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기록인, SST, rEdbEaN, 이동식 다주택자, Bloom, 바바푸푸, Sanddune, 부드러운직선, 선인장, 호롱불, 이대로, 지구별여행자, 김선, 삽질, 망치, 사계절
기록관리 전문가들은 늘 ‘전문성 있는 기관장’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문재인 정부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받아들여 국가기록원장(이하 원장)과 대통령기록관장(이하 관장)에 최초로 전문가를 임명했다. 그들의 성과에 대한 평가는 차이가 있지만, 당시 국가기록원과 대통령기록관이 소통하며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특히 대통령기록관은 개별대통령기록관을 추진했으며, 대통령기록의 온전하고 풍부한 이관 성과를 냈다. 내외부에서 토론도 활발했다.
정부가 바뀌면서 전문직 기관장은 자취를 감췄다. 원장과 관장은 고위 행정관료의 몫이 되었다. 그런데 관료 출신 이동혁 관장의 임기가 3년 이상 남았음에도 지난 2월 28일 관장을 경력 경쟁 채용한다는 공고가 났다. 대통령 기록관리가 날로 중요해지는 시점에 이런 결정이 기대를 모았으나, 이후 언론 등을 통해 지원자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그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객관적인 경력으로 보면 누구보다 대통령기록관리 실무에 오랫동안 종사했던 지원자를 기록관리전문가를 포함해서 언론, 정치권 등 모든 영역에서 한 목소리로 반대하는 이유는 무얼까.
지금 임용 절차가 진행 중인 대통령실 행정관 출신 정아무개는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실에서 기록관리실무를 담당했다. 이후 문재인 정부 시절 모 부처 소속기관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고 얼마 후 다시 대통령실 기록관리담당자로 일했다. 소위 보수 정부 대통령기록관리 실무적 책임을 모두 맡았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이명박 대통령실의 비밀기록에 대한 과도한 지정, 이관 이후 밝혀진 기록물 유출, 박근혜 대통령실의 기록물 무단폐기 의혹, 부실한 이관 등 사회적으로 쟁점이 된 사안만 살펴봐도 그가 오랜 세월 동안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번 윤석열 정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통령선물인 동물로 전임 대통령을 공격하고, 영부인이 개인에게 받은 명품백을 대통령선물이라고 우긴 일도 있었다. 최근 내란과 관련해서는 관련 기록의 부실한 생산과 무단폐기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는 기록물의 생산, 이관, 공개 등 모든 단계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과거의 실패가 명확한 인물을 대통령기록관장으로 임명하는 것은, 실패를 공식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과거의 행적보다 심각한 문제는 정아무개가 관장으로 임명된다면, 앞으로 대통령기록관리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가 관장이 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통령기록관은 고립된 채로 서서히 죽어간다.
그간 대통령기록관리가 정체된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들의 일을 숨기는 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점이 부족했는지 외부에 알리고 의견을 구하는 것을 극히 꺼렸다. 보안성 높은 기록을 관리한다는 것과 그 일 자체를 알리지 않는다는 것은 다르다. 대통령기록관의 이런 태도로 한국 기록학계는 대통령기록관리에 대해 연구할 기회를 잃었고, 대통령기록관은 새로운 방향과 사고를 흡수 할 기회를 잃었다. 이런 태도는 이명박 박근혜 보수 정부를 지나며 극에 달했다. 연구하고 의견을 나누는 대신 국가 아카이브는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들을 각종 공적인 업무영역에서 몰아내고, 전임 정부의 대통령기록 활용을 유출이라 고발하고, 각종 콘텐츠 등을 정부 코드에 맞추어 만드는 일을 했다. 이 모든 일의 뒤에 당시 청와대 정아무개 행정관이 있다는 것은 정부의 업무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대통령실 행정관은 단순히 대통령기록만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관련 기관에 대한 업무를 조정하고 정무적 판단에 개입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아무개가 관장에 부임한다면 대통령기록관은 그가 그래왔던 것처럼 비판적인 전문가와는 소통하지 않고, 부족한 점에 대해서는 숨기는 데 모든 노력을 다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그가 담당했던 긴 시간 동안에 대한 각종 비판과 성찰은 더더욱 불가능해 진다. 이는 대통령기록관이 학계와 전문가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국민과의 신뢰를 상실하는 지름길이다.
내란의 증거는 흩어지고, 얼마남지 않은 증거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다.
