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별 생각 없이 인사정보관리시스템에 들어가서 마주한 ‘인사 기본’ 화면. 그 페이지에는 해당 직원의 재직 상태나 담당 직무, 긴급연락처 같은‘기본’적인 정보가 담겨 있었는데, 그 외에도 이런 항목들이 있었다.
신장, 시력, 취미/특기, 체중, 혈액형, 종교
취미/특기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다른 항목들은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신장. 내 키가 업무와 어떤 상관이 있을까? 시력. 눈이 나쁘면 하기 힘든 직무가 있나? 체중. 너무 무거운 사람이면 해외 출장 갈 때 비즈니스석이라도 태워주려고? 혈액형. 요즘 MBTI로 그 사람의 성향을 짐작하듯이 혈액형을 조사해두려고 했던걸까? 종교. 종교가 같은 사람들끼리 한 부서에 두고 싶어서? 누군가가 이미 연구해 놓았을 것 같지만 당장은 모르겠다. 다만 20세기의 조직은 직원의 모든 것을 관리하려고 했다는 것은 잘 알겠다.
공공부문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긴 하다. 아마도 이 인사'기본'카드는, '인사정보관리시스템'이라는걸 처음 구축할 당시에 쓰던 인사기록카드를 그대로 전산으로 옮겨왔을 따름일 것이다. 그 인사기록카드는 다른 기관들의 사례를 조합한 결과였을 것이고, 그걸 왜 조사하는지는 궁금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항목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삭제하지는 않은 상태로 2025년에 이르렀을 것이다. 있던 항목을 그저 쓰지 않는 것은 쉽지만, 서식을 바꾸는 것은 지난한 결재를 거치는 과정이면서 담당자에게 특별한 업적을 남겨주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록의 형식은 그 문서를 만든 주체의 욕망, 또는 그 문서가 만들어진 배경, 나아가서는 어떤 문서를 다루는 조직의 문화까지 보여준다. 자연사연구회에서 23개국의 사망진단서를 모으고 번역하여 2019년에 출판한, 인과관계가 명확한 것만을 적습니다 는 책은 ‘죽음 이후에는 살아서는 볼 수 없는 자신의 마지막 기록물’이 각국마다 어떻게 비슷하고 다른지를 볼 수 있게 한다.
한국을 제외한 다수 국가의 사망 진단서에는 사망자가 여성인 경우 임신과 관련된 항목을 둔다. 미국의 사인서에는 사망자가 히스패닉 계인 경우 멕시코/푸에르토리코/쿠바/기타 중 어떤 계통인지를 따로 묻는 선택지가 있고, ‘사망자의 인종으로 보이는 항목'을 14가지 중 고르도록 하는 질문이 바로 옆에 이어진다. 콜롬비아 사망진단서에는 사망자가 원주민, 집시, 신안드레스군도의 후손, 산바실리오 출신, 흑인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 기재해야 하는데 원주민인 경우 출신 지역까지 써야 한다. 태아 사망인 경우 그 엄마의 기혼 상태를 여섯 가지 중 하나로 고르도록 하는 것도 눈에 띈다. 일본에서는 태어난 해와 사망한 해를 천황의 연호로 적는다. 사망진단서를 작성할 수 있는 사람도, 양식의 수도, 시신 처분 방법에 대한 선택지도 그 나라의 문화를 보여주는 힌트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한 가지 서식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통계청에서는 1960년대부터의 인구주택총조사 조사표를 온라인으로 제공하는데, 1960년에는 이런 항목들이 있다. 집 안에 아궁이가 있는지, 지붕의 재료는 무엇인지(짚, 시멘트, 흙 등), 굴뚝이 있는지, 음용수는 어디에서 얻는지(5개 선택지 중 세 개가 우물) 등. 통계청에서 직접 자료를 열람하기는 어려우나 국민의 강제 징용 여부를 물었던 건 1949년이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는 기사도 있다. 조사 당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어떤지, 이 때 정부는 어떤 것을 알고 싶어했고 어떤 사실을 외면하려고 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예이다.
이렇듯 형식을 만들어낸 주체의 욕망은 딱딱하고 태연하게 구는 문서를 뚫고 나온다. 그렇다면 국가기록원은 기록전문가들에 대해 어떻게 조사하고 있을까?
국가기록원은 몇 가지 방법으로 공공기관의 기록전문가 배치 현황을 조사한다. 먼저 매년 10월에 기록관리현황 정보를 시스템으로 수집하는데, 이 때에는 기록물관리 전문요원 몇 명이 근무하는지, 그 직원이 일반직(정규직)인지 또는 임기제(계약직)인지를 기재하도록 한다. 다음으로, 올해 4월에 이와는 별도로 조사한 기록관 설치 운영 현황도 있다. 이 때에는 기록물관리 전문요원 자격을 가진 기록관리 전담 인력의 수만 기재하도록 했다. 전문요원에 대해 가장 상세하게 조사하는 것은 기록관리 평가지표로, '기록물관리 전문요원 채용의 적절성' 항목을 5점 정량평가 항목으로 넣고 있는데 이 때 배점은 다음과 같다.
(1) 주 40시간 정규직 기록물관리 전문요원 채용(5점)
(2) 주 40시간 미만 정규직 기록물관리 전문요원 채용 (3점)
(3) 기간제 근로자, 계약직 등의 전문요원 채용 또는 미채용 (0점)
국가기록원, 2024. 12., 기록관리 평가지표 설명자료-정부산하 공공기관
(출처: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업무안내.자료> 기록관리 평가)
공공기관의 채용 공고를 관심 있게 보는 사람이라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정규직보다 더 빈번하게 채용되는 형태인, '주 40시간 일하는 무기계약직'은 어디에 해당하는가? 이 조사에서는 ‘정규직’에 해당한다*. 시간제 정규직을 채용해도 3점은 부여한다. 다분히 기관 운영에 친화적인, 동시에 조사 결과에 대해 중앙기록물관리기관으로서 껄끄러운 조치를 취할 필요도 없는 편리한 방식이다. 세 가지 조사를 종합하면 국가기록원은 ‘어떤 형태로든 자격이 있는 사람을 뽑기만 한다면’ 인정해 주겠다는 입장인 것 같다.
이렇게 해서 모든 공공기관에 기록물관리 전문요원이 한 명씩 들어간다고 치자. 그러면 한국의 기록관리 현실이 지금보다 나아질거라고 낙관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일부’ 기록물을 폐기할 때 형식적인 절차를 거치는 기관이 한 해에 몇 개씩 증가할 수는 있겠다.
현재의 기록관리 제도는 한 기관의 기록관리를 기록물관리 전문요원의 역량과 노력에 100% 기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아키비스트 - 늘 '고도의 민감한 상태(테리 쿡**)',를 유지하며, 그 기관에서 무엇을 기록으로서 관리해야 하는지를 그 기관에 애정을 가진 내부 구성원이자 아키비스트로서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 그리고 형식적인 절차에라도 숨을 불어 넣으려 애쓰고, 더 의미 있는 기록관리를 하기 위해 기관에서 더 중요한 존재가 되고자 노력하는 아키비스트 - 는, 그런 방법으로는 양성할 수 없다. 그리고 중앙기록물관리기관은 이를 모르고 있거나 외면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다른 서식들은 지나칠 만큼 조사 대상에 관심이 많다. 도대체 이것까지 조사를 하는 의도가 뭘까 하는 생각에 불쾌해질 정도다. 그런데 중앙기록물관리기관이 기록관 운영 현황을 조사하는 서식에서는 기록관리에 대한 욕망(또는 진심)을 볼 수가 없다. 기관의 기록관리 역량과 거의 동일시 되는 기록전문가에 대해 그 어떤 관심도 없다. 그 사이, 형식적으로 수집된 수치는 그들의 고립된 노동을 가리기 바쁘고, 그 숫자에 담기지 않는 개인의 고민과 피로는 점점 깊어지기만 한다.
*이 채용 형태의 문제에 대해서는 기록과 사회 글 '나는 내 일을 좋아하고 싶다. 하지만(2024. 3. 6.)' 참고.
**이승억. (2014). 동시대의 기록화를 지향한 보존기록평가선별에 관한 제언. 기록학연구, 42, p. 186.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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