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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를 만난 예술이 과거를 애도하는 방법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강에 스며든다》展 관람후기

2025.04.16 | 조회 5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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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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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 모음동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 모음동

 

때 아닌 4월의 돌풍 예고가 내린 지난 주말, 평창동에 위치한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에 다녀왔다. 2023년 《명랑학문, 유쾌한 지식, 즐거운 앎》 개관 전시를 시작으로 3번째 방문이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전시장, 레퍼런스 라이브러리 등 저마다의 목적으로 아카이브를 채우고 있었다. 개관 3년차에 접어든 현재,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는 어느덧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공간으로 자리 잡은 듯 했다.

기록학을 전공한 사람들에게도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는 좋은 레퍼런스다. 당장 나부터도 기록물 보존보다는 활용에 방점을 둔 기관에서 일하고 있기에 기록을 활용한 전시를 기획할 때 좋은 참고가 된다. 그런데 이번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 전시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강에 스며든다》는 단순히 전시의 기술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의제, 기획의도가 잘 어우러져 더욱 감동스럽게 다가왔다. 이 글이 발행되는 4월 16일에 공유하면 더욱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부족한 글로나마 감상을 공유하고자 한다.

 

매뉴스크립트와 실천적 예술의 만남

 

3월 6일부터 7월 27일까지 열리는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강에 스며든다》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의 2025년 기관 의제인 ‘행동’과 연계하여 아카이브 기반 미술과 아카이빙 활동을 연결하고 있다. 전시 제목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에서 영감을 받아, 과거에 고정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재구성되고 재해석되는 기록의 속성을 강조했다.

이번 전시는 공적 기록보다 뒤늦게 주목을 받은 매뉴스크립트, 즉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 기록을 중점으로 다뤘다. 매뉴스크립트의 가치는 2000년대 전후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적 사건들에 대한 진상 규명과 함께, 공식 역사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한 주체들로부터 주목받았다. 매뉴스크립트의 부상은 마침 주류 매체에서 다루지 않는 사건을 공론화하기 시작한 동시대 미술과 연대하며, 제도권의 역사와 대항하는 공동의 지형을 형성해나갔다.

전시는 ‘지연하는 기억(Deferred Memory)’, ‘목격하는 기록(Witnessed Record)’, ‘던져지는 서사(Projected Narrative)’ 세 파트로 구성된다. 권은비, 김아영, 나현, 문상훈, 윤지원, 이무기 프로젝트, 임흥순, 타카하시 켄타로 등 7인/1팀의 작가가 참여했으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주4·3평화재단,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과 협업한 자료와 함께 영상, 사진, 설치작품 등 다양한 컬렉션을 선보인다. 파트별로 인상 깊은 작품 하나씩을 소개하고자 한다.

 

① 지연하는 기억: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경험에 맞추어 수정된다

 

기록은 얼핏 항구적인 것처럼 보인다. 기록을 해석하는 ‘지금, 여기’의 우리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 기록을 일부분 오해하고 있는 걸까? 그런데 의도적으로 과거에 개입하길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과거와 현재를 일부러 중첩시키거나 비틀면서 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한다. 이렇게 시간을 재배치하는 방식은 사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과 닮았다. 우리는 여러 시간과 사건들이 복잡하게 얽힌 세계를 살기 때문이다.

 

이무기 프로젝트, <트랜스-젠더-시간-지도>
이무기 프로젝트, <트랜스-젠더-시간-지도>

 

‘지연하는 기억’ 파트를 들어서자마자 벽면을 거대하게 장식한 이무기 프로젝트(이태원은 무엇일까 기록하기 프로젝트)의 <트랜스-젠더-시간-지도>가 눈길을 끌었다. 이 지도는 트랜스젠더의 삶과 한국 퀴어 역사를 한국 사회사의 흐름 위에 배치하며, 트랜스젠더 개인의 서사가 한국 사회사와 어떻게 교차해 왔는지를 드러낸다.

거대한 크기만큼이나 구성이 복잡해서 한눈에 파악하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타임라인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지도 않았고, 트랜스젠더의 삶은 주변부에 배치되어 주류 역사와 단절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사진 한 컷에 담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이는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다. 개인의 삶과 시대의 흐름이 공존하면서도 균열되는 지점을 보여주기 위해, 시공간과 사건을 낯설게 재구성한 것이다.

기록되지 못한 이야기들, 기록에서 밀려난 존재들이 지나간 시간을 딛고 발화할 때, 기억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정치성을 획득한다. 이무기 프로젝트의 작업은 하나의 ‘대답 없는 질문’처럼 다가온다. 왜 어떤 이들의 삶은 주변화 되어야 했는가, 우리는 그 단절에 어떤 방식으로 응답할 수 있을까.

