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 공지사항

B.

(아찔하고 살벌한 기록인 생존기) 김선생의 뒷목일기

모르는 것이 많고, 서툰게 많지만 직장생활이 유쾌하길 바라는 명랑한 신입직원의 적응기입니다.

2025.05.13 | 조회 782 |
0
|
기록과 사회의 프로필 이미지

기록과 사회

기록에 대한 모든 이야기

- 신입 기록연구사의 직장생존 고군분투기-

 

첫 번째 이야기

 

기록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기 전, 나는 기록과 거리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직장생활을 했었다.

인생이란 참으로 요상스러운 것.

기록관이 없었던 나의 전 직장에는 도서관이 있었고, 일반부서에서 업무를 추진했던 나는 사서 언니들(?)과 친하게 지내곤 했었다.

사서언니들이 인사이동으로 바뀌어도 누가 오든 절친이 되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 언니들의 영향을 받아, 나는 (사서가 아닌) 기록인으로서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기록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민간기록물 수집 업무 담당을 하게 되면서나는 함께 근무했던 사서 언니들 생각이 참 많이 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매번 이벤트성으로 도서 기증이 이루어졌고, 먼지가 뽀얗게 끼고 노랗게 얼룩진 수십수백권의 책들이 들어올 때마다, 침착하고 내향적인 성향의 언니들 얼굴은 홍시처럼 변하고 언행이 과격해지시곤 했다.

 

사서언니 : A씨라고 이름 들어본 적 있니?

김선생 : 아뇨 없어요. 유명인이예요? 네이버 인물검색에도 안 나와요.

사서언니 : 사실 나도 잘 몰라.

김선생 : 그런데 왜요?

사서언니 : 이번에 도서 기증해주시는 분인데, 우리 사장님* 친구분이시래. 책을 100권을 기증해주셨어.

김선생 : 우와 많다.

사서언니 : 그치 100권 많지.. 많은데 그 100권이 다 그 분 자서전이야..

김선생 : 네에?

사서언니 : 같은 책 100권이라고.. 자서전으로 같은 책 100... 내가 3권만 필요하다고, 1권만 주셔도 되지만!!! 내가 진짜 3권만 주셔도 된다고 돌려돌려 말했는데!!!!!!!!!!! 100권 다 놓고 갔다고!!!!! 전부 동일한 책으로!!!

* (우리는 당시 기관장을 사장님으로 부르곤 했다.)

 

기증자가 자신의 자서전으로 책을 여러권(수십, 수백권) 기증하는 경우 뿐만이 아니었다.

이사와 같은 이슈가 발생하면 집안 한켠에 뽀얗게 세월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책(본인의 석사논문까지) 여러 권을 도서관에 기증하겠다고 들고 오시는 기증자(주로 사장님 친구분들)가 발생할 때마다 언니들은 뒷목을 부여잡곤 했다.

 

사서 언니 : 줄거면 먼지라도 한번 털어주시지!! 줄거면 깨끗한 거 골라서 주시지!! 줄거면 주고 딱 끝내시지 굳이 자료실 한켠에 자기 이름 걸어놓고 자기 기증섹션 마련해두라고 부탁도 아닌 명령조로 요구하고 가시는 건 뭐냐고!!!!

 

사서언니들 평소에 얼굴이 봄꽃같은데, 기증도서가 뭐라고 사람 한순간에 활화산처럼 터져버리는구나..하며 참 신기하게 지켜봤었다.

그리고 몇 년 후, 기록인이 된 지금.

 

나의 얼굴에 열꽃이 만개했다.

 

 

(1) 진품명품

처음 민간기록물 수집업무를 하게 되었을 때, 수집공모전도 아니고 비상시적으로 아주 수시로 민간기록물을 기증하러 오신 (하필 또 이사예정이신) 시민분들의 기록물을 보고 언니들처럼 내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50년도 더 된 먼지옷을 입은 기록물들

변색이 되어있고

얼룩도 가득하고

곰팡이까지 피어있던 기록물들

아찔한 외형을 보고 현기증에 잠시 앞이 안보였지만

아무리 똥이 묻어도 5만원은 5만원이듯

못생겼어도 기록물이 가진 가치가 있겠거니,

못생겼어도 저 기록물이 가진 가치를 한번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단전부터 뜨거운 한숨이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삼켰다.

