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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질이 아카이브가 되는 순간

몰두의 힘은 결국 기록이 된다!

2025.04.29 | 조회 8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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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사회

기록에 대한 모든 이야기

1. 어느 날, 마음을 빼앗기다.

누구에게나 삶을 완전히 바꿔놓는 순간이 있다. 내게는 2021년 4월, '그룹사운드 잔나비'의 음악을 처음 들은 날이 그랬다. 단순한 '좋아함'이나 '관심'이 아니었다. 몇 초 만에 그들의 음악이 내 일상의 한가운데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잔나비의 노래를 끊임없이 찾아 듣고, 무대와 인터뷰를 따라가며, 이들의 성장과 변화를 주의 깊게 바라보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덕통사고'였다. 이름조차 귀여운 이 사고는 그러나, 내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어쩌면 이번 글도 지난 주말 '잔나비 2025 콘서트'를 다녀온 후유증인지도 모른다. 하필 이번 발행 순서 전에 콘서트를 다녀오는 바람에, 대통령기록물 관리가 이슈가 되고 있는 이 엄중한 시기에 이렇게 가벼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youyube, 1theK Live - 원더케이 라이브  '댓글과 함께 듣는 잔나비(Jannabi)' 화면 캡쳐
youyube, 1theK Live - 원더케이 라이브  '댓글과 함께 듣는 잔나비(Jannabi)' 화면 캡쳐

 

신형철 평론가는 『인생의 역사』에서 덕질에 대해 이렇게 썼다.

"덕질, 즉 한 사람이 어떤 것에 최선을 다해 몰두하고 헌신하는 일은 범상한 일이 아니다. 흔히 덕통사고라는 말을 쓰는 것은 우연한 계기로 어떤 대상에 불현듯 마음을 뺏긴다는 뜻이겠지만, (중략) 한 대상에게 불현듯 마음을 뺏기게 되는 드문 사건이 한 사람을 불가역적으로 바꿔놓는다. 나는 이 변화가 긍정적인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우리로 하여금 어떤 탁월함을 갖게 하는 변화일 수 있다고 말이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 덕질을 우리에게 그런 덕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준다. 자꾸만 나를 혐오하게 만드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면서, 이 세계와 맞서고 있다." (250쪽)

세상은 끊임없이 냉소를 강요하고, 자기 자신마저 혐오하게 만든다. 그런 세계에서 무언가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작은 기적이다. 덕질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가장 순수한 감정, 몰입하는 힘, 사랑하는 능력을 지켜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목격했다. 지난 12.3 내란 정국 이후, 광장을 가득 메운 수많은 시민들 속에서도 덕질의 에너지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몰두하고, 기록하며 응원했던 그 에너지가 때로는 광장의 함성으로, 변화의 힘으로 번져갔다. 덕질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때로는 세상을 바꾸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2. 덕질, 그리고 기록으로의 변주

덕질은 자연스럽게 기록을 부른다. 좋아하는 대상의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싶기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공연 일정을 달력에 적는다. 좋아하는 인터뷰를 스크랩하고, 발매 정보를 정리한다. 사소한 인스타그램 하나, 사진 한 장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놓치지 않으려 한다.

이렇게 쌓이는 조각들은 개인의 추억을 넘어선다. 특정 시간과 사건에 대한 객관적 기록이 되고, 공동체의 집단기억이 된다. 덕질이 개인을 넘어 하나의 사회적 아카이빙으로 발전하는 순간이다.

공공기관이 수행하는 전통적 기록관리와 다르게, 팬덤 아카이브는 사랑이라는 동기로 움직인다. 의무나 직무가 아니라, 진심과 열정이 만들어내는 기록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수한 동기야말로 때로는 가장 치열하고 집요한 기록을 남긴다.

덕질을 통한 기록은 하나의 대안적 아카이빙 모델을 보여준다. 공식적 시스템 밖에서도, 인간은 기억을 남기고 싶어 하고, 또 남길 수 있다.

