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깃발들의 탄생
지난 겨울, 비상계엄 정국에 시민들은 직접 깃발을 만들어 거리로 나왔습니다. 깃발에는 탄핵 구호도 적혀 있었지만 시민들의 다양한 정체성과 취향이 담겨 있었습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부터 게임, 웹소설, 뮤지컬까지, 시민들은 투쟁의 상징이던 깃발에 자신만의 색깔을 입혔습니다.
아카이브다 148회에서는 이 깃발들을 아카이빙한 '깃발들' 프로젝트를 소개했습니다. 지금 깃발들 사이트에는 1,170개의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는데요. 이 프로젝트의 기획자이자 디자이너인 최중원님과 웹 개발자 조현석님과 함께 깃발들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야기해 봤습니다.
두 분 모두 만화 좋아해서 타블렛 중고 거래하다 만난 이야기, 내향적인 성격을 극복하고 깃발들 아카이빙 홍보지 돌린 이야기, 불꽃남자 정대만 깃발은 결국 수집하지 못한 아쉬움, 기록의 공공성에 대한 해석 차이 등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론 시민기록 오픈마이크 이후 가칭 시민기록 네트워크 분들과 논의하며 기록 전공자들 없이도 알아서 아카이브 잘 하시는데 우리의 역할이 뭘까 고민이었습니다. 두 분과 이야기하고 나니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좀 더 명확해졌습니다. 시민, 활동가, 디자이너, 개발자가 바라보는 시선에 우리의 관점을 하나 더하면 되는 것 아닐까요? 매력 넘치는 두 분과의 대화 즐겁게 들어 주세요. 2부는 7월 21일 공개됩니다.
깃발들은 얼마 전 한겨레신문사에서 주최하는 휴먼테크놀로지 어워드 시빅테크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상은 시민의 자발적 기록 정신과 디지털 기술을 통한 민주적 연대의 확장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기록과 사회에도 소개되었던 '시대 정신'을 포함하여 한국외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기록과정보.문화연구모임, 에스엔에스에 남태령 기록보관소를 만들어 시민 연대에 물꼬를 튼 김후주 활동가 등 6팀이 공동 수상했습니다.
세월호참사 이후 시민들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를 자발적으로 기록하며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디지털, 웹, 소셜미디어, AI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프트 아카이브(어려운 아카이브의 반대)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특히 '시대정신'과 '깃발들'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진지하고 유쾌하게 다음 세대로 전하는 사회적 아카이브이자, 디자인과 예술이 사회를 이롭게 하는 도구라는 걸 증명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깃발들: 취향과 정체성을 담아서 (샌프란시스코 아트북 페어를 위해 쓴 글)
최중원(기획, 디자인)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피칸트를 송민선과 함께 운영한다. 서울대학교와 중앙대학교에서 모션그래픽 / 그래픽 디자인을 가르친다. 너무 많은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주체하기 어렵다.
조현석(웹 개발)
만화를 그리다가 미술을 전공하고, 그림을 올릴 홈페이지를 만들다가 개발자로 먹고 살고 있습니다. 만드는걸 좋아하다보니 <깃발들>도 만들었습니다.
“깃발들 flaaags.co.kr” 에는 1200개 가까운 다양한 깃발들이 펄럭인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으로 촉발되었던 지난 겨울의 시위에서 시민들이 직접 만들어 들고 나왔던 깃발들이다. 윤석열의 퇴진과 탄핵을 요구하는 문구가 적힌 깃발들도 있었지만, 깃발에 실린 대부분의 문구나 그림은 탄핵 정국과는 바로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시민들은 진지한 투쟁을 상징하던 깃발을 전유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게임, 웹소설의 캐릭터나 명대사를 등장시키고, 각자의 취향과 선호가 담긴 가상의 협회며 연합을 만들어 담았다. 인문학도, 애니 캐릭터 프사를 쓰는 개발자, 뮤지컬 팬, 오타쿠, 고3, 게이와 레즈비언과 트렌스젠더까지,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낯선 광장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드러내고 싶은 정체성을 선택하여 깃발에 담았다. 윤석열 탄핵을 요구하는 큰 대의를 위해 모였지만, 시민들은 시위에 나서면서 결연함 대신 즐거움과 유머를 챙겨들었고, 균일한 하나가 되기보다는 각자가 다름으로 반짝이기를 선택했다.
시위에서 펄럭였던 깃발들에 담긴 메시지들은 지금 현재 한국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한국 사회와 그 구성원들이 얼마나 다양한지, 그리고 역설적으로도 그 다양성이 어떻게 억눌리고 있었는지까지도. ‘깃발들’ 사이트는 이 깃발들을 고스란히 웹사이트에 아카이빙하여, 한국 시민들이 거리에서 어떻게 민주주의를 지켜냈는지를 기록함과 동시에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가시화된 오늘날 한국 사회의 모습과 구성원들의 다양한 정체성 또한 담고자 했다.
