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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권력을 넘어 경청의 공간으로

다큐멘터리가 만드는 해방적 정의

2026.04.15 | 조회 6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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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해
<오, 발렌타인> 스틸 이미지. (출처: 시네마달)
<오, 발렌타인> 스틸 이미지. (출처: 시네마달)

지난달, 참으로 오랜만에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홍진훤 감독의 <오, 발렌타인>이라는 작품이다. 이전에 인터뷰를 통해 접했던 작가이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작품 자체가 던지는 질문에 더 오래 머물게 되었다. 우리는 왜 ‘보여주는 것’이 곧 정의에 가까워진다고 믿게 되었을까. 그리고 과연, 보는 일만으로도 해방에 다가갈 수 있을까. 

사실 이 질문은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과도 맞닿아 있다. 최근에서야 한국 근현대사 다큐멘터리를 접하기 시작했는데, 미국 생활 중에는 그럴 기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한국 독립영화, 특히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거나 보유한 곳이 드물었을 뿐 아니라 온라인 시청 절차마저 매우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이야기는 처음부터 전해지지 않는 채로 남겨진다. 무언가를 ‘보여주기’ 이전에, 목소리 자체가 아예 도달하지 못하는 단절이 발생하는 것이다.

흔히 독립 다큐멘터리는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역사 속에 묻힌 이야기들을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하지만 ‘본다는 것(혹은 보여진다는 것)'이 권력을 획득하는 일이, 혹은 시각 권력이 해방적 정의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해방적 정의’는 과연 어떻게 그려지는가.

거실에서 한 사람이 리모컨을 쥐고 '속보(BREAKING NEWS)' 문구와 지구의 모습이 떠 있는 TV 화면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출처: Pixabay)
거실에서 한 사람이 리모컨을 쥐고 '속보(BREAKING NEWS)' 문구와 지구의 모습이 떠 있는 TV 화면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출처: Pixabay)

한편, 오늘날 국내외 사회는 전례 없는 여러 ‘위기’를 목격하고 있다. 매일같이 위기에 관한 보도가 쏟아지고 전시되지만, 역설적으로 알고리즘에 의해 선택적으로 필터링되는 지금이야말로 지속적이고 다층적인 대화가 절실한 시점이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듯 국내외에서는 다양한 관점과 경험을 녹여낸 영화제, 전시, 토론회 등이 활발히 기획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다큐멘터리는 특유의 상징성과 역사성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빈번하게 조명되고 있다. 

 

이처럼 다큐멘터리가 끊임없이 호명되는 상황 속에서, 앞서 제기한 ‘보는 권력’과 ‘해방적 정의’에 대한 질문은 더욱 시의적절한 화두가 된다. 이에 본 글에서는 두 편의 영화를 비교 분석하며 다큐멘터리의 사회적 의의와 배경, 그리고 그 한계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한 편은 1980년대 광주 민주화 항쟁 당시 시민들이 스스로 기록하고 공유하기 위해 제작한 광주비디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1987)이며, 다른 한 편은 그로부터 30년 뒤 '아랍의 봄'의 물결 속에서 2010년대 바레인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 <바레인: 어둠 속에서 외치다>(2011)이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만큼 닮은 궤적을 그리며,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좌) <대한뉴스> 최종회의 한 장면. (출처: KTV 아카이브 유튜브)/ (우) 아랍의 봄 당시 시민의 스마트폰 기록 사례 (출처: AFP)
(좌) <대한뉴스> 최종회의 한 장면. (출처: KTV 아카이브 유튜브)/ (우) 아랍의 봄 당시 시민의 스마트폰 기록 사례 (출처: AFP)

