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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만을 따라 난 산책로를 걷다 보니 대학교가 하나 눈에 들어왔어요. 카디르 하스 대학교. 거기서 일하는 친구들이 있어 이름은 적잖이 들어보았는데, 그렇게까지 건물이 거대할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카디르 하스는 메르세데스 벤츠 상용차 공장을 튀르키예에 세우고, 코카콜라를 수입해오는 등 성공한 사업가였어요.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세워 말년에는 전재산을 기부했고요. 국가 전매청에 귀속되었던 담배 공장을 이관받아 대학과 박물관으로 탈바꿈한 것도 그의 주요 업적 중 하나라지요. 금빛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위풍당당하게 선 학교의 모습은 무척이나 비현실적이었어요. 담배 공장으로 길이길이 남았다면 아쉬웠을 뻔했지요.
정박된 요트들을 감상하며 걷다 보니 트램 역이 하나 나왔어요. 역명이 내가 향하던 동네 이름이기도 했지요. 페네르. 나는 그 역에서 대로를 건너 아주 좁은 골목에 들어섰어요. 파스텔색으로 알록달록 칠해진 건물 외벽에 담쟁이 넝쿨이 늘어서고, 야자수가 한가로이 심어져 있는 풍경이 꼭 에게해 휴양지에 들어선 기분이었어요.

그 골목에서 내 눈길을 곧장 끈 것은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하는 한 건물이었지요. 코린트식 기둥 위에는 그리스어로 이렇게 적혀있었어요. 총대주교청 마라쉴르 초등학교. 폐교 후 리모델링 중이라는 이 초등학교는 러시아 제국의 그리스계 상인, 그리고리오스 마라슬리스의 기부로 1901년 개교했대요. 카디르 하스 대학교처럼 자선사업의 일환으로 세워진 학교였던 거지요. 마라슬리스는 스무 해 가까이 오데사의 시장을 지낸 정치인이기도 했어요. 언뜻 들어서는 러시아 제국의 시장이, 콘스탄티노플 한복판에, 그리스계 초등학교를 지었다는 설명이 비합리적으로 느껴져요. 이는 아마도 우리가 그리스인 디아스포라에 대해 별로 들어본 일이 없어서일 터예요.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지중해와 흑해, 발칸반도, 서유럽 등지에 고루 퍼진 그리스인들은 자민족을 위해 활발한 자선 사업을 펼쳤어요. 특히 공동체의 초석이 되는 학교와 교회 짓는 데 힘썼지요. 우리가 부유한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떠올렸을 때 연상되는 활동들을, 그리스인들도 매우 비슷하게 전개했어요. 그리스어로 마라슬리스처럼 거액을 기부한 이들을 따로 칭하는 용어까지 있었지요. 에스니코스 에프예르게티스, 그 뜻은 국민적 은인. 그런데 그리스인 디아스포라의 이러한 자선 활동, 아니 그들의 디아스포라 역사 자체가 유대인에 비하면 존재감이 미미해요. 이스라엘에 비해 그리스라는 국가가 비교적 일찍이 건국되어 그럴까요? 실제로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오데사 등지의 그리스인 공동체는 포그롬이나 법률적 추방에 의해 차차 소멸했고, 그들 대부분은 그리스로 돌아갔어요. 그렇다 해서 그 과정이 고생스럽지 않았던 것은 전혀 아니지만요. 그렇게 돌아간 그리스인들은 본토 사람들에 의해 엄청나게 배척당했으며 차별을 겪었지요.

마라쉴르 초등학교 파사드를 다시 살펴볼까요? 창문 아래에는 이런 글도 쓰여 있어요. 에피 콘스탄티누. 개교 시 총대주교로 재위 중이던 콘스탄티노스 5세의 이름을 새긴 것이지요. 이 학교는 분명 마라슬리스의 자금으로 지어졌지만, 사실 학교를 지으라는 명은 콘스탄티노스 5세로부터 떨어졌어요. 학교 부지 자체가 원래 동방 정교회 총대주교청에 속했지요. 가톨릭 신자들에게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이 그렇듯, 전 세계 3억 동방 정교회인에게 총대주교청은 가장 상징적인 기관이에요.
현재 총대주교청이 위치해 있는 성 게오르기오스 성당은 검소한 외관을 지녀 애처로운 기분마저 들어요. 총대주교청이 맨 처음, 그리고 가장 오래 자리한 곳은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이었지요. 가끔 관광객들이 하기아 소피아에 대해 물으면, 금방 아야 소피아라고 정정해주는 튀르키예인들을 볼 수 있어요. 아야 소피아로 명칭이 바뀐 대성당은 537년 지어졌어요.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킬 때까지, 거의 천 년 동안 하기아 소피아는 동방 정교회 총대주교청으로 쓰였어요. 이후 세 번의 이사를 거쳐 맨 나중에는 19세기에 지어진 신고전주의식 건물에 정착했지요. 담장 밖에서 보아서는 어디가 신고전주의라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요. 거기가 성당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어요.
삼엄한 경비를 지나 성당 마당으로 들어섰을 때에는, 영화 ≪카게무샤≫의 엔딩곡이 떠오르더군요. 한때 아야 소피아에 들어앉았던 기관이 이토록 자그마한 건물로 옮겨졌다는 사실에 슬퍼졌어요. 그나마 성당 내부로 들어서니 금박으로 장식된 내부가 아름다워, 비애가 쪼그라들었지요. 이 성당에는 무려 비잔틴 때부터 쓰인 총대주교 좌석, 각종 모자이크 성화, 성인들의 유해가 보관되어 있어요. 예수가 묶여 로마 병사들에게 채찍질당했다는 기둥의 잔편이 있다고도 하지요. 고요한 내부 한 귀퉁이에는, 고급스럽게 차려입은 룸[1]들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그날 무슨 행사가 열릴 예정인 것 같았지요. 당연하지만 그리스어가 들린다는 사실이 매우 이질적으로 다가왔어요. 이스탄불에서 몇 차례 정교회 성당을 방문해 본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그리스어로 점철된 성당 내부가 낯설더군요. 그 부지만은 온전히 그리스를 옮겨다 놓은 듯했지요. 룸 공동체만을 위한 그리스어 신문이 한편에 비치되어 있는 걸 본 적도 있었고요. 무슬림과 기독교인 비율이 거의 6:3(기타 소수 종교 1)에 달했던 1900년대 초반에는 이 도시 안에서 그리스어를 얼마나 더 자주 들을 수 있었을까? 그렇게 상상하며 나는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룸들의 대화를 한참 동안이나 엿들었지요.