민간기록물 수집 절차에 따라, 연구사가 가치평가를 하고 위원회 심의를 거치고 나서 기록을 이관받고, 기증서도 드리고 하는 것인데..

내가 이 기록물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깊은 고민이 시작된다.

대학원에서는 거의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교육과정이 개설되고, 수강했는데..

내가 민간기록물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안목이 있는 사람일까..

KBS 진품명품 프로그램 담당자한테 심사위원 추천 좀 해달라고해서, 그 분들 모셔다가 자문이라도 해야하나.

이 기록물들의 보존기간은 어떻게 정해두는 것이 좋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2)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

어쩌다 연차를 쓰고, 어쩌다 출장을 다녀왔는데

다음날 출근하니 모르는 물건들이 책상 위에 놓여있다.

먼지 옷을 뽀얗게 뒤집어쓰고 노란 얼굴을 한 물건들이..

너무 낯설고 친해지기 어려운 모습을 한 물건들이..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마치 공항에 놓인 주인없는 캐리어를 보는 기분이 든다.

경찰을 불러야하나 싶다가 공포심을 누르고 옆자리 직원에게 묻는다.

 

김선생 : 이거 뭔가요?

직원 : 시민분이 기증하고싶다고 두고가셨어요.

김선생 : ..

직원 : 이사하시려고 집 정리 하시다가 갖고 오셨다고 하더라구요.

김선생 : .. (우리 문서고가 만고라 부서 기록물조차 이관도 못받고 있는데, 민간기록물 기증은 쉼 없이 신청이 들어오는군)..아이 좋아...

직원 : 들고 왔는데 돌려보낼 수는 없더라구요.

김선생 : 기증해주시는건 좋지만, 무슨 물건인지 배경정보라도 알려주고 가셨음 좋았을텐데..  (이렇게 덩그러니 두고가시면) 정말 난감하네요...제가 전화드려볼게요 ㅠ

 

이거 언제 기증 들어올 지 무서워서.. 아니.. 몰라서 연차도 못 쓰겠고 출장도 못 가겠네

 

(3) 그러기 없기, 그러지 말기

차라리 수집공모전으로 주제를 정해서 수집을 하면 좀더 나을까 싶어서 공모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늘 그렇듯, 예고없이 불쑥 기록물 기증 관련 민원을 가진 시민 한 분이 방문하셨다.

시민 : 작년에 기증한 기록물이 알고보니 엄청난 가치가 있는 고서였더라구요? 나 다시 그거 돌려줘요 당장!

김선생 : 저 선생님.. 기증신청 하실 때 작년에 소유권 양도를 하셨고, 기증도 확정되서 기증서 발급도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민 : 네 맞는대요. 그래도 그거 엄청 비싼 고서인데, 나 그거 다시 돌려받고싶어요.

김선생 : 기증이 확정되어서 그건 어렵습니다.

시민 : 어려운 게 어딨어?! 돌려주세요!!!

김선생 : (아니 나 여기 출근하기 한참 전에 기증한 걸... 기증서에 명예의전당에 이름까지 올리신 분이면서, 다짜고짜 기증한 걸 달라고하면 내가 어떻게 반환을 하냐고ㅠ) ..... 알아보고 연락드릴게요...

 

순간 엄마가 보고싶어지기 시작한다.

 

우리 엄마가 연애를 하든 친구를 사귀든

줬다 뺐는게 제일 치사스러운거라고..

너는 절대 누구한테 줬다 뺐는건 하지 말라고..

너도 줬다 뺐는 찌질이는 친구로도 애인으로도 삼지 말라고 하셨는데..

엄마...줬다 뺐으려는 사람이 민원인이면 어떻게 해야하나요.

민원인이면 내 의지로 안 만날 수가 없는데.. 피할 수가 없는데...