휴먼테크놀로지 어워드 사전 인터뷰
최중원
국회에서 탄핵안이 통과되던 날, 직접 만든 깃발을 들고 여의도 앞에 나가있었는데요. 그 전에도 여러번 집회에 참가했었고, 그 때마다 사람들이 들고 나오는 깃발들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깃발 위에 특정한 그래픽 요소들과 함께 담아 휘두르는 모습이, 본업이 디자이너인 저한테 특히 재미있게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사진을 찍어서 모아보고 싶었지만,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제대로 찍는 것이 어려웠고. 국회에서 탄핵안이 통과된 다음에는 꽤 빨리 상황이 정리될 것이라 생각해서, 깃발들이 집에 고이 모셔지기 전에 누군가가 이 깃발들을 아카이빙하는 사이트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래서 직접 만들게 되었습니다. 웹 개발은 제 전문이 아니라, 예전부터 여러번 협업을 했었던 개발자 현석님에게 연락을 드렸는데, 흔쾌히 맡아서 멋지게 구현해주셨습니다.
제보받은 깃발들을 아카이빙하면서 저는 깃발에서 언급되는 작품, 주제, 목소리의 다양성에 우선 놀랐습니다. 페미니즘, LGBT 같은 의제부터 게임과 애니메이션, 프로야구 등등은 예상했었는데, 팔레스타인이나 홍콩에 연대하는 목소리도 있었고, 처음 들어보는 작품들의 팬들도 많았으며, 논문 쓰는 대학원생들, 올해 고난은 입시로 족하다는 고3, (예술하는)뉴진스의 팬들 등등 모두가 깃발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많은 깃발들이 유머러스한 접근법을 취하고 있었지만,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는 깃발들도 적지 않았구요. 탄핵을 촉구하는 동일한 입장을 가지고 모였지만, 각자가 깃발을 통해 또 다른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 다양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구요. 대의에 묻히지 않고 각자가 자신의 의제나 목소리를 드내는 것을 보면서 한국 사회가 이전에 비해 성숙해지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계엄으로 촉발된 국면 속에서 우연히 드러나게 되었던 한국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의 다양성을 <깃발들> 이 포착하여 기록으로 남겨놓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뿌듯합니다.
조현석
사회적 예술은 종종 역사적 사건과 그로 인한 문화적 현상을 아카이브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형식은 본질적으로 접근성이 제한적인 경우가 많아, 그 기록이 널리 퍼지지 못하는 일이 잦습니다. 이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도구로 웹이 선택되곤 하지만, 웹 역시 플랫폼과 SNS 같은 주류 매체로부터 주목받지 못하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스팸처럼 잊히고 맙니다.
처음 중원 님에게 <깃발들>을 제안받고 단번에 참여하고 싶었던 이유는, 그 기획 속에 이러한 흐름에 대한 해법으로서의 콘텐츠가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2023년 크리스마스에는 각자의 소중한 메시지를 기록하고 공유하는 방식으로 큰 사랑을 받았던 웹서비스 <내 트리를 꾸며줘>가 있었습니다. 비록 이번엔 크리스마스처럼 행복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무너져가는 마음을 즐거움으로 다독이고,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정치적 목소리를 보탤 수 있었던 거리의 깃발들 역시 크리스마스트리에 장식된 메시지처럼 소중히 보관되고, 널리 나누어질만한 자랑거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깃발들>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벌써 천여 개의 깃발이 모였고, 트위터에서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깃발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의 재치 있는 깃발을 공유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서비스를 방문했고, 감사의 인사를 전해오는 이메일도 받았습니다. IT 산업이 필수 산업이 된 이 시대, 성공한 서비스들의 트래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작은 숫자였지만, 제게는 오랜만에 두근거리며 지켜보게 되는 큰 숫자였습니다.
이 서비스가 얼마나 오래 유지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극과 혐오의 콘텐츠를 등에 업고 정치적 도구로 전락해버린 지금의 웹 환경 속에서, <깃발들>은 여전히 개인의 외침과 사랑의 연대가 콘텐츠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웹이 돈벌이 수단이 되고, 거대한 플랫폼의 부속품을 만들어야만 개발자로서 생존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지금껏 쌓아온 기술과 경험이 헛되지 않았음을,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웹의 모습이 여전히 재현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성공한 웹서비스에서 기술은 종종 더 큰 영리적 이익을 위한 도구로만 활용되곤 합니다. 그 또한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기술은 때때로, 그 시작처럼, 우리 자신과 우리의 환경을 돕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를 필요로 합니다. 휴먼테크놀로지 어워드 수상은 <깃발들>을 통해 제가 그 증거를 손에 쥘 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기술자로서 무척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참고자료
- 깃발들 - https://flaaags.com/
- 휴먼테크놀로지 어워드 2025 - https://lifeindigitalforum.org/124
- 계엄에 맞선 시민과 단체들...시빅테크상 수상 - 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752316?sid=105
- Flag Cron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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