예로부터 영화는 권력층에 의해 대중 교화나 이데올로기 확산의 도구로 활용되어 왔으며, 이에 따라 제작과 유통 방식 역시 철저히 통제되었다. 한국의 경우, 박정희 정권은 영화 산업에 여러 규제와 제도를 적용하여 사상적 통제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특히 국립영화제작소를 통해 대한뉴스와 문화영화 상영을 의무화함으로써 근대화 정책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전방위적으로 선전했다. 이러한 엄중한 검열과 통제는 1980년대까지 지속되다 서울의 봄을 기점으로 변곡점을 맞이한다. 기성 미디어의 기만적 보도에 대항하여 부조리한 현실을 폭로하려는 영화 운동이 태동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는 한국 민주화의 산물이자 동반자이며 촉발제”라는 평가는 그 역사적 의의를 적확히 관통한다. 이와 유사하게 아랍의 영화 산업 또한 정부에 귀속되어 국가 정체성을 선전하는 도구로 이용된 역사를 공유한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며 아랍 영화계는 중대한 전환기를 맞는다. 여성 감독들의 활발한 활동이 국제적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뒤이어 등장한 아랍의 봄은 SNS라는 새로운 플랫폼과 맞물려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 어느 때보다 폭넓고 치열하게 기록되었다. 여성 인권, 가족, 정치적 사안과 변화하는 사회상 등 기존 영화들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거나 터부시 된 주제들이 이야기되었는데, 이는 아랍의 봄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광범위한 영향을 주었는지 잘 보여준다. 

광주비디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1987)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표지. 해당 사진첩은 1987년 6월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제작했다. (출처: 5·18기념재단)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표지. 해당 사진첩은 1987년 6월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제작했다. (출처: 5·18기념재단)

약 한시간 남짓한 영화 속에서 장면들이 긴박하게 교차된다. 화면을 가득 채운 텍스트가 지나가고, 판화 그림 위에 붉은 물감이 흩뿌려지고, 이내 계엄군에게 제압당해 바닥에 일렬로 눕혀진 채 목에 와이어가 채워진 광주 시민들의 참혹한 모습이 이어진다. 영화는 일련의 장면에 대해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지만, 그 자체로 폭력의 잔인함과 부당함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이른바 ‘광주 비디오’로 불린 이 기록물은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독일 NDR, 일본 NHK, 영국 BBC 등 해외 방송사들이 보도한 필름에 시민들이 제공한 자료를 보완하여 1987년 제작·배포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해외 보도 영상을 인용하며 한국어 음성 자막을 입힌 방식인데, 이는 영상의 진본성을 증명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당시 광주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반체제 행위로 간주되던 삼엄한 통제 속에서, 이 영화는 엘리트 집단이 아닌 제도 밖의 “이름 없는” 시민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거창한 민주화를 목표로 삼았다기보다, “인간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인간 존재의 허용치를 넘어서고 극단적이고 부당한 폭력을 증언하는 목소리가 철저히 억압되자 터져 나온 몸짓”으로서 이 저항의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오, 광주!" (1981)는 1981년 5월 18일 광주 항쟁 1주기에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최초로 상영된 기록 영화로, 초국가적인 제작 과정을 가졌다.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Bahrain: Shouting in the Dark(바레인: 어둠 속에서 외치다) (2011)

"이것은 아랍인들로부터 버림받고, 서구 세계로부터 외면당했으며, 그리고 전세계가 잊어버린 아랍 혁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This is the Arab revolution that was abandoned by the Arabs, forsaken by the West, and forgotten by the world)

영화 <바레인: 어둠 속에서 외치다>는 이 서늘한 선언과 함께 수도 마나마의 전경과 집회 현장을 비추며 시작된다. 작품은 소수의 수니파 지배층과 다수의 피지배층으로 구성된 바레인의 특수한 사회구조를 짚어낸 뒤,  민주주의 권리를 향한 열망이 혁명으로 분출된 배경을 차근차근 설명한다. 화면 속에는 무장 경찰과 군인들에게 제압당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바레인의 투쟁은 보기 드물게 평화적인 비무장 노선을 견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주변 걸프 국가들의 군사 협력까지 지원받아가며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영화는 운동가, 의료진들과의 인터뷰, 관영 방송의 프로파간다, 그리고 급박한 시위 현장과 병원의 상황을 교차시키며 사건의 한 복판으로 끌어들인다.

