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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가 남긴 진짜 기록: 8,000만 달러 미술품 위작 사건과 노들러 아카이브의 역설

2025.05.13 | 조회 7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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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러 갤러리(Knoedler Gallery)1857년 설립 이후, 남북전쟁, 세계대전, 대공황 등 격변의 시대를 거치며 미국 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확립했다. 반 고흐(Vincent van Gogh), 모네(Claude Monet), 마티스(Henri Matisse) 등 유럽 거장들의 작품을 미국 컬렉터들에게 소개했으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과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National Gallery of Art)와 같은 기관은 물론, 록펠러(Rockefeller), 모건(Morgan) 가문 등 문화계 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위작 사건 재판 장면, 출처: Artnet ⓒILLUSTRATED COURTROOM
위작 사건 재판 장면, 출처: Artnet ⓒILLUSTRATED COURTROOM

그러나 2011, 노들러 갤러리를 향한 신뢰는 완전히 무너졌다. 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미술품 위작 스캔들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갤러리 디렉터였던 앤 프리드먼(Ann Freedman)은 마크 로스코(Mark Rothko),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바넷 뉴먼(Barnett Newman),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등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의 작품을 판매했으나, 이들 상당수가 위작으로 밝혀지면서 갤러리는 결국 폐업했다. 판매된 위작은 약 40, 손해액은 8,000만 달러에 달했다.

위작으로 나타난 잭슨 폴록과 마크 로스코의 작품 이미지
위작으로 나타난 잭슨 폴록과 마크 로스코의 작품 이미지

위작 논란이 표면화된 결정적 계기는 한 구매자가 잭슨 폴록의 작품을 국제미술연구재단(International Foundation for Art Research, 이하 IFAR)에 진품 감정을 의뢰하면서부터였다. IFAR의 정밀 분석 결과, 작품에 사용된 일부 안료는 폴록 생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작품의 출처가 의심받기 시작했다. 전문가 감정을 통해 진품이라고 평가받았던 작품들이 위작임이 드러나면서, 미술품 감정 체계의 취약성과 전문가 집단의 신뢰도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었다특히, 위작 판매가 1990년대 중반부터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충격을 가중시켰다. 

노들러 갤러리에서 사용하던 캐비넷, 출처: 게티 블로그, 사진: Karen Meyer-Roux
노들러 갤러리에서 사용하던 캐비넷, 출처: 게티 블로그, 사진: Karen Meyer-Roux

이후 주목할 만한 전환점이 있었다. 게티 연구소(The Getty Research Institute)가 위작 사건으로 몰락한 노들러 갤러리의 아카이브를 인수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의문을 제기했지만, 게티 연구소의 선택은 학문적 통찰에 근거한다. 게티 연구소가 구입한 노들러 갤러리 아카이브에는 1857년부터 1971년까지, 즉 스캔들 이전 시기에 생산된 방대한 거래 기록, 서신, 사진, 회계장부 등이 포함되어 있다(수집 대상은 앤 프리드먼이 입사 전 기록으로 한정되었다). 이 아카이브는 작품 구매와 관련된 내용을 날짜별로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미국 미술시장의 형성과 유럽 미술의 미국 유입 과정을 추적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실제로 미술품 소장이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던 나치 독일 시기의 소장이력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결과적으로 노들러 갤러리 아카이브는 위작 스캔들과 별개로 100여 년에 걸친 미술 거래의 귀중한 역사적 증거로 평가받은 것이다.

노들러 갤러리 아카이브의 핵심은 '프로비넌스(Provenance)' 연구에 있다. 기록학에서 출처로 번역되는 프로비넌스는 미술계에서도 통용되나, 단순한 출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한 작품이 예술가의 작업실에서 창작된 순간부터 현재 소장자에 이르기까지 소장자의 역사(ownership history)를 기록한 것이며,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창작자의 정체성, 소유권 변동과 공백까지를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들러 갤러리가 판매한 작품들이 위작으로 판명된 결정적 이유 중 하나도 프로비넌스의 불일치였다.

게티 연구소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프로비넌스 인덱스를 구축했다. 이는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는 것을 넘어,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연구 방법론을 제공하고, 위작 감별을 위한 효과적인 검증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특정 작품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거래되었는지를 추적함으로써 위작의 허위 출처를 보다 명확히 규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검증의 기반이 되는 것이 바로 작가와 작품을 둘러싼 다양한 기록이다. 게티 연구소는 작품 거래 기록을 디지털화하고 공개함으로써, 미술품 진위 판별이 더 이상 소수 전문가의 주관적 판단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투명성과 검증 가능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미술계의 시스템 자체를 혁신하고 있는 셈이다.

1800년대 중반에 촬영된 노들러 갤러리 내부, 출처 : 뉴욕공공도서관
1800년대 중반에 촬영된 노들러 갤러리 내부, 출처 : 뉴욕공공도서관

반면, 국내 미술계는 소장이력 정보를 체계적으로 제공하지 않는 실정이다. 서구와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위작 및 위조 사례가 반복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아카이브를 활용한 프로비넌스 구축은 시급한 과제임이 분명하다. 갤러리의 '명성'이나 '안목감정'에 의존하기보다, 투명한 거래 기록과 객관적 검증에 기반한 신뢰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게티 연구소가 노들러 갤러리 아카이브를 수집한 진정한 의의는 단순히 실패를 기록하는 데 있지 않다. 과거의 오류를 성찰하고, 그 경험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구축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아카이브란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건은 다큐멘터리 <Made You Look: A True Story About Fake Art>로 제작되었다. 당사자인 앤 프리드먼은 해당 인터뷰에서 위작임을 알고 판매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사기극이었음을 시인하기보다 자신이 무능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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