줍거나 건네는, 인간의 모든 제스처들이 이 모스크에서는 한 폭의 그림으로 남을 듯해요. 타일에 새겨진 붓자국처럼 유약 속에 박제될 듯해요. 한시가 바쁜 장사꾼들은 잠시 기도드리러 들른 이곳에서, 잠시나마 천국의 향기를 맡았을 것 같아요.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덕을 쌓아 내 언젠가 이런 곳에서 영원히 쉬리라.
건축주, 뤼스템 파샤는 누구길래 시민들에게 이런 공덕을 베풀었을까요? 크로아티아의 기독교가정 출신으로 추정되는 뤼스템 파샤(1500-1561)는 술레이만 대제의 대재상이었어요. 술레이만 대제의 딸 미흐리마 술탄과 결혼해 ‘부마 파샤’라고 불리기도 했지요. 그는 재정 감각이 뛰어나 국고를 크게 불렸지만, 개인 재산을 지나치게 축재했으며 씀씀이에 인색했던 대재상으로 평가되어요. 그가 진정으로 복지적 차원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모스크를 지었을 수도 있겠지만, 재산을 상속할 수 있도록 궁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요. 오스만 제국의 법률상 술탄은 신하의 재산을 전부 몰수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바크프에 귀속된 재산은 술탄이라도 건드릴 수 없었지요. 모스크 관리자를 가족으로 지정하면 가족 일원이 모스크의 운영 자금을 관리할 수 있었지요. 뤼스템 파샤 모스크의 자금은 바로 아래에 위치한 상가 임대료에서 나왔어요. 암암리에 상가 수익을 가족에게 상속할 수 있도록 편법을 쓴 것이리라 추측해볼 수 있지요. 그렇다 해도, 대충 지어도 됐을 모스크에 그토록 정성을 쏟은 것은 과연 높이 살 만한 일이지요.
알록달록 빛나는 타일들을 한참 감상한 후, 나는 계단을 내려가 다시 시장으로 나갔어요. 고리버들 바구니 가게, 카펫 가게, 빗자루 가게, 국밥집, 커피콩 가게를 지나 계속 걸으니 저 멀리 금각만이 나타나더군요. 뿔처럼 생긴 만에 금빛 햇볕이 드리운다고 이런 이름이 붙었다지요. 나는 금각만에 안기듯 바다 쪽으로 뛰었어요. 그러나 바다보다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한 노인이었어요. 영어 한마디 할 줄 모르고 길을 완전히 잃은 중국인이었지요. 그는 샷건 마이크처럼 생긴 번역기와 호텔 주소가 적힌 쪽지를 양손에 쥐고 있었어요. 어디가 불편한지 목발까지 짚은 채였지요. 나는 호텔까지 가는 길을 노트에 적어 그에게 건네 주었지요. 그러고도 마음이 불편해, 교량 위 지하철 역까지 함께 올라갔어요. 다리에서 내려오는 길에 나는 이런 장관을 포착했답니다. 다음 에피소드는 이 눈부신 금각만에서 이어가도록 하지요.

영화 <크로싱>에서 두 주인공은 조지아 바투미에서 이스탄불까지 도달해 골목을 배회해요. 이 곡이 흘러나왔을 때, 나는 화면에 비춰진 걸음걸음의 속성이 이해될 듯 했어요. 너무 많은 역사가, 사람이, 사건이 교차한 길을 걸을 때 내 존재는 얼마나 미미하게 느껴지는지요. 에미뇌뉘의 골목에 이르면 그런 감상에 젖곤 해요. 그러나 그런 기분에 나는 비참해지지 않고, 차라리 기묘한 평안함을 느끼지요. 그렇게 겸허히 걷다 보면, 새로이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어요. 마치 중국인 노인을 돕다가 발견한 다리 위 풍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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