정아무개 전 행정관이 임용되면 각종 내란과 관련된 기록의 공개와 활용을 어렵게 할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모든 업무가 법령과 지침에 의해서 추진하는 공공기관이 한 사람의 기관장으로 인해 바뀌는 것이 가능할까. 권한대행이 국민의 기대를 배반하며 대통령기록을 지정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간의 행태로 보아 많은 기록물을 지정하고, 문제가 될 법한 기록물(비화폰 서버 등 행정정보데이터세트 포함)은 아예 이관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누락된 기록을 확인하고, 검수하는 것은 관장의 일이다. 향후 그 기록물을 정리하고, 국민에게 이관결과를 공개하는 것 또한 관장의 일이다. 과연 제20대 대통령실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행정관이 자신이 담당한 기록물 이관의 문제점을 스스로 밝히고 국민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설령 과정이 적절히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내란 당시 대통령실에서 일했던 자의 설명을 그대로 믿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이관 이후에도 문제는 계속된다. 그간 관례대로 지정기록물 목록까지 지정된다면, 어떤 기록물이 이관되었는지, 어떤 기록물이 관리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대통령기록관뿐이다. 영장에 의해 검찰이 지정기록물을 열람해도 모든 기록물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결국 세부적인 기록물 제공은 대통령기록관의 협조에 기댈 수밖에 없다. 열람 과정은 모두 관장의 결재하에 이루어진다. 법에 의한 제공 등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세부적인 제공 범위, 제공 시점 등은 얼마든지 내부에서 조정이 가능하다. 모든 것을 절차대로 진행한다고 해도, 이 과정을 정아무개 전 행정관이 총괄한다면, 그 행위의 적절성을 국민에게 납득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통령기록관리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다시 찾을 수 없을 만큼 산산이 부서지게 된다.
국민의 알권리는 무참히 짓밟힌다.
지정기록물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관이 완료되면 국회요구자료, 언론취재, 정보공개청구 등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다양한 요구가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대통령기록관은 이러한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할 의무가 있다. 목록을 정리해 사전 공개하고, 정보공개청구 요청에 적극적으로 답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이 법령에 상세히 규정되어 있지는 않다. 대통령기록관이 전문성과 독립성에 기반해 스스로 결정하고 추진해야 할 부분이다. 정아무개 행정관은 얼마 전까지 대통령실에서 기록관리와 정보공개를 담당했다. 제20대 대통령실에서 정보공개업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이미 알려져 있다. 업무를 수행한 공무원인 대통령실 직원 명단을 공개하라는 요청을 지속적으로 거부한 것도 모자라 대법원판결이 확정되었는데도 지금도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정보공개에 소극적인 수준을 넘어 법원의 판결까지도 무시하는 초법적인 행태를 자행한 것이다. 이러한 불법에 최소한 침묵하고, 방조했던 자가 관장이 되어서 갑자기 적극적으로 기록을 공개하고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할 수 있을까. 현재도 대통령기록관이 국민의 정당한 정보요구에 대해 최대한 시간을 끌고, 공개하지 않기 위해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만약 정아무개 행정관이 임명된다면 이러한 업무태만을 넘어 국민의 알권리를 무시하는 초법적인 행태를 보게 될 것이다. 국민이 대통령기록관리의 필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는 원천적으로 박탈된다.
대통령기록관의 모든 업무는 신뢰받지 못한다.
대통령기록관은 부족하지만, 법령에 의해 부여된 많은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 생산기관에서 기록을 잘 생산해 아카이브까지 이관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비공개 기록을 철저히 보호하기 위한 제도와 장치들을 마련하고, 공개 기록이 활발히 활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도 고민한다. 모든 업무가 대통령과 관련되어 있기에 민감하지만, 반드시 현실 정치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업무는 정치와 상관없이 기록관리상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업무를 총괄하는 관장에 정아무개 전 행정관이 임명된다면 모든 업무는 의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통상적으로 이루어지는 비공개 기록에 대한 철저한 보호는 기록을 숨기기 위한 불순한 의도로, 활용을 위한 당연한 절차는 공개를 미루기 위한 술수로 읽힐 수 있다. 이미 대통령기록관리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사라져 버린 상황에서 아무리 업무의 정당성을 호소해도 소용은 없다. 국민이 인정하지 않는 기관에 예산, 인력 등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다. 결국 대통령기록관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혼자만의 억울함만 호소하며 비참하게 죽어갈 것이다.
이러한 모든 문제에도 행정안전부가 정아무개 전 행정관에 대한 관장 임명을 강행한다면, 이는 단순한 기관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그동안 기록관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지만, 모든것을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 기록물관리기관장을 설득하며 공공기록관리 발전이라는 목표를 위해 묵묵히 일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국가 기록물 관리를 총괄하는 행정안전부가 기록관리를 등한시하는 것을 넘어 기록관리를 위기에 몰아넣은 자를 아카이브의 책임자로 임명하려고 하고 있다.이는 기록관리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며, 대한민국 기록관리의 몰락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대통령기록관장 임명을 소리높여 반대하는 이유다. 정아무개 전 행정관이 관장으로 임명되는 그 순간은 대한민국의 기록관리가 부서지는 순간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한덕수 권한대행과 행정안전부 고기동 차관은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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