무장 경찰과 대치한 시민들이 꽃을 건네는 모습. 이는 평화적인 저항을 상징한다. 영어 자막 번역:
무장 경찰과 대치한 시민들이 꽃을 건네는 모습. 이는 평화적인 저항을 상징한다. 영어 자막 번역: "수니와 시아 무슬림은 형제들이다. 이 나라는 팔리지 않을것이다." (출처: 알 자지라 유튜브)

이 다큐멘터리는 2011년 혁명 당시 알자지라(Al-Jazeera)의 저널리스트 메이 양 웰시(May Ying Welsh)가 기획하고 투키 로메아(Tuki Laumea)가 편집하여 제작되었다. 한가지 주목할 점은 이 기록물이 유튜브와 웹사이트를 통해 8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공개되었다는 사실인데, 이러한 언어적, 매체적 접근성은 국제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던 바레인의 참상을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디지털 매체의 도입이 오로지 해방의 도구로만 기능한 것은 아니었다. 혁명의 도화선이자 매개가 되었던 페이스북 등의 소셜미디어는 역설적으로 정부의 검열과 감시망에 포획되었고, 시위 참여자들을 색출하고 마녀사냥 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이 비극적인 모순은 가시화가 권력을 획득하는 수단인 동시에, 체제에 의해 통제와 처벌의 근거로 전락할 수 있다는 ‘가시화의 양면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대규모 시위 중 모습. 여성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두드러진다. (출처: 알 자지라 유튜브)
대규모 시위 중 모습. 여성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두드러진다. (출처: 알 자지라 유튜브)

가자(Gaza) 사태처럼 인도주의적인 위기가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생성형 AI와 알고리즘, 거짓 정보가 범람하는 오늘날 다큐멘터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훗날 광주와 바레인의 역사가 그러했듯, 지금의 이 난국은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기록을 현재의 시점에서 재고하고 미래를 독해하려는 <오, 발렌타인>은 매체의 가치를 일깨우는 동시에 미디어 액티비즘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묻는다. 다큐멘터리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보여지는 것’과 ‘보는 것’의 권력 역학을 넘어, 자신과 다른 존재를 상상하고 경청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일, 그리고 그 속에서 타자와의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을 가능케 하는 데 있다. 이제 기록영화는 더 이상 실패나 비극을 박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현재를 딛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참고문헌 

  • 알 자지라 Al Jazeera. (2011). Bahrain: Shouting in the Dark (바레인: 어둠 속에서 외치다). https://www.youtube.com/watch?v=xaTKDMYOBOU
  • 김은지. (2023). 아랍의 봄과 영화산업의 변화: 다큐멘터리 영화를 중심으로. 한국이슬람학회 논총, 33(1), 109-128. 
  • 안소연, 구기연. (2025). 기성 언론과 디지털 대항 공론장: 2023년 가자 전쟁과 한국 사회의 담론 지형. 중동연구, 44(2), 35-60.
  • 이승민. (2017).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와 민주주의 연구 6월항쟁을 다룬 영화를 중심으로. 기억과 전망, 37(0), 52-98. 10.31008/MV.37.2
  • 전재호. (2023). 1980년‘서울의 봄’의 좌절 요인에 관한 연구 : ‘프라하의 봄’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사회과학연구, 30(1), 241-261. 10.46415/jss.2023.03.30.1.241
  • 한재섭. (2025). 소문과 이미지의 정치학 ― 광주민중항쟁을 중심으로 ―. 감성연구, 30(0), 127-155. 10.37996/EMO.30.6
  • Haouala, Henda. (2022) The Decade of the Female Filmmakers of the Arab Uprisings. European Institute of the Mediterranean. https://www.iemed.org/publication/the-decade-of-the-female-filmmakers-of-the-arab-uprisings/ 
  • Zabad, I. (2017). Middle Eastern Minorities: The Impact of the Arab Spring (1st ed.). Routledge. https://doi.org/10.4324/9781315595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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