 

② 목격하는 기록: 우리는 과거의 발자국을 따라 현재를 걷는다

 

타카하시 켄타로, <곁에 머문 부재>
타카하시 켄타로, <곁에 머문 부재>

 

여기 어딘가 아득하고 외로운 감정을 자아내는 사진들이 있다. ‘목격하는 기록’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파트로, 특히 타카하시 켄타로의 <곁에 머문 부재>라는 작품(사진 19점이 하나의 작품)이 인상 깊었다. 

젊은 일본인 사진작가 타카하시 켄타로는 몇 년간 오키나와에 머물던 중 우연히,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와 오키나와에서 생을 마감한 고(故) 배봉기 씨(향년 77세)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이후 일본군 '위안부' 첫 증언자이기도 했던 배 씨를 취재한 가와타 후미코를 만나고, 배 씨의 유품을 갖고 있던 김현옥 씨를 만나면서 배 씨가 오키나와에 남긴 자취를 본격적으로 추적해나간다.

타카하시는 남겨진 물건과, 배봉기 씨의 삶을 기억하는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가 걷던 길을 따라 걷고, 그가 보던 풍경을 바라보면서 중첩된 과거와 현재를 사진으로 재현하기 시작한다. 타카하시가 촬영한 사진들에는 작가의 손과 같은 신체 일부가 등장하는데, 이는 미래에서 온 목격자가 과거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작업으로, 타카하시는 이를 'touching(접촉)'이라고 표현했다. 쉽게 찍힌 사진의 폭력성을 알고 있기에 의도적으로 찍는 자신을 같이 드러낸 것이다.

타카하시의 작업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사라진 존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사진은 보통 ‘기록’이라는 이름 아래 무언가를 고정시키려 하지만, 이 작품에서의 사진은 오히려 결여와 흔적, 그리고 남겨진 자의 감정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했던 누군가를 기억하는 데 있어, 타카하시는 공공기록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정서적 층위를 제시한다.

 

③ 던져지는 서사: 공인된 역사에는 틈이 있다

 

모든 기록이 보존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기록은 필연적으로 누락과 공백을 동반한다. 이러한 불완전성을 전제로 동시대 미술은 아카이브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한다. ‘던져지는 서사’는 기록이 내포한 권력 구조와 선별의 과정을 드러내고, 제도와 사회가 배제한 목소리를 포착하며 새로운 서사를 직조한다. 각 작업은 국가, 가상 노동, 재난 등의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공적 기록이 담지 못한 회색 지대를 파고들고, 이를 통해 아카이브의 틀을 확장하거나 균열 내기를 시도한다.

 

권은비, <폐허의 잔해로 직조한 시>
권은비, <폐허의 잔해로 직조한 시>

 

레퍼런스 라이브러리를 지나 2층 전시장에 이르면, 권은비 작가의 <폐허의 잔해로 직조한 시>가 보인다. 얼핏 피아노처럼 보이지만, 피아노의 현 대신 면실이, 건반 대신 면실로 짜인 천 조각이 있다.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옛날 방직기와 피아노가 결합한 형태다.

권은비 작가는 사회적 비극을 마주한 개인의 감각을 표현하는 작가다. 어느 날 작가는 이태원 참사 분향소가 있는 시청광장에 갔다가, 유가족들의 울음과 저항의 목소리가 하나의 슬픈 음악처럼 들리는 순간을 경험한다. 이 소리가 마치 레퀴엠(가톨릭 장례 미사곡)처럼 들렸다. 피아노에 적힌 ‘슬퍼하는 자에겐 복이 있나니(Selig sind die da Leid tragen)’라는 문구도 브람스 <독일 레퀴엠>의 성서 구절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이 작품은 절망 속에서도 삶을 이어온 이들의 목소리를 공식 역사의 대항적 기억으로 직조하며, 재난을 애도한다.

 

권은비, <폐허의 잔해로 직조한 시>
권은비, <폐허의 잔해로 직조한 시>

 

기록은 기억을 담는 하나의 장치다. 하지만 기억은 불안정하고 연약하다. 이 불완전함을 무릅쓰고 잊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는 것이 기억기관의 역할일지도 모른다. 전시는 묻는다. 기록은 무엇을 남기고, 누구를 지우는가. 그럼에도 아카이브가 닫힌 문이 아니라, 여전히 쓰이고 열리는 장일 수 있는가.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 웹사이트 https://sema.seoul.go.kr/kr/visit/art_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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