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 담당자들과 회의를 할 때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보존기간이 왜 필요한가요?”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보존기간을 그냥 모두 영구로 하면 안 되나요?”
“서버 용량도 충분한데 왜 굳이 기록을 폐기해야 하나요?”
처음에는 이 질문들을 단순하게 생각했다. 기록관리 전문가의 관점에서 봤을 때 무가치한 질문으로 여기고 단순하게 답했다. 법과 규정이 그렇게 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고, 기록의 폐기는 정보의 효율적인 관리에 도움이 되며 불필요한 기록을 줄이는 것은 조직의 리스크 관리에도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했다. 때로는 국제표준에 따른 기록의 생애주기 관리가 필요하다고 설명하기도 했고, 저장과 관리에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일정한 시점에 기록을 폐기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듣다 보니 어느 순간 나 자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아주 진지하게 던지게 되었다. 도대체 디지털과 인공지능의 시대에 왜 보존기간이 필요한가? 내가 배우고 익히고 경험한 것들이 정말 맞는 것일까? 직원들의 질문은 정말 무가치한 것인가? 설득력 있는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근무하는 회사는 설립된 지 10여 년이 조금 넘었다. 그간 조직의 기능은 확대되었고 새로운 업무가 생겨났으며 직원 수도 크게 늘어났다. (우리 회사는 공공기록물법 적용 대상 기관이 아니며 기록관리 프로그램 운영에 자율성이 있음을 미리 알려드린다. 이 글에서 사용하는 기록관리기준표, 보존기간 등의 용어도 실제로는 다른 방식으로 부르고 있으나, 독자의 편의를 위해 친숙한 용어를 사용한다.) 기록관리 담당자로서 나는 변화하는 업무를 기록관리기준표에 반영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기준표를 갱신할 때마다 반드시 결정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기록의 보존기간이다. 대부분의 직원은 평소 보존기간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수행하는 업무와 관련된 기록의 보존기간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는 다양한 질문이 제기된다. 어떤 기록은 왜 5년이고, 어떤 기록은 왜 10년이며, 어떤 기록은 왜 영구 보존인지 묻는다.
사실 이 질문들은 단순히 숫자에 대한 의문이 아니다. 결국 그들은 “이 기록은 왜, 그리고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기록의 가치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나 스스로에게 보존기간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고심한 결과, 그리고 개인적인 업무 경험에 비추어 살펴보면, 보존기간의 필요성과 책정 이유를 설명하는 가장 쉬운 출발점은 법적 가치이다. 계약서라는 기록물을 일례로 보자. 계약이 체결되면 당사자 사이에는 권리와 의무가 발생한다. 계약이 종료되었다고 해서 모든 법적 관계가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후에도 계약의 해석이나 이행 여부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할 수 있고, 손해배상이나 비용 정산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기록이다. 기록은 누가 무엇을 약속했고, 어떤 결정을 내렸으며, 실제로 무엇을 수행했는지를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
여기에서 소멸시효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소멸시효는 권리자가 일정한 기간 동안 권리를 행사하지 않을 경우 더 이상 법적으로 주장할 수 없도록 하는 제도다. 세부적인 내용은 국가마다 다르지만 기본 원리는 유사하다. 법은 권리와 의무가 무한정 지속되는 상황을 허용하지 않는다. 기록관리의 관점에서 볼 때,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기간 동안 그 권리를 증명할 기록도 존재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멸시효와 기록의 법적 가치가 만난다. 물론 소멸시효와 보존기간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소멸시효는 법이 정한 권리 행사의 시간이고, 보존기간은 조직이 기록을 보존하고 관리해야 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소멸시효는 적어도 기록의 법적 가치가 언제까지 지속되며 언제 사라지는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기록의 법적 가치가 소멸시효와 함께 사라진다면, 그 기록은 곧바로 폐기 대상이 되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계약의 법적 효력이 종료되었다고 해서 그 기록의 가치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록은 조직의 의사결정 과정을 설명하는 자료가 될 수 있고, 어떤 기록은 특정 사업이나 정책이 왜 그러한 방향으로 추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또 어떤 기록은 조직의 역사를 이해하는 자료를 넘어 사회 전체의 변화를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 기록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기록관리 과정에서는 평가를 시행한다. 기록물 평가는 단순히 몇 년 동안 보존할지를 결정하는 작업이 아니다. 기록이 가진 다양한 가치를 분석하고 그 가치가 언제까지 지속되는지를 판단하여, 궁극적으로 보존 또는 폐기의 방향을 결정하는 과정이다. 행정적 가치, 재정적 가치, 법적 가치, 증거적 가치, 정보적 가치, 역사적 가치 모두 이 과정에서 고려된다. 그리고 보존기간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보존기간은 기록의 가치에 대응하는 시간의 양을 부여한 결과다. 우리는 가끔 기록의 가치를 하나의 고정된 속성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기록의 가치는 시간과 환경에 따라 변화한다. 처음에는 업무 수행을 위해 생산된 기록이 시간이 지나면서 업무적 가치가 감소할 수 있다. 반면 조직의 책임성과 의사결정을 설명하는 증거로서의 가치는 오히려 더 중요해질 수도 있다. 또 일부 기록은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역사적 가치가 새롭게 발견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보존기간은 단순히 ‘몇 년 동안 보관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 기록은 언제까지 우리 조직의 권리와 의무를 증명해야 하는가’, ‘언제까지 책임성을 설명해야 하는가’, ‘언제까지 사회가 기억할 가치가 있는가’를 판단하는 과정이다.
기록 평가와 보존에 대한 고민은 디지털 시대에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과거 비디지털 시대에는 기록을 남기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종이는 훼손되기 쉬웠고 저장 공간은 제한적이었다. 기록이 의도하지 않게 유실되기 쉬운 환경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정반대다. 이제는 너무 많은 정보를 남길 수 있다. 비용을 지불한다면 클라우드는 사실상 무한에 가까운 저장 공간을 제공하고 있고, 인공지능은 방대한 양의 정보를 검색하고 분석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저장할 수 있는데 왜 폐기하나요?” 실제로도 매우 합리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저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 보존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저장과 보존은 다르다. 정보가 무한히 축적될수록 개인정보 보호의 부담은 커지고, 중복되는 정보의 양은 늘어나며, 회사는 더 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여 정보를 관리해야 한다. 수많은 정보의 더미 속에 가치 있는 기록정보가 묻혀버릴 위험도 있다. AI가 더 많은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데이터가 동일한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미 없는 정보가 지나치게 많아질수록 중요한 정보를 식별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 그래서 AI가 오래된 정보 혹은 잘못된 정보에 기반한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때문에 디지털과 AI 시대에는 오히려 무엇을 기록으로 인정할 것인지, 무엇을 언제까지 보존할 것인지, 무엇을 폐기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진다.
이전 직장의 기록물 정리실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좋은 아키비스트는 보존만큼 폐기도 잘하는 사람이다(The good archivist is as good a destroyer as a preserver).’ 우리가 대학원 시절 배웠던 리처드 콕스(Richard Cox) 선생님께서 해주신 명언이다. 한정된 자원과 유한한 기술 환경 속에서 기록의 폐기는 중요한 기억과 증거를 지키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기도 한다. 기록관리의 역사는 선택의 역사였다. 우리는 언제나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고민해 왔다. 종이 문서의 시대에도 그랬고, 전자기록의 시대에도 그랬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이 질문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저장하고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 중요한 기록인지, 무엇이 조직의 책임을 증명하는 기록인지, 무엇이 미래 세대에게 남겨야 할 기억인지는 적어도 지금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기억해야 할 것과 잊어도 되는 것을 구분하는 일은 아직까지 인간의 몫이다.
보존기간은 기록의 단순한 저장과 폐기를 말하는 유통기한이 아니다. 법적 테두리 안에서 기록이 우리의 권리와 의무를 지켜주어야 하는 시간이다. 거기에 더해 기록이 조직의 책임을 설명해야 하는 시간이며, 미래가 과거를 이해할 수 있도록 기억을 이어주는 시간이다. 보존기간을 책정한다는 것은 기록의 수명을 정하는 일이 아니라, 기록정보가 우리 개인과 사회를 위해 언제까지 기억되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일이다. 이런 설명을 업무 담당자들에게 해준다면, 잘 이해하고 설득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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