성당에서 나오니 다음 목적지가 명확해졌어요. 이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 페네르 룸 남자 고등학교로 나는 발걸음을 옮겼어요. 학교에 이르려면 겁이 나도록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했어요. 어찌나 경사가 심하던지 한때 서울에서 다닌 평창동 직장 생각이 나더군요. 1711번 버스를 타고 롯데아파트 정류장에서 내려 딱 그런 고바위를 넘어야 했지요. 걸어서 언덕을 오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평창동 고개에 비해, 페네르 고개에는 남자 고등학교를 보려는 관광객들로 득실득실했어요. 초입에서부터 건물의 웅장한 자태가 드러났지요. 붉은 성채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건물은 너무도 화려해, 페네르를 찾는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이 건물이 총대주교청이라 오해한답니다.
실제로 이 남고는 상당한 상징성을 지닌 곳이에요. 메흐메트 2세가 1453년 이 도시를 함락시킨 후 콘스탄티노플은 가혹한 약탈과 파괴를 겪었어요. 그리스인 시민들은 살해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갔으며, 운이 좋은 경우 먼 에게해 도시로 피신했지요. 메흐메트 2세는 함락 1년 후 조금은 파격적인 선택을 감행하는데, 포로로 포박되어 있던 학자, 겐나디오스 스콜라리오스를 불러와 총대주교로 임명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했다고 모든 그리스인을 영토에서 쓸어버린 것이 아니라, 적임자를 뽑아 그 지휘 아래 기독교인들이 공생하게끔 제도를 정비한 거지요. 술탄의 계산에 아무래도 총대주교가 존재하는 편이 새 살림을 꾸리는 데 더 편리하리라 여긴 모양이에요. 그가 뽑은 스콜라리오스는 반로마적 인사여서, 동방 정교회가 가톨릭과 결탁해 세를 불리는 걸 막을 수 있기도 했고요. 총대주교가 새로 임명되며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 공동체는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어요. 그때, 그러니까 1454년 지어진 것이 바로 이 페네르 룸 남자 고등학교랍니다.

그러나 이 붉은 건물이 그때 벌써 지어진 건 아니에요. 이 건물은 1880년대 새로 축조된 것으로, 건축비에만 오늘날 가치로 1천 5백만 달러가 훌쩍 넘게 들었을 것으로 여겨져요. 일설에 의하면, 오데사의 마라슬리스가 초등학교 건축 후원금을 보내며 기대한 수준이 바로 이 남고 같은 건물이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막상 완공 후 직접 가보니 초등학교는 이 붉은 성채에 비해 너무 초라했고, 그에 실망해 지원을 끊었다고요. 그 정도로 페네르 룸 남자 고등학교는 부지도 넓으며 완성도가 높아요. 이 엄청난 후원금을 선뜻 내놓은 것은 콘스탄티노플 출신 그리스계 금융가 게오르기오스 자리피스였어요. 기존 건물 노후가 이 대대적인 신축의 계기였겠으나, 한낱 고등학교 건물을 이 정도로 화려하게 지은 게 어딘가 수상쩍지 않나요? 이 붉은 성채의 탄생에는 더 커다란 동기가 서려 있어요. 그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일단 이 오르막에서부터 내려가야겠군요. 아이고!
내가 그리스 음악을 통틀어 중 가장 많이 들은 노래랍니다. 음조가 도통 슬픈 건지 기쁜 건지 헷갈리는데, 그 야릇한 애매함이 난 참 듣기 좋더군요. 그리스의 블루스라고도 불리는 이 장르, 렘베티코는 애초에 소아시아에서 쫓겨난 그리스 난민들에 의해 생겨났어요. 콘스탄티노플과 스미르나(오늘날 이즈미르)에서 향유되던 음악을 난민들은 그리스로 가져왔고, 여기에 그리스 항구 도시의 하층민 문화가 결합되었지요. 1930년대 그리스 정부는 렘베티코에 쓰이는 대표적 현악기 부주키와 오스만계 음계 사용까지 검열하고 금지했어요. 동양적이고 불온하다는 것이 이유였지요. 당시 그리스는 오스만의 흔적을 지우고, 서구적 정체성을 꿰어 입어 새로이 도약하고자 했지요. 우리가 오늘날 인식하는 튀르키예-그리스의 이미지 대부분은 이처럼 정책적인 영향을 받은 경우가 많아요. 그런 정책이 무색하도록, 이스탄불 곳곳에서는 여전히 렘베티코가 흘러나오곤 하지요. 그것이 그리스어로 불렸든 말든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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