 

3. 서태지 아카이브: 팬덤이 만든 비공식 기록유산

『서태지 아카이브』는 그 가능성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서태지 아카이브 공식 웹사이트는 서태지의 1992년 데뷔부터 현재까지, 30년 넘는 음악 활동을 집대성한 비공식 아카이브다. 팬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방대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 구축한 이 아카이브는 단순한 팬사이트를 넘어 하나의 기록문화유산으로 평가할 수 있다.

 

서태지 아카이브 (https://www.seotaiji-archive.com/)
서태지 아카이브 (https://www.seotaiji-archive.com/)

 

서태지 아카이브는 다음과 같은 구조적 특징을 가진다.

  • 포괄성: 정규앨범, 싱글, 콘서트, 방송출연, 인터뷰, 수상내역 등 공식 기록은 물론, 팬클럽 활동 내역, 미공개 사진, 복원된 방송 영상까지 아우른다.
  • 연대기적 구성: 데뷔부터 현재까지를 시간 순으로 정리해, 서태지의 변천과 시대 흐름을 함께 읽을 수 있도록 설계했다.
  • 자료 검증과 출처 관리: 단순한 정보 수집이 아니라, 가능한 한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하여 아카이브의 공공성과 객관성을 높였다.
  • 팬 경험의 기록화: 공식 활동뿐 아니라 팬들이 함께 만들어간 문화(팬클럽 창단, 팬미팅, 커뮤니티 활동)도 소중한 기록으로 남겼다.
  • 자체 복원 프로젝트: 사라진 방송자료나 공연영상, 음원 등을 팬들의 협력을 통해 복원하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다만 최근에는 사이트 운영이나 업데이트가 다소 뜸해진 상황이다. 팬 커뮤니티에서도 신규 콘텐츠가 많지 않고, 사이트 관리도 예전만큼 활발하지 않다는 아쉬운 이야기가 들린다. 하지만 이미 구축된 방대한 기록 자체는 여전히 소중하다. 덕질로 시작해 수십 년의 기억을 축적한 이 아카이브는, 지금도 팬덤 기록문화의 모범이자 가능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로 남아 있다.

덧붙여, 서태지 아카이브 뿐만 아니라 BTS 아미(ARMY)들은 자체적으로 공연 기록과 팬덤 문화를 정리한 'ARMYpedia'를 구축했고, EXO 팬덤은 앨범 발매 히스토리와 전 세계 투어 기록을 아카이빙하는 작업을 자발적으로 진행해왔다. 이러한 움직임은 덕질이 더 이상 개인의 취향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의 문화적 기록행위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덕질이 아카이브가 되는 순간'은 지금 이 시대 곳곳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4. 우리 모두의 덕질 아카이브를 위하여

문득, 각자의 덕질이 각자의 아카이브로 이어지는 세상을 상상해본다. 나 또한 언젠가 ‘잔나비 아카이브’를 만들어 그들의 첫 번째 무대, 첫 번째 음반, 첫 번째 수상소식, 팬들과의 소소한 순간들까지 시간과 공간 속에 흩어진 기억들을 한데 모아, 잔나비라는 이름의 작은 우주를 기록하고 싶다.

잔나비 아카이브는 단순히 이들의 성공을 기념하는 공간이 아니라, 그들이 걸어온 길을 함께 기억하고, 그 순간들을 사랑했던 내 자신을 기록하는 일이 될 것이다.

덕질은 결국,  열정을 기록하는 일이다. 좋아하는 무언가를 세심히 관찰하고, 소중히 간직하고, 후대에 전하려는 마음. 이것은 기록관리의 가장 원초적이고 아름다운 본능이기도 하다. 

기억은 흩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덕질하는 이 순간, 우리는 이미 미래를 기록하고 있다.

2025. 4. 28. 발매된 잔나비 4집 앨범(잔나비 인스타그램)  
2025. 4. 28. 발매된 잔나비 4집 앨범(잔나비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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