 

(4) 저한테 정말 왜 그러세요

지역사회에 대한 여러 가지 사진을 찍고 보관 중이라는 시민분이 연락을 주셨다.

본인이 가진 사진들을 디지털화한 파일로 변환하여 받을 수 있냐는 질문과 함께.

어떤 사진자료를 가지고 계실지 몰라서 기대감 반 긴장감 반을 가지고

일단 찾아뵈었는데

정말 오래된 그리고 귀중한 지역사회 관련 사진들을 많이 가지고 계셨다.

올해 내가 수집공모전 하려는 주제와도 잘 맞는 자료들이 많이 있어서 기증을 추진해도 되겠다 싶었다.

본인이 가진 사진을 전자화해서 받고싶다고 말씀하시기에,

무상기증과 소유권 이전을 해주시면 전자화된 파일 드리겠노라 말씀드리니

갑자기 눈썹이 꿈틀거리며 노기 어린 얼굴을 하시더니

 

기증예정자인줄 알았지만 아니었던 시민 : 아니 이걸 왜 당신들이 가져요?

김선생 : ?

기증예정자인줄 알았지만 아니었던 시민 : 원본도 나 주고!! 전자화된 파일도 나 줘야지!! 이거 내 재산인데!! 왜 내껄 마음대로 이용해요? 

김선생 : 기증하시고, 전자화된 파일만 원하시는게 아니셨나요?

기증예정자인줄 알았지만 아니었던 시민 : 이건 내 재산인데 내가 기증을 왜 해요!! 전자화 파일 변환하는거 관공서에서 공짜로 하려고 연락한거지!! 돈주고 하면 용역업체에 돈드니까!! 내돈 안 들이고 디지털 전환하려고 한거지!!!

 

대체 제가 왜 선생님 물건을 전자화해야하나요.. 제가 업체 직원도 아닌걸요.

먼저 연락주셔서.. 저는 선생님께서 기증해주시는줄 알고 찾아뵌건데..

왜 갑자기 저를 날강도 보듯 쳐다보세요.

 

선량한 사람 서럽게..

----------------------------------------------------------------------------

오랜만에 사서 언니들에게 안부를 여쭙는 연락을 드렸다.

 

김선생 : 언니 기증도서 들어올 때마다 괴로워하실 때마다 책 몰래 불 질러버리시라고 개념상실한 개소리했던거 죄송해요. 그때 저 헛소리 해대서 벌 받나봐요.. 저.. 민간기록물 수집 업무해요..

사서언니 : 어머 얘~ 호호~~ 인생이란 정말.. 너 기증기록물 정리할 때 조심해, 나 민간 기증도서 정리하다가 기관지랑 피부에 병 생겨서 한참 병원다녔어. ~ 호호호

 

맙소사

----------------------------------------------------------------------------

고민이 많다.

기증기록물을 수집할 때, 어떤 기준으로 받아야 할지. 어떻게 가치평가를 할지.

보존기간을 어떻게 정하는 게 좋을지.

아무리 낡고 상태가 안 좋은 기록물이라 하더라도, 기록물 기증할 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기록물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도록 기증자가 기증서에 내용을 잘 남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지.

아무런 정보없이 기록물만 덩그러니 받게되면 너무나도 난처한데, 기록물의 배경정보를 어떻게 기증자에게 받아야 좋을지.

반환을 요청하는 기증자에게 반환을 해 줄 수 있는 절차와 방법도

그리고

원본기록물을 반환하고, 전자화된 기록물의 이용 및 활용에 대한 방법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과 고민을 거듭하는 요즘이다.

그렇게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2025523일 국가기록원에서 민간기록물을 주제로 기록관리 연구세미나가 개최된다고 한다. 세미나에 참석할 준비를 하며, 부디 내 고민이 조금이라도 해소될 수 있을지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부디 내 고민이 조금이라도 해소될 수 있을지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기록과 사회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5 기록과 사회

기록에 대한 모든 이야기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로10길 6, 11층 1109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