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24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보통의 직장인에게는 하루 8시간이 주어진다. 그러나 나에게는 시간이 조금 불공평하게 흐르는 것 같다. 기록관리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느덧 퇴근 시간에 가까워진 시계를 보며 생각한다. 오늘 하루 나는 ‘기록전문가’로 얼마나 일했는가. 단순 반복이나 서비스 업무가 아닌 ‘성과’를 낼 수 있는 업무에 얼마나 시간을 투자했는가.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그럴싸한 계획이 있었다. 매일 출근 시간보다 조금 여유롭게 사무실에 도착해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할 일을 계획한다. 오늘과 내일 예정된 회의나 일정 중 미리 챙겨야 할 부분은 없을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본다. 시작은 대개 여유롭다. 운이 좋은 날은 이 여유로움이 비교적 오래 유지되지만 그런 날은 많지 않다.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요청들이 내 우선순위를 뒤틀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례 1]
??: “OO기념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1990년대 사진 좀 공유받을 수 있을까요?”
나: “네, 한번 찾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언제까지 드리면 될까요?”
??: “죄송하지만 오늘까지 가능할까요? 인쇄를 늦어도 내일은 넘겨야 해서… 오늘 정 안되시면 내일 오전까지도 괜찮습니다.”
나: “(..…) 네…”
[사례 2]
??: “1986년도 OOO 임용 기록 열람 가능할까요?”
나: “네, 찾아보고 회신 드리겠습니다.”
(상대방이 마감기한을 먼저 말하지 않으면 내가 먼저 묻지 않고 전화를 끊는다. 당장 급한 요청은 아닌 것으로 간주하고 원래 우선순위대로 업무를 한다.)
(1시간 후)
??: “선생님 혹시 아까 요청드렸던 기록 확인이 되셨을까요?”
나: “(.....) 다른 업무가 있어서 아직 확인을 못했는데요. 언제까지 필요하신가요?”
??: “저희도 급하게 요청을 받아서… 혹시 오늘 좀 받아볼 수 있을까요…”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이 기관에 이 업무를 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데 내가 오늘 휴가라도 냈으면 어쩌려고 그러지? 물론 일을 하다보면 나도 누군가에게 본의 아니게 급하게 요청을 해야할 때가 있다. 문제는 내가 마주하는 급한 요청의 빈도 수가 너무 잦다는 것이다. 다른 직원들은 부재 시 업무를 백업해주거나 대응할 수 있는 인력이 있지만 우리의 일은 (이럴때만) 고유의 영역으로 분리되는 것 같다. 모처럼 휴가를 내도 불안해서 수시로 휴대폰을 확인하는 이유다.
집중력에도 한계가 왔다. 멀티태스킹을 하면 소위 말하는 전환 비용(Switching Cost, 뇌가 한 작업에서 다른 작업으로 이동할 때 소모되는 에너지)이 발생해 복귀하는 데 평균 25분 26초가 걸린다고 한다. 전환 빈도가 높을수록 수행 능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다. 나는 이처럼 ‘급함’을 앞세우는 업무에 자주 마음이 약해지며 끌려다녔고, 정작 성과를 낼 수 있는 핵심 프로젝트를 뒤로 미뤄왔다. 밀린 기록 업무는 야근으로 처리하자고 마음 먹지만 하루 끝에 남아있는 에너지는 많지 않다. 악순환에 갇힌 기분이었고 뭔가 조치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오전에는 (기록관리 외 업무는) 파업하겠습니다.
파레토의 법칙을 들어본 적 있는가? 결과의 80%는 20%의 원인에서 발생한다는 원칙이다. 나는 이 파레토의 원칙을 시간 대비 성과에도 적용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즉 업무 시간의 20%를 활용해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80%의 기록관리 성과를 내겠다는 목표다. 그렇다면 20%의 시간을 어느 시간대에 배정할 것인가? 우선 직장에서 내 패턴을 보면 보통 오후에 회의 등 일정이 많이 잡힌다. 다른 직원들로부터의 급한 요청이나 업무 전화도 오후에 오는 경우가 많다. 성과와 연결된 프로젝트는 단순 반복 작업보다 깊은 사고를 요하는데, 그렇다면 내게는 비교적 방해 요소가 적은 오전 시간이 기록관리 업무에 최적화된 시간이다. 아침 시간은 하루 중 집중력과 사고력이 가장 높은 골든타임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하루의 시작을 내 직업적 정체성과도 같은 기록관리 업무로 시작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제 나는 아침에 출근해서 공문과 이메일, 중요한 일정을 간단하게 확인한 후 바로 기록관리 업무에 돌입한다. 가장 맑은 정신으로 현재 공들이고 있는 프로젝트에 힘을 쏟는다. 야근을 완전히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대신 기한이 명확한 업무로 야근을 하니 업무를 종결하는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할 수 있어서 좋다.
“중요한 일이 급한 경우는 거의 없다. 급한 일이 중요한 경우도 드물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1인 기록관 체제에서 우리가 무너지면 기록관이 무너진다. 오래 건강하게 성과를 내며 일할 수 있으려면 지속 가능한 방식이 필요하다. 물론 기관 사정이나 업무 환경에 따라 많은 시간을 기록관리에만 투입할 수 없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럴 경우 짧게는 하루 한두 시간 만이라도 내 성과를 뽑아낼 수 있는 업무에 타임 박싱을 해보자. 매일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자. 중요한 건 다음 날 다시 맑은 정신으로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에 먼저 임하는 태도다.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들에 일정 시간을 부여하면 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들도 차차 줄어들 거라고 믿는다.
<1인 기록관 체제에서 우선순위를 지키기 위한 행동 지침>
1. 오전에는 되도록 휴대폰이나 메신저 알람 등을 멀리하고 업무에만 집중한다. (Deep Work)
2. 오전에 업무 요청이 들어오면 5분 안에 끝낼 수 있는 경우 그 즉시 끝낸다.
3. 그보다 오래 걸릴 것으로 예상될 경우 할 일 목록에 잠시 기록해두고 원래 하던 업무로 돌아온다.
4. 중간에 빨리 처리해달라는 재요청이 들어오면 다른 업무로 바빴던 척한다. 요청하는 사람이 나보다 선배이거나 상사일 경우 울며 겨자먹기로 재빨리 처리해준다.
5. 오후에는 마감기한이 급한 업무부터 마감기한 없이 들어온 요청들을 순서대로 처리한다.
6. 퇴근시간까지 열심히 일하되 오늘 반드시 끝내야 하는 업무가 아니면 내일로 미룬다. 어차피 나에게 가장 중요한 기록관리 업무는 가장 중요한 오전 시간을 투입했으니 깔끔하게 퇴근한다.
<번외> 야근에 고통받는 기록인들을 위한 추천영상: 성과 없이 야근하는 업무와 칼퇴 하면서 성장하는 업무의 차이 | 강형근 HK&Company 대표, 前 아디다스 코리아 부사장 https://youtu.be/21xM-PoKZ9Q?si=GYpVcM110